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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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나 걸려서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집 <예술과 중력가속도>를 다 읽었다. 사실 마음 먹고 읽었다면 사나흘이면 다 읽었을 책을 도중에 이책저책 잡독을 하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바람에 좀 늦어졌다. 모두 10개로 이루어진 이야기 중에 초반이 좀 지루했다. 어느 순간, 독서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재미가 느껴졌고 단박에 읽을 수가 있었다.

 

작가의 전작들에도 SF 장르적인 담론들이 배어 있긴 했지만, 데뷔 11년차 작가답게 이제 연륜이 쌓일 걸까? 이야기 속에 밴 SF 코드들이 칼집을 잘 낸 생선살에 양념이 배듯 그렇게 부드럽게 재어져서 감칠맛이 났다. 그리고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소설집에서 대표선수를 꼽자면 아마 고래와 초원이 아닐까. 아, 작품 중에도 작가가 설명하듯 여주로 “은경”이라는 이름을 즐겨 쓰는 것도 배명훈 작가의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지 싶다.

 

조개를 읽는 사내의 이야기는 인류보다 더 오래된 조개의 대화라는 기묘한 설정을 앞세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구글에서 본 인도 출신 과학자 찬드라 보스가 주장한 식물도 자신을 키워주던 사람과 감정을 교류한다는 동비증 이야기가 연상됐다. 식물은 물론이고 금속도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하니 놀랍다. 수학 과외를 해주던 누나가 주고 떠난 조개가 물경 700억이나 된다는 물신주의에 접신한 생각이 둘 사이의 애련한 감정에 우선하는 걸 보니 독자가 분명 속물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

 

핵전쟁으로 인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돌아갈 모국이 사라져 버린 것이 분명한 핵잠수함에 탑승한 화자가 신성한 푸른고래 “흰수염”을 범고래의 잔혹한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혹등고래 무리의 노래에 빗대어 전개하는 이야기도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핵탄두가 자위적인 차원이 아니라, 서로 파멸에 이르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승무원들을 이끌어야할 함장의 자살이라는 형태의 절망으로 현실화된다. 바로 위쪽에 있는 북한에서 수차례에 걸친 핵실험으로 핵무기 개발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는 뉴스가 들리는 상황에서 파멸적 핵전쟁에 대한 우화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신성한 우두머리가 결국 최종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예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혹등고래의 이야기부터 믿었던 숨을 쉬지 않는 검은고래(핵잠수함)가 결국 모든 것을 끝내는 종결자라는 설정, 현실계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 탈장르적 소재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어지는 <티켓팅 & 타겟팅> 역시 고래와 관계되었으면서도 오늘날 음악산업을 지배하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해 티켓팅에 전념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 전에 시즌 오픈에 즈음해서 좋아하는 야구팀의 시즌 패키지를 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생각을 나게 만들어주는 체험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수많은 결제창들을 띄워 놓고 계속해서 F5 키를 누르던 기억이 마지막 완료 순간에 소설 속 주인공이 느꼈던 희열과 묘하게 동조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표제작인 <예술과 중력가속도>가 가장 재밌었던 것 같다. 잘 사귀던 여친과 절교를 선언하고 달에서 온 현대무용가의 기묘한 매력에 쏙 빠져 불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 남자 주인공. 사실 현대무용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지만 순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쩌면 좌절에 빠져 버린 그녀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장면이 어찌나 그렇게 애절하던지. 그녀의 부모들도 손사래치는 공연에 참가했다가 거의 심장과 뇌를 쏟아낼 것 같은 그런 체험 끝에 그녀와 결혼에 골인한다. 그 모든 과정을 배명훈 작가는 아주 유머넘치는 그런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SF 장르의 매력과 특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인간 간에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유려하게 소화해내는 실력이 역시 베테랑 작가답구나 싶었다.

 

이 매력적인 소설집을 특징짓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고래라면 다른 하나는 초원이다. 개인적으로 게르와 양떼가 넘실거리는 초원이 어떻게 해서 SF 장르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명훈 작가는 공간적 배경으로 초원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고래가 현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은유적 상징물이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펼쳐진 초원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간적 배경이라는 걸까.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전쟁이 한창 중이던 초원에서 타임머신을 개발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진 천재 소녀 구하기작전의 엔딩에서 보여주는 짜릿한 기시감은 어쩔 것인가. 수십 년 전, 눈 나쁜 여자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양치기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 역시 양떼자리란 매개체를 통해 과거의 인연이 한 개인의 삶에서 소중한가에 대해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다양하면서도 기대 이상을 보여준 소설집이었다. 소설 편식가로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책을 만나 봐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그런 독서 체험이었다. 배명훈 작가의 계속되는 SF 오딧세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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