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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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발표된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작가의 세 번째 소설 <마더 나이트>(1961)를 읽으면서 커트 보네거트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그 유명한 벌지전투(1944년 12월 22일)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작센 지방의 드레스덴 남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5월, 보네거트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비보를 전해 듣기도 했다.

 

아마 작가의 본능과도 같은 경험으로 자신의 드레스덴에서의 체험이 창작의 소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 거의 20년간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보다도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드레스덴 공습을 글로 표현해 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도 정신분열증적인 소설이라는 말을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제5도살장>의 구성은 참으로 독특하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재구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빌리 필그림이라는 얼치기 사병을 내세워서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투영시킨다. 전혀 전쟁과는 맞지 않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나 들어맞을 인물이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아수라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빌리 필그림은 내노라할만한 집안 출신의 발렌시아와 결혼하고, 검안사가 되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구조라면 얼마나 좋겠으련만, 보네거트는 SF 작품을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과 트랄팔마도어라는 외계행성에 납치된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을 뒤죽박죽으로 솜씨 좋게 버무리기 시작한다. 하긴 전쟁이라는 광기를 단순하게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기분열적 망상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을 세상에서는 구제불능의 미치광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아내 발렌시아는 비행기 사고가 난 자신을 보러 오는 도중에 일산화탄소로 사망하고, 시집간 딸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트랄팔마도어 타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빌리 필그림을 이해할만한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리라.

 

블랙유머의 대가답게, 빌리 필그림을 따라가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시선은 건조하고 냉랭하기만 하다. 특히 전장에 투입된 병사처럼 보이는 않고, 전쟁을 희화화하는 것 같은 빌리 필그림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포로수용소의 연극무대에서 신데렐라가 신었던 은색 장화를 신고, 여자들이 하는 외토시에 커튼을 로마시대 토가처럼 두른 어릿광대 빌리 필그림의 모습은 “웃기지도 않는 전쟁”에 대한 보네거트의 조롱 섞인 저격으로 다가온다. <제5도살장> 읽기는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처럼, 경이로운 순간들을 한 순간에 보는 그런 경험이었다. “반전(反戰)”이라는 빤한 주제를 과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예상을 단박에 부숴버리는 작가의 어마무시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전쟁이라는 현실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내고 있었다.

 

전작 <마더 나이트>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카메오 등장 또한 주목할만하다. 전쟁포로로 도급노동을 위해 드레스덴의 시럽공장에 끌려와 있던 빌리 필그림은 나치의 선전요원으로 포로들의 생활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다는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개발해낸 캐릭터를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을 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국의 소설가, SF작가, 에세이스트, 풍자가, 불가지론자, 유니테리언, 포스트모더니스트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 세계에 너무 늦게 발을 들여 놓게 돼서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그의 작법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거나 절판 혹은 품절의 운명에 처한 그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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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동 피아노》, 《챔피온들의 저녁식사》가 재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헌책방에 구하기 힘들고, 도서관에도 없습니다. 도서관에 있어봤자 보존서고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죠.

레삭매냐 2016-12-29 13:33   좋아요 0 | URL
아마 문동이 커트 보네거트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씀하신 대로 다른 책들도
속히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패권 쟁탈의 한국사 - 한민족의 역사를 움직인 여섯 가지 쟁점들
김종성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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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역사학도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랑케 실증사학이 아니면 다른 역사적 접근방식은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정도에서 벗어난 해석은 받아 들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학문적 방식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전공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역사서적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유산과 사유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번에 읽은 김종성 작가의 <패권 쟁탈의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서두에서 작가는 이 책을 이해하는 기본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기후 변화와 무역로 그리고 사상 혁신이다. 정치사가 예전 역사학계의 주된 연구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미시적인 접근 차원에서 다양한 방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중에서 지구의 기후 변화가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꽤나 흥미롭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물자와 사람 그리고 정보의 교류는 초원길에서 시작되어,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중국의 세계의 중심이 되는 혁신적인 기회였던 비단길의 개발 그리고 19세기 이해 바닷길을 이용한 해양세력 세계적 패권을 쥐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초원길이 융성하던 상고사 혹은 고대사 시절에 고조선이 중국에 비해 월등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랑케 실증사학 때문인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과연 그것이 모두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을 띠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에 빙하기가 오면서 북방의 흉노족이 생존을 위해 농경민족이 주를 이루던 중원 지방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2류였던 중국의 한족(漢族)이 춘추전국시대에 발생한 사상 혁신을 통해 통일제국을 완성하면서 비로소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원이 통일이 되면, 이웃한 한민족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오호십륙국 시대나 10세기 오대십국 같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중원 공략에 나설 정도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가설은 공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추세에 맞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서진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다음 군주였던 장수태왕은 안정세에 접어든 남북조시대에 맞춰 남진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중원경영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분열과 통일의 순환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원에 통일제국이 들어서는 것이 반가운 현상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원의 제국정부가 외세에 시달릴수록 우리에게는 유리하다는 걸까?

 

이웃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는 한반도 남동부의 신라는 가야연맹을 병합하고, 신선교에 불교 세계관을 도입한 사상 혁신을 이루면서 자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기에 중원의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고 작가는 <패권 쟁탈의 한국사>에서 분석해냈다. 그 점 역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2류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보수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극적인 방식이 필요한데, 2류국가 신라의 비주류였던 김춘추는 가야 출신 김유신과 의기투합해서 반쪽짜리 통일이긴 했지만, 통일에 성공했다. 이후 대동강 이북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발해가 세워지면서 다시 한반도는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다. 한 때 강성한 영역을 자랑하던 발해는 서쪽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 같은 민족인 남방의 신라와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다수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거란족에게 멸망당한다.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송나라가 통일하고, 동북 국경의 만주지방을 거란족의 요나라가 지배하게 되면서 동아시아는 다시 한 번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당시 한반도의 자리잡은 고려가 동아시아 질서유지의 균형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요나라의 배후에 고려가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가 중원의 지배자였던 송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족의 요나라는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세 차례나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거란족의 뒤를 이은 여진족의 나라 금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금나라는 요나라처럼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강의변으로 북송을 멸망시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금나라는 어쩌면 중원경영에 뜻이 없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다시 불어온 지구 빙하기 시대에 몽골 초원의 원나라의 침공에 금나라는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수십 년간 몽골족의 침공에 저항한 고려 무신정권을 저자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데, 아무런 정당성 없이 무단통치를 해온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전화를 직접 감당해야 하는 백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몽골의 속국이 되어 버린 고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는가 싶었지만, 공민왕이 키운 신진사대부에 의해 멸망을 재촉하게 되기도 했다. 이성계로 대표되는 군부와 결탁한 신진사대부의 대표주자 정도전은 신라에 이은 두 번째 사상 혁신으로 조선 개국에 성공하지만, 이방원과의 사활을 건 권력투쟁에 패배하면서 그가 품었던 웅대한 아이디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개국 이래 200년간의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 역시 이웃 해양세력이었던 일본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백여 년간의 전국시대라는 대혼란기를 통일하고, 일찍이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전수 받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대마도주를 포섭하고 정명가도라는 허황된 구호를 앞세워 대륙진출이라는 미명 아래 대대적인 조선침략에 나선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여진 전선에 전력을 다하던 조선군은 기병 위주로 전략을 구사하다, 장비와 훈련에서 앞선 일본 보병과의 전투에서 족족 패전을 기록했다. 근왕군이라는 이름으로 호국을 위해 일어선 의병과 해상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이미 조선은 이전의 조선과는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흐트러진 신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선후기에 예학과 보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세계 최악의 신분제 국가의 탄생은 그런 연유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을까.

 

수세기 동안 유지되던 비단길 패권은 역시 세계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서유럽의 모험가들에 의해 바닷길이 개발되면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에 넘어가게 되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서유럽 유력층들이 선호하던 금값과 같은 값으로 거래되던 후추를 찾아 나선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동남아 후추 산지를 찾았고(아울러 흑인 노예 노동력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아메리카에서 착취한 은광으로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산업혁명으로 확고부동한 세계적 패권을 장악했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은 서구제국을 이용하겠다는 판단착오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그의 선택은 나당연합군의 침공 앞에서 장기전을 도모하는 대신, 건곤일척의 승부로 국가와 왕조의 안위를 보존하겠다는 도박 같은 전략으로 패망했던 백제 의자왕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패권 쟁탈의 한국사>는 참신하면서도 기존의 역사관과는 다른 접근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주관적인 주장이 너무 강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치밀한 고증을 통한 검증을 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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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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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반빌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다>에 앞서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먼저 읽었다. 천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절, 지동설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제의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소설은 인간 코페르니쿠스의 내면세계에 방점을 찍고 있어서 조금 당황했다. 이게 과연 존 반빌 작가의 스타일인가. 사실 작년에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거창한 리뷰를 쓰겠노라고 작정했지만 리뷰는 아직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존 반빌의 그 유명한 부커상 수상작인 <바다>를 읽기 시작했다.

 

참 오래 걸린 독서였다.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위키피디아와 타 블로그의 도움을 받아 처음 읽었던 98쪽의 이미지들을 되살려냈다. 그러자 어렴풋이 떠돌던 기억의 잔재 속에서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 미술사가 맥스 모든이 기억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소설 <바다>는 세 가지 층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주인공 닥터 맥스가 11살이던 시절 아일랜드 바닷가의 여름휴양지에서 선망하던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보낸 추억들, 다른 하나는 아내 애나가 시한부선고를 받고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시절에 대한 기억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회상해내고 글로 적어 내려가는 현재의 이야기. 원서로는 200쪽도 안되는 짧은 분량의 책이 생각처럼 쉽게 소화해낼 수가 없었다.

 

<닥터 코페르니쿠스>에서도 그랬지만 존 반빌은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잡아낸 단초들을 바탕으로 문장을 재단하고, 단정하게 정리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당시의 감정들을 생생하게 담뿍 담아낸다. 내가 만약에 글을 쓴다면 존 반빌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상상에 도달하자 피식하고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수십 년간 대가가 쌓아온 내공을 욕심내다니. 문득 이 소설에서 내가 중점을 두고 있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닥터 맥스가 들려주는 정확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기억의 내러티브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변화무쌍한 심리상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 맥스의 코니 그레이스에 대한 찰나적 사랑, 그녀의 딸인 클로이로 급속하게 옮겨간 배신적 사랑? 그것도 아니라면 죽은 아내 애나에 대한 애도? 외동딸 클레어와의 끊이지 않는 불화? 닥터 맥스가 논문을 쓴다는 피에르 보나르에 대한 아카데믹한 열정? 존 반빌의 글은 거친 물길을 유연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이렇게 숱한 이야기 사이를 넘나든다. 그의 문장에서 빛나는 찰나 같은 아름다움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쉬 빠져 나가 버리는 모래 같다. 오래전 아마 난 그 아름다움에 미혹당했으면서도 동시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에 책읽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구사하는 문학적 난해함 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의 전반주에 해당하는 1부가 피상적인 접근이라면, 2부에서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국 우리 독자는 클로이와 마일스 쌍둥이 남매가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다툼 끝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어려서부터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무언가 되고 싶어하던 맥스 모든이 런던의 어느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부유층 출신의 애나와 가정을 꾸려 원하던 계급적 상승을 이루는 일련의 과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내의 죽음보다 수십년 전 한 여름을 같이 보냈던 쌍둥이들의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미술사가의 고뇌에 찬 이야기는 어차피 우리 인간은 숙명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는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현재 삶의 좌표를 수정하려는 사고 자체를 부정한다. 만약에 쌍둥이들이 그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았더라면 닥터 맥스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만약에 딜레당트한 딸 클레어가 좀 더 격에 어울리는 남자를 만났더라면? 아내 애나의 암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었다면? 이 모든 가정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무의미한 공상일 따름이다. 존 반빌은 겨울 바닷가의 풍경을 관조하는 것처럼 고달프거나 괴롭기 짝이 없더라도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맥스 모든은 스스로를 늙은 원숭이라 자조하며 로즈 바버수어 양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시더스로 돌아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는 아내가 죽은 현재와 그레이스 가족과 보내던 뜨거웠던 여름의 과거 그리고 아내가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의 과거를 반복해서 넘나든다. 가까스로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죽음이었노라고 닥터 맥스는 온몸으로 증명에 나선다. 결국 바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바다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책을 어렵게 다 읽고 나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광휘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발굴해 내기 위해 혹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나. 모르겠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처럼 문학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마음에 사유의 파도를 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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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는 곳간, 서울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동서남북 우리 땅 4
황선미 지음, 이준선 그림 / 조선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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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서울에서 살아본 건 딱 2년 남짓한 군생활이 전부였다. 그것도 경복궁과 백악산에서. 외국친구들을 만나 조선왕조의 정전이었던 경복궁에서 살았다고 하면, 그럼 니가 프린스냐라는 우스갯소리도 많이 들었었다. 우리에게는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황선미 작가의 <어울리는 곳간 서울>은 바로 그런 나의 추억이 어린 공간, 서울을 그리고 있다.

 

아직도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서울 북촌 마을에서 게스트하우스와 공방을 겸하는 명인당 집 딸 미래의 눈을 통해 본 21세기 서울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한 서사를 담고 있다. 능라장의 후예답게 각종 장신구들을 만드는 실력을 가진 어머니와 매일 여는 포목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미래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서울의 옛 모습들을 상징하는 대표선수 같다고나 할까. 서울이나 도쿄 그리고 뉴욕 같은 대도시들을 가볼 때마다 메트로폴리스가 가진 그런 특징 없는 모습에 실망하곤 했는데, 미래가 들려주는 서울의 숨겨진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에 가장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관광명소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와서 관광객을 위해 파리의 에펠탑이나 뉴욕의 록펠러 센터 같은 랜드마크들을 만드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다.

 

콘크리트 정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자연미가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는 서울에서 곳곳에 숨겨진 텃밭으로 농사를 지러 가는 미래와 친구들의 이야기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보니 일전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도심농부를 컨셉으로 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았던가. 관심을 가지고 보진 않아 잘 모르겠지만,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굳이 스티븐 호킹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하찮게 보이는 꿀벌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당장 인류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이 다시 한 번 환경보존이라는 과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준다. 서울도심에서 양봉한 꿀로 만든 과자나 빵이라는 제품홍보가 엮인 상품이라면 소비자들이 더 호응을 하지 않을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제품 하나에도 스토리가 있는 그런 제품들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미래네 게스트하우스에 묻게 된 미국 친구 조셉의 할아버지와 미래네 할아버지의 인연을 한국전쟁이라는 과정으로 엮는 과정은 좀 무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전쟁 베테랑이 손자에게 이제는 말라 버린 우물이 있는 집을 찾아 전쟁터에서 무훈으로 받은 훈장을 전해 달라는 설정 말이다. 맥아더가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궁전들을 전쟁 중에 지키는데 한몫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는 그가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한반도를 핵전장의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 앞에서 그 빛을 발해 버리지 않았던가. 한용운이나 윤동주 같은 독립운동가와 친일문학가인 노천명, 이광수를 같은 반열에 올리는 구성도 그랬고. 하긴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이 이 정도에서 그만 두자.

 

<어울리는 곳간 서울>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전개는 괜찮았다. 이준선 씨가 맡은 일러스트도 과하지 않고 도시의 특색을 잘 잡아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스토리가 배어 있는 공간이야말로 세계인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새겨들을 만했다. 좀 아쉬운 점들도 있었지만, 모름지기 세상사가 “칼레파 타 칼라”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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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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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나 걸려서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집 <예술과 중력가속도>를 다 읽었다. 사실 마음 먹고 읽었다면 사나흘이면 다 읽었을 책을 도중에 이책저책 잡독을 하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바람에 좀 늦어졌다. 모두 10개로 이루어진 이야기 중에 초반이 좀 지루했다. 어느 순간, 독서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재미가 느껴졌고 단박에 읽을 수가 있었다.

 

작가의 전작들에도 SF 장르적인 담론들이 배어 있긴 했지만, 데뷔 11년차 작가답게 이제 연륜이 쌓일 걸까? 이야기 속에 밴 SF 코드들이 칼집을 잘 낸 생선살에 양념이 배듯 그렇게 부드럽게 재어져서 감칠맛이 났다. 그리고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소설집에서 대표선수를 꼽자면 아마 고래와 초원이 아닐까. 아, 작품 중에도 작가가 설명하듯 여주로 “은경”이라는 이름을 즐겨 쓰는 것도 배명훈 작가의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지 싶다.

 

조개를 읽는 사내의 이야기는 인류보다 더 오래된 조개의 대화라는 기묘한 설정을 앞세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구글에서 본 인도 출신 과학자 찬드라 보스가 주장한 식물도 자신을 키워주던 사람과 감정을 교류한다는 동비증 이야기가 연상됐다. 식물은 물론이고 금속도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하니 놀랍다. 수학 과외를 해주던 누나가 주고 떠난 조개가 물경 700억이나 된다는 물신주의에 접신한 생각이 둘 사이의 애련한 감정에 우선하는 걸 보니 독자가 분명 속물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

 

핵전쟁으로 인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돌아갈 모국이 사라져 버린 것이 분명한 핵잠수함에 탑승한 화자가 신성한 푸른고래 “흰수염”을 범고래의 잔혹한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혹등고래 무리의 노래에 빗대어 전개하는 이야기도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핵탄두가 자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서로 파멸에 이르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승무원들을 이끌어야할 함장의 자살이라는 형태의 절망으로 현실화된다. 바로 위쪽에 있는 북한에서 수차례에 걸친 핵실험으로 핵무기 개발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는 뉴스가 들리는 상황에서 파멸적 핵전쟁에 대한 우화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신성한 우두머리가 결국 최종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예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혹등고래의 이야기부터 믿었던 숨을 쉬지 않는 검은고래(핵잠수함)가 결국 모든 것을 끝내는 종결자라는 설정, 현실계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 탈장르적 소재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어지는 <티켓팅 & 타겟팅> 역시 고래와 관계되었으면서도 오늘날 음악산업을 지배하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해 티켓팅에 전념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 전에 시즌 오픈에 즈음해서 좋아하는 야구팀의 시즌 패키지를 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생각을 나게 만들어주는 체험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수많은 결제창들을 띄워 놓고 계속해서 F5 키를 누르던 기억이 마지막 완료 순간에 소설 속 주인공이 느꼈던 희열과 묘하게 동조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표제작인 <예술과 중력가속도>가 가장 재밌었던 것 같다. 잘 사귀던 여친과 절교를 선언하고 달에서 온 현대무용가의 기묘한 매력에 쏙 빠져 불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 남자 주인공. 사실 현대무용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지만 순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쩌면 좌절에 빠져 버린 그녀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장면이 어찌나 그렇게 애절하던지. 그녀의 부모들도 손사래치는 공연에 참가했다가 거의 심장과 뇌를 쏟아낼 것 같은 그런 체험 끝에 그녀와 결혼에 골인한다. 그 모든 과정을 배명훈 작가는 아주 유머넘치는 그런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SF 장르의 매력과 특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인간 간에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유려하게 소화해내는 실력이 역시 베테랑 작가답구나 싶었다.

 

이 매력적인 소설집을 특징짓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고래라면 다른 하나는 초원이다. 개인적으로 게르와 양떼가 넘실거리는 초원이 어떻게 해서 SF 장르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명훈 작가는 공간적 배경으로 초원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고래가 현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은유적 상징물이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펼쳐진 초원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간적 배경이라는 걸까.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전쟁이 한창 중이던 초원에서 타임머신을 개발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진 천재 소녀 구하기작전의 엔딩에서 보여주는 짜릿한 기시감은 어쩔 것인가. 수십 년 전, 눈 나쁜 여자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양치기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 역시 양떼자리란 매개체를 통해 과거의 인연이 한 개인의 삶에서 소중한가에 대해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다양하면서도 기대 이상을 보여준 소설집이었다. 소설 편식가로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책을 만나 봐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그런 독서 체험이었다. 배명훈 작가의 계속되는 SF 오딧세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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