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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 쟁탈의 한국사 - 한민족의 역사를 움직인 여섯 가지 쟁점들
김종성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11월
평점 :
아주 오래 전에 역사학도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랑케 실증사학이 아니면 다른 역사적 접근방식은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정도에서 벗어난 해석은 받아 들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학문적 방식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전공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역사서적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유산과 사유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번에 읽은 김종성 작가의 <패권 쟁탈의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서두에서 작가는 이 책을 이해하는 기본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기후 변화와 무역로 그리고 사상 혁신이다. 정치사가 예전 역사학계의 주된 연구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미시적인 접근 차원에서 다양한 방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중에서 지구의 기후 변화가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꽤나 흥미롭다.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물자와 사람 그리고 정보의 교류는 초원길에서 시작되어,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중국의 세계의 중심이 되는 혁신적인 기회였던 비단길의 개발 그리고 19세기 이해 바닷길을 이용한 해양세력 세계적 패권을 쥐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초원길이 융성하던 상고사 혹은 고대사 시절에 고조선이 중국에 비해 월등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랑케 실증사학 때문인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과연 그것이 모두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성을 띠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에 빙하기가 오면서 북방의 흉노족이 생존을 위해 농경민족이 주를 이루던 중원 지방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2류였던 중국의 한족(漢族)이 춘추전국시대에 발생한 사상 혁신을 통해 통일제국을 완성하면서 비로소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원이 통일이 되면, 이웃한 한민족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오호십륙국 시대나 10세기 오대십국 같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중원 공략에 나설 정도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가설은 공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추세에 맞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서진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다음 군주였던 장수태왕은 안정세에 접어든 남북조시대에 맞춰 남진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중원경영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분열과 통일의 순환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원에 통일제국이 들어서는 것이 반가운 현상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원의 제국정부가 외세에 시달릴수록 우리에게는 유리하다는 걸까?
이웃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는 한반도 남동부의 신라는 가야연맹을 병합하고, 신선교에 불교 세계관을 도입한 사상 혁신을 이루면서 자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기에 중원의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고 작가는 <패권 쟁탈의 한국사>에서 분석해냈다. 그 점 역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2류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보수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극적인 방식이 필요한데, 2류국가 신라의 비주류였던 김춘추는 가야 출신 김유신과 의기투합해서 반쪽짜리 통일이긴 했지만, 통일에 성공했다. 이후 대동강 이북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발해가 세워지면서 다시 한반도는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다. 한 때 강성한 영역을 자랑하던 발해는 서쪽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 같은 민족인 남방의 신라와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다수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거란족에게 멸망당한다.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송나라가 통일하고, 동북 국경의 만주지방을 거란족의 요나라가 지배하게 되면서 동아시아는 다시 한 번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당시 한반도의 자리잡은 고려가 동아시아 질서유지의 균형추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요나라의 배후에 고려가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가 중원의 지배자였던 송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족의 요나라는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세 차례나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거란족의 뒤를 이은 여진족의 나라 금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금나라는 요나라처럼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강의변으로 북송을 멸망시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금나라는 어쩌면 중원경영에 뜻이 없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다시 불어온 지구 빙하기 시대에 몽골 초원의 원나라의 침공에 금나라는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수십 년간 몽골족의 침공에 저항한 고려 무신정권을 저자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데, 아무런 정당성 없이 무단통치를 해온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지 전화를 직접 감당해야 하는 백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몽골의 속국이 되어 버린 고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는가 싶었지만, 공민왕이 키운 신진사대부에 의해 멸망을 재촉하게 되기도 했다. 이성계로 대표되는 군부와 결탁한 신진사대부의 대표주자 정도전은 신라에 이은 두 번째 사상 혁신으로 조선 개국에 성공하지만, 이방원과의 사활을 건 권력투쟁에 패배하면서 그가 품었던 웅대한 아이디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개국 이래 200년간의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 역시 이웃 해양세력이었던 일본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백여 년간의 전국시대라는 대혼란기를 통일하고, 일찍이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전수 받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대마도주를 포섭하고 정명가도라는 허황된 구호를 앞세워 대륙진출이라는 미명 아래 대대적인 조선침략에 나선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여진 전선에 전력을 다하던 조선군은 기병 위주로 전략을 구사하다, 장비와 훈련에서 앞선 일본 보병과의 전투에서 족족 패전을 기록했다. 근왕군이라는 이름으로 호국을 위해 일어선 의병과 해상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 원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이미 조선은 이전의 조선과는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흐트러진 신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선후기에 예학과 보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세계 최악의 신분제 국가의 탄생은 그런 연유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을까.
수세기 동안 유지되던 비단길 패권은 역시 세계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서유럽의 모험가들에 의해 바닷길이 개발되면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에 넘어가게 되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서유럽 유력층들이 선호하던 금값과 같은 값으로 거래되던 후추를 찾아 나선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동남아 후추 산지를 찾았고(아울러 흑인 노예 노동력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아메리카에서 착취한 은광으로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산업혁명으로 확고부동한 세계적 패권을 장악했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였던 고종은 서구제국을 이용하겠다는 판단착오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그의 선택은 나당연합군의 침공 앞에서 장기전을 도모하는 대신, 건곤일척의 승부로 국가와 왕조의 안위를 보존하겠다는 도박 같은 전략으로 패망했던 백제 의자왕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패권 쟁탈의 한국사>는 참신하면서도 기존의 역사관과는 다른 접근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주관적인 주장이 너무 강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치밀한 고증을 통한 검증을 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