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화평과 파괴가 그렇게 반복되면서 마침내 도시는 완전히 황폐해져버렸고, 찬양받던 땅의 막대한 부는 사라지고 부석거리는 돌만 남았다. 이제 도시는 지구 전역으로 흩어져간 예루살렘 시민들의 머릿속에서만 아득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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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누군가 초인종을 울렸을 때,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다만 그가 택한 자살의 방식이 너무 놀라울 뿐이었는데, 잠시 뒤 생각해보니 파울에겐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었어요. 기차는 그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요. 기차의 종착역은 항상 죽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S시에 있던 그의 집을 둘러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처럼, 그가 운행 예정표, 운행시간 책자, 철도의 전반적인 운영방식,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떤 강박적인 관심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어요. 비어 있던 북쪽 방의 책상 위에 만들어놓은 모형철도가 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것은 파울이 겪어야 했던 독일의 불행을 상징하고 있었어요.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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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모름지기 자극이다.

그레이스님의 리뷰를 보고 나서, 11년 전에 사서 4년 전에 읽은 <이민자들>을 서가에서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태사부 장삼봉 앞에서 태극권을 전수 받는 장무기의 그것 같다고나 할까.

 

책은 11년 전, 파주 북소리 잔치에서 샀다.

그전에 <토성의 고리>를 먼저 만났는데, 창비 출판사 앞 매대에서 <이민자들>을 만났다.

창비 직원분은 나에게 <토성의 고리>도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웃으며 이미 그 책은 읽었답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읽는다.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역시 책은 다시 읽는 것이다.



그랬다. 그의 이야기는 고백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그리우냐고 묻자, 그는 어릴 적에 리투아니아의 그로드노 근처 마을에 살다가 일곱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그곳을 떠나 이민길에 나섰다고 대답했다. 1899년 늦가을, 그의 부모님, 여동생 기타와 라야, 그리고 삼촌 샤니 펠트헨틀러와 함께 아론 박트라는 마차꾼이 끄는 작은 마차를 타고 그로드노로 갔다고 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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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의 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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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스러운 마리오 바르가스의 <켈트의 꿈>의 출간을 애타게 기다린지 12년이 되었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아서 곧 출간되리라는 나의 기대는 그렇게 12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무려 70일이나 걸려서 이 책을 다 읽는데 성공했다. 2022년 광복절이었다.

 

놀라운 건, 요사 샘이 이 책 이후로도 세 권의 장편소설을 더 발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책들이 언제 또 우리를 찾아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참 요사 샘의 열혈 팬으로 절판된 책들까지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열정이, 그리고 작가에 대한 사랑이 식은 모양이다.

 

페루 출신의 대가가 역사의 무대에 새롭게 단장해서 올려 놓은 인물은 대영제국 외교관 출신으로, 콩고와 페루의 악랄한 고무 채취 현장을 서구 사회에 고발한 로저 케이스먼트다. 그리고 원래 북아일랜드 얼스터 프로테스탄트 가정 출신의 이 문제적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명예와 부를 마다하고, 조국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당시 대영제국의 적국이었던 독일과 손을 잡고 무장봉기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 문제적 인간 로저 케이스먼트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몇 줄로 단순하게 요약될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요사 샘은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아니 이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마당에, 이 노작가가 도전하지 못할 문학의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가.

 

일단 요사 샘은 콩고에서 이십년을 보낸 시절과 아마존 푸투마요에서의 시절들 그리고 펜턴빌 교도소에 갇힌 로저 케이스먼트의 삶을 교차로 추적한다.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로저의 과거 행적은 대단했다. 우선 그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던 콩고자유국(당시 콩고에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청년은 모험심에 불탔던 것으로 보인다. 정식 교육도 받지 않고, 콩고로 건너간 걸 보면 말이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이야기겠지만, 지난 세기 초만 하더라도 정식 외무시험 대신 현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을 외교 공무원으로 채용했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자동차의 출현과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천연고무는 당시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벨기에 식민지배자들은 콩고 원주민들에게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서 고무의 채취를 독려했다. 납치와 감금, 폭행은 기본이었고 신체훼손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무 채취는 현지 원주민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산업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열대 밀림의 무더위와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을 견디며 고무 채취를 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니 당연히 무진장한 원주민 노동력을 동원해서 식민지배자들은 고무 채취에 나섰다. 당연히 벨기에 국왕의 사유지였기에 국가 권력이 그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잔혹행위를 제어할 방법도 그리고 제재할 생각도 식민지배자들에게는 없었다.

 

이런 현지에서의 참담한 현실을 전해들은 영국 정부에서는 로저 케이스먼트를 현지에 파견해서 현실 조사에 나서게 됐다. 대영제국도 방식만 달랐지 전 세계에서 식민지배의 원형에 제공한 선진 국가가 아니었나? 자신들이 개발한 야만적 노예제도와 각종 잔학행위를 도입한 후발 식민지배국가들을 정죄하겠다는 그들의 이중적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로저 케이스먼트의 눈부신 활약으로 <블루 북>이라는 서방에 공개가 되었고, 레오폴드 2세와 그 일당들의 야만적 착취 행위가 널리 알려지면서 콩고는 국왕의 사유지에서 벨기에의 공식 식민지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행위와 착취가 종식된 건 아니었다.

 

아마 그 무렵이었던가, 훗날 <블랙 다이어리>라는 이름으로 로저 케이스먼트의 발목을 잡게 되는 그의 동성애적 취향이 조금씩 들어나기 시작했다. 로저에게는 콩고보다 심한 고난의 행군이었던 페루 아마존 컴퍼니의 비리를 파헤친 푸투마요 프로젝트 과정에서 더 심각해지게 된, 동성애는 반역죄로 펜턴빌에 갇히게 된 그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아무리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을 해도, <블랙 다이어리> 폭로로 돌아선 여론을 뒤집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항상 칼날 위의 삶을 살았던 로저는 보다 더 자신의 처신에 조심했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 무대는 아마존 푸투마요였다. 콩고에서처럼 푸투마요 각지에서도 고무는 원주민들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의 산물이었다. 훌리오 C. 아라나라는 작가가 운영하는 페루 아마존 컴퍼니(PAC) 소속의 빌런들은 콩고의 그것을 능가하는 만행으로 푸투마요 원주민들을 착취했다. 그들이 식인종이라는 이유로 문명 세계의 교화를 내세우며, 아마존 정글에 침투한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원주민들을 구타하고 납치해서 고무 할당량을 채우도록 강요했다. 그들에게 원주민 살해는 하나의 오락일 따름이었다.

 

아니 문명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식의 만행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훗날, 로저 케이스먼트의 보고서가 공개되었을 때 서구 사회에서 교육받은 아라나 패거리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페루 아마존 컴퍼니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여론전을 호도하기도 했다.

 

짧지만 강렬한 아마존에서의 활동은 로저 케이스먼트에게 그가 예상하지 못한 대가를 지불해 주었다. 대영제국은 콩고와 푸투마요에서의 그의 활약에 작위와 훈장을 수여했다. 아마존 이키토스에서 사법과 행정 그야말로 전권을 장악한 페루 아마존 컴퍼니의 거대한 마수와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결과에 대한 보답은 로저 경의 기대치를 상회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로저 경의 마지막 투쟁지였던 아일랜드에서 작위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푸투마요에서 돌아온 로저 경은 수세기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조국 아일랜드가 콩고나 푸투마요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단의 과격한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집단과 교류하면서 무장투쟁만이 아일랜드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다수의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역사는 소수의 자각한 리더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완전 틀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1차 세계대전에서 적국 독일의 무기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룰 수도 있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한 로저 케이스먼트는 활동가답게 바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시키는데 전념한다. 그전에 대영제국의 외교관직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은퇴한 로저 경은 어느 순간부터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로 변신해서 다양한 방식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아일랜드 사람들의 자금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사람이 살면서 모든 일에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겠지만, 말년의 로저 케이스먼트가 내린 결정은 불운하게도 패착의 연속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일련의 과정들이었다. 베를린에서 영국과 전쟁 중이던 독일로부터 5만정 소총과 막대한 탄약 지원 그리고 영국 본토 공격이라는 허황된 약속을 받아 내기 위해 그는 전력을 다했다. 포로가 된 영국 병사들 중에서 아일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아일랜드 여단을 구성해서 독립군으로 이용하겠다는 계획도 병사들의 소극적 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밀림에서 얻은 병과 고질적인 관절염 그리고 불안정한 정신 상태까지 모든 게 최악인 상태에서 19164월 아일랜드 현지에서 계획 중인 부활절 봉기에 참가하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잠수함을 타고 상륙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펜턴빌 교도소에서 로저 케이스먼트가 보낸 마지막 날들은 과거에 대한 회한과 가톨릭 교회로의 귀의가 다루어진다. 그를 담당한 교도관 미스터 스테이시는 처음에는 그를 반역자로 취급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전혀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모습이 어찌나 처연했는지 모른다. 아마, 페루 아마존 컴퍼니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킨 푸투마요 원주민들의 모습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결과는 뻔했지만, 이대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죽을 수 없다는 마지막 절규 말이다.

 

확실히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마지막 유럽 세 대륙에서 기존의 식민지배자들을 상대로 투쟁에 나선 로저 케이스먼트는 문제적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 책상머리에서 일을 기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현장에 뛰어 들어 자신의 눈으로 정확하게 문제를 기록하고, 자신의 기록을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현장형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마지막까지 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가 추구한 방법이나 노선에 있어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다는 점을 세상에 알린 것 하나만으로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로저 케이스먼트 신원은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영국 정부가 그렇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던 <블랙 다이어리>에 대해서도 모두가 날조라던가 아니면 로저 케이스먼트의 진짜 기록이라는 주장도 상대성을 지니지 않나 싶다. 요사 샘 역시, 일정 부분은 로저가 직접 기록한 것이고 나머지는 판타지가 아닐까라고 타협점을 설정해준다. 전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래도 작가의 생각을 따르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점이 역사 소설의 한계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700쪽이나 되는 책을 다 읽고 났더니 진이 빠지는 그런 느낌이다. 시간이 갈수록 긴 호흡의 책들을 읽는데 힘이 든다. 물론 아주 재밌는 책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사실 그런 책들은 아주 드물다. 어쨌든 12년이 걸린 숙제를 다해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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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16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에게는 요사샘 책이라서보다는 로저 케이스먼트하는 인물과 당시 콩고와 아프리카의 상황때문에 더 관심이 가네요.

레삭매냐 2022-08-16 09:57   좋아요 1 | URL
그러시군요.

19세기 초 콩고의 상황이 궁금
하시다면, 아담 호크쉴드의
<레오폴드왕의 유령>을 추천해
드립니다.

단, 절판되었다는 게 문제네요 ㅠ

coolcat329 2022-08-16 0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읽으셨군요. 12년의 기다림, 70일의 독서, 광복절에 완독 성공! 축하드립니다! 👍
저는 이 책 골드문트님 리뷰만으로도 벅차 안 읽기로 했거든요. ㅋ
요사님이 아직 살아계신가요?
이 분 참 잘생기시고 무엇보다 저랑 생일이 하루 차이라 유치하지만 정이 가는데요. ㅎ
저도 조만간 요사님의 재밌는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8-16 10:04   좋아요 2 | URL
아마 요사 샘이 아니었더라면
미완의 책으로 남게 되지 않았
을까 싶습니다.

요사 샘은 올해 87세로 건재하
십니다. 어디선가 무언가를 여
전히 쓰고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인물 좋으시죠. 페루의 MB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ㅋㅋㅋ

새파랑 2022-08-17 0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년을 기다린 요사스러운 책이네요 ㅋ 레삭매냐님이 극찬한 이유가 있는거 같습니다~!! 아직 요사를 읽어보진 않았는데 저도 시간되면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8-17 09:50   좋아요 2 | URL
다시 돌아봐도 이건 거의
소설이라기 보다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논문 수준이
아닌가 싶더라구요.

작가의 역량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레이스 2022-08-17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년 기다림, 70일동안 독서, 식민지 독립투쟁...진이 빠지는 느낌 알것 같습니다.
그런데 좋을 것 같은...!
켈트는 유럽을 의미하는 거겠죠?

레삭매냐 2022-08-17 09:51   좋아요 2 | URL
로저 케이스먼트가 북아일랜드
얼스터 출신이라고 하더라구요.

여기서 켈트는 로저의 조국인
아일랜드=에이레를 상징한다고
하네요.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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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최고의 희곡으로 꼽힌다는 아서 밀러 작가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어디서 구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첫 번째 문동 파티에서 교환하지 않았나 싶다. 참 오래 전에 일이다. 그리고 책은 이제야 읽게 되었다. 어제 설터의 못다 읽은 책들을 찾다가 우연히 만났다.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 역사의 깊지 않은 미국인들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필두로해서 자신들만의 문학적 성과를 발굴하는데 진심이라는 생각이다.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도 비슷하게 발굴된 그들만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때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다. 주인공은 올해로 와그너 상사에서만 무려 36년을 일했다는 전문 세일즈맨 윌리 로먼.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예전의 인맥 세일즈에 집중하는 그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아니 윌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계속해서 좋았던 과거에 의존하는 그런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일매일 필요한 경비에 신경써야 하는 윌리와 린다 부부에게는 비프와 해피라는 두 아들이 있다. 삼십 줄에 들어선 이 아들들에게 거는 윌리는 기대는 대단하다. 문제는 이들의 능력이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비프는 고등학교 시절 잘 나가는 풋볼스타였다. 하지만, 졸업하는 해에 수학 과목에서 낙제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버지니아 대학 입학허가서를 받아 두고서도, 수학 과목을 망치는 바람에 인생이 꼬여 버렸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그런 아들을 다독여서 계절학기 수업을 듣게 해서라도 위기탈출을 하게 해주었어야 했는데, 그 해 여름에는 참 일도 많았던 것이 나중에 밝혀지게 된다. 반면, 윌리의 친구 찰리네 아들 버나드는 학업에 충실해서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었다. 어쩌면 현재 버나드의 모습은 윌 리가 그렇게 바라던 아들 비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윌리가 여전히 자기 아들 비프와 해피의 실체를 모르고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자들간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야말로 삶은 고구마 백 개 정도는 생으로 꾸역꾸역 먹은 그런 느낌이다. 나이를 그 정도 먹었으면, 정신을 차릴 법도 한데 특히 비프는 한 자리에 지긋하게 앉아서 버틸 재간이 없다고 고백한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상사들의 명령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이 이 지경이라면, 정말 특단의 수를 내서 서부에 가서 목장을 경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너튜브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에 대한 콘텐츠를 검색해 보니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다.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더라도, 판타지랜드 미국에서는 자신이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그야말로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신화가 아메리카에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어떤 대통령은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허황된 이야기로 사람들의 지각을 마비시키기도 했었지.

 

부자=성공이라는 등식이 성공 게임에 내몰린 모두에게 허용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호된 학습을 통해 거의 강제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예전에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 조롱에 가까운 표현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강남에 아파트 정도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며, 사회문화적 자본으로는 명문대 졸업장 정도는 기본 스펙이 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돈 많은 부모의 상속분까지 가지고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이런 어떤 조건도 우리의 주인공 윌리 로먼에게는 해당되는 게 없다는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로 코너에 몰린 윌리는 생각해서는 안될 일을 실행할 꿈을 꾸게 된다. 심지어 윌리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오래 전에 죽은 형 벤이 수시로 등장해서 인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동생을 자극하니 말이다.

 

내가 이 희곡에서 가장 답답했던 장면은, 윌리의 친구 찰리가 윌리에게 주급 50달러 짜리 일자리를 제의하는데도 자신은 잘 나가는 세일즈맨이라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36년간 복무한 와그너 상사에서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해고된 마당에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단 말인가? 사고를 가장한 자살 보험사기로 남은 가족들에게 20,000달러를 남기고 떠나겠다는 윌리의 플랜 앞에 모든 건 무의미해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작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나중에 비프가 지적하듯이 진실의 부재였다. 비프와 해피의 능력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도 그 진실을 받아들이길 로먼 패밀리의 가장 윌리는 거부했다. 자신의 외도가 아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은폐로 무마해 버렸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숱한 기회가 있었지만, 당장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해 버리는 방식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너튜브의 바다에서 요즘 잘 나가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비프도 찾아보았고, 1985년작 영화에서는 젊은 날의 존 말코비치가 비프 역으로 등장하는 장면도 찾아볼 수가 있었다. 영상의 화질 때문에 최근 영화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확실히 배우들의 연기 수준은 올디스가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

 

기회가 된다면 연극으로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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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8-15 09: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저도 몇 해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제껏 연극 보면서 재밌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이 작품은 언젠가 저도 연극으로 접하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었어요.

레삭매냐 2022-08-15 11:00   좋아요 2 | URL
저는 <세일즈맨의 죽음>과
<거미여인의 키스>를 연극으로
보고 싶더라구요.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그레이스 2022-08-15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극 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2-08-15 11:01   좋아요 3 | URL
예전에는 종종 연극도 보러
가고 그랬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영화 연극 본
지가 백만년은 되는 것 같습
니다.

mini74 2022-08-15 1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실의 부재란 말 와닿습니다. 티모시 살라메의 비프라니 ~상상이 잘 안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2-08-15 11:02   좋아요 3 | URL
오늘 궁금해서 샬라메 인스타에
들어가 보니 다음 세대의 리더라는
타이틀로 타임 지 표지를 장식했네요.

할리우드 기대주인가 봅니다, 과연.

진실을 거부한 대가가 결국 현재의
비참한 삶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
니다.

새파랑 2022-08-15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극은 거의 안보지만 이 작품은 연극으로 보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시대나 지금이나 돈이 항상 문제인거 같아요 🤔

레삭매냐 2022-08-15 11:34   좋아요 2 | URL
1929년 대공황 이래,
마냥 성장할 것만 같았던 미국
경제는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렸죠.

그후, 자본주의가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정확하게
타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문제지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coolcat329 2022-08-1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라는 누군가의 대사가 기억납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꿈과 허상만 좇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소시민의 모습이 참 슬픈 희곡이었어요.

레삭매냐 2022-08-16 19:17   좋아요 1 | URL
오옷 저도 책 읽으면서 해당 대사
를 적어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역쉬!!!

세상이 휙휙 바뀌는데 여전히 인맥
세일즈를 하겠다던 윌리의 착각이
패착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구요...

그의 장례식에 아무도 찾아 오지
않은 장면이 저는 참 그렇더라구요.

찰리 : ...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17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