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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발표된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작가의 세 번째 소설 <마더 나이트>(1961)를 읽으면서 커트 보네거트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그 유명한 벌지전투(1944년 12월 22일)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작센 지방의 드레스덴 남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5월, 보네거트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비보를 전해 듣기도 했다.
아마 작가의 본능과도 같은 경험으로 자신의 드레스덴에서의 체험이 창작의 소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 거의 20년간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보다도 더 많은 인명피해를 낸 드레스덴 공습을 글로 표현해 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도 정신분열증적인 소설이라는 말을 책의 서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제5도살장>의 구성은 참으로 독특하다. 자전적인 이야기의 재구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빌리 필그림이라는 얼치기 사병을 내세워서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투영시킨다. 전혀 전쟁과는 맞지 않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에나 들어맞을 인물이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아수라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빌리 필그림은 내노라할만한 집안 출신의 발렌시아와 결혼하고, 검안사가 되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구조라면 얼마나 좋겠으련만, 보네거트는 SF 작품을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실과 트랄팔마도어라는 외계행성에 납치된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을 뒤죽박죽으로 솜씨 좋게 버무리기 시작한다. 하긴 전쟁이라는 광기를 단순하게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기분열적 망상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을 세상에서는 구제불능의 미치광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아내 발렌시아는 비행기 사고가 난 자신을 보러 오는 도중에 일산화탄소로 사망하고, 시집간 딸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트랄팔마도어 타령을 하지 않았더라도 빌리 필그림을 이해할만한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리라.
블랙유머의 대가답게, 빌리 필그림을 따라가는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시선은 건조하고 냉랭하기만 하다. 특히 전장에 투입된 병사처럼 보이는 않고, 전쟁을 희화화하는 것 같은 빌리 필그림의 옷차림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포로수용소의 연극무대에서 신데렐라가 신었던 은색 장화를 신고, 여자들이 하는 외토시에 커튼을 로마시대 토가처럼 두른 어릿광대 빌리 필그림의 모습은 “웃기지도 않는 전쟁”에 대한 보네거트의 조롱 섞인 저격으로 다가온다. <제5도살장> 읽기는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처럼, 경이로운 순간들을 한 순간에 보는 그런 경험이었다. “반전(反戰)”이라는 빤한 주제를 과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예상을 단박에 부숴버리는 작가의 어마무시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전쟁이라는 현실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해내고 있었다.
전작 <마더 나이트>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카메오 등장 또한 주목할만하다. 전쟁포로로 도급노동을 위해 드레스덴의 시럽공장에 끌려와 있던 빌리 필그림은 나치의 선전요원으로 포로들의 생활에 대한 논문도 쓴 적이 있다는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만나게 된다. 자신이 개발해낸 캐릭터를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을 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미국의 소설가, SF작가, 에세이스트, 풍자가, 불가지론자, 유니테리언, 포스트모더니스트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진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 세계에 너무 늦게 발을 들여 놓게 돼서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비꼬는 그의 작법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거나 절판 혹은 품절의 운명에 처한 그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