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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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는 대개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지난주엔가 일본 출신 번역가이자 작가인 스가 아쓰코를 알게 됐다. 아마 이번에 새로 나온 <트리에스테의 언덕길>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궁금하다면, 작가의 전작들을 읽으면 된다. 우선 가장 가까운 중고서점에 품절된 <밀라노, 안개의 풍경> 재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람처럼 날아가서 샀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쟁>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읽기에 돌입했다.

 

파리와 로마 유학을 했다는 자칭 롬바르디아 사람 스가 아쓰코에게서 왠지 모를 시오노 나나미의 향기가 났다. 나나미 씨가 극우 인사였다는 걸 알았다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로마인 이야기> 완독을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서사하라에서 호세와 로맨스를 나누었던 대만 출신 작가 싼마오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니 연배로 보면 어쩌면 스가 아쓰코는 그들에 앞선 코스모폴리탄 선배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구사하는 이야기는 마치 밀라노의 안개처럼, 베네치아의 물결처럼 그렇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밀라노 코르시카 서점에서 일하던 페피노와 만나 결혼하고, 롬바르디아인으로 살다가 남편이 죽은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문장을 읽고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에서 단서를 찾기 시작한다. 어쩌면 스가 아쓰코의 이야기들은 미스터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스가 아쓰코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거구의 순박한 노총각 안토니오가 죽은 남편의 장례식에 등장해서, 운구 중인 관에 반쯤 시든 금작화를 내려놓는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소소해 보이는 무심한 이야기들로 독자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이렇게 한단 말이지.

 

작가의 아버지에게 들은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에피소드에서는 나도 가봤던 나폴리 생각이 절로 났다. 그 시절 나의 여행은 항상 무계획이었다. 그래서 로마 민박집에 여권을 두고 아무 생각이 나폴리 그리고 내친 김에 카프리섬까지 갔다가 소렌토를 돌아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했다. 아뿔싸, 로마행 마지막 기차가 출발했다고 한다. 미치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폴리의 싸구려 호텔에라도 가서 자자 싶었지만 여권이 없다고 해서 모든 호텔에서 거절당했다. 그래서 결국 나폴리 중앙역 부근의 경찰서에 들어가 쪽잠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역시나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나폴리 중앙역 앞에서 박스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 와중에 내 가방을 노린 누군가가 머리에 베고 있던 가방을 빼가려다 나에게 걸렸다. 날 보고 씩하니 웃고 그냥 갔던가. 어쨌든 나는 나폴리를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걸까.

 

나와는 다른 관습과 생각 그리고 사고방식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매일 같이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내가 관심을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하고, 또 스가 아쓰코처럼 유학생활도 하고 그러는 게 아닐까. 내가 그럴 수 없다면, 작가 같은 선배님이 쓴 글이 이렇게 반가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폴리의 좁은 골목 정중앙에 떡하니 의자를 내놓고, 사설통행세를 걷던 동네 아줌마의 패기가 부럽기도 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이중주차를 한 어느 차주 때문에(전화를 네 번이나 했으나 받지 않았다) 결국 관리사무소까지 가서 인터폰으로 방송해서 겨우 풀려날 수가 있었는데, 푼돈을 아줌마에게 쥐어주고 골목을 지나가야 했던 트럭 운전사 아저씨 같은 그런 기분이었을까.

 

아무래도 저자가 지식인 계급이다 보니, 보통의 여행자들과 달리 이탈리아 지식인들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 중 동맹국이었던 나라 출신 여성은 환대받지 않았을까. 전쟁 중에 실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마리아 보토니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마 마리아 보토니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작고한 부군 페피노를 만날 일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가 아쓰코의 문학적 오딧세이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단 말인가.

 

우리들의 인연들은 그렇게 한 순간의 인연에서 출발해서 영원으로 갈 수도, 또 그렇지 않고 단발성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엽서라는 통신수단으로 마리아 보토니와의 갸날픈 인연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장면이 신기했다. 그리고 보니 지난 천년에 체코 여행 중에 나에게 엽서를 보내준 사찌에 나카무라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시절 참 재밌는 친구였는데 말이지. 자신의 나라에서 잘 살고 있겠지 싶다.

 

평범한 보통 사람인 줄 알았던 마리아 보토니가 알고 보니 레지스탕스 영웅이었다. 직장 상사의 부탁으로 빨치산 대장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독일 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실제 영웅이 바로 마리아 보토니였다. 아니 이 정도는 되어야, 글감으로 써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둘러 봐도, 내 주위에는 그런 영웅 레벨에 올라갈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책의 어디선가 등장한 안토니오 타부키의 <인도 야상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어 나도 그 책 가지고 있는데 싶어서 어제 찾아서 첫 몇 페이지를 읽었다. 5년 전에 읽은 책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썼다는 <만초니가 사람들> 그리고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이탈리아 문학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이거 알고 보니 무서운 책이었구만 그래.

 

시인 움베르토 사바가 쓴 시들에 대해, 누군가가 이방인인 스가 아쓰코가 알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는 좀 씁쓸하게 다가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또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시리즈가 마음에 들어서 일단 주말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코르시카 서점의 친구들>도 빌렸다. 바로 읽어야지. <트리에스테의 언덕길>도 어젯밤에 이런저런 쿠폰 때문에 주문했다. 이렇게 알라딘 쿠폰 지옥에 시달리게 될 줄이야.



어제 저녁에 책 읽다 말고 잔뜩 쌓인 쿠폰을 해결하기 위해 주문한

스가 아쓰코 작가의 신간은 바로 오늘 도착했다.

번개배송의 파워.


[덧붙임] 이탈리아 유수의 회사인 올리베티 사에서는 해마다 한 권씩 고전 명작들을 선정해서 멋진 디자인의 양장본을 만들어 배포했었다고 한다. 삽화도 가득 넣어서 말이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부럽더라. 독서 문화가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한국에서도 그런 멋진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재력과 기획력을 갖춘 회사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 선진국이 괜히 문화 선진국이 아니라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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