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금해 미치겠다 - 지구상에서 가장 무모한 남자의 9가지 기발한 인생 실험
A. J. 제이콥스 지음, 이수정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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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떻게 해서 어떤 책을 읽게 되는가? 아마도 그건 그 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닐까. 아놀드 스티븐 제이콥스의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는 “스턴트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이 괴짜 저널리스트가 직접 체험한 기발한 9가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196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44세의 맨해튼에 서식하고 있는 유대인 작가는 이 책 전에 이미 두 권의 기상천외한 책으로 독자를 찾았었다. 한 번은 32권에 달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은 경험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친 척하고 무려 613가지에 달하는 성경에 나오는 율법대로 1년간 산 경험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예전에는 어림도 없었지만 이제는 온라인에서 진화한 데이트 시스템에 의해 인류가 짝짓기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매력적인 이십대 보모 미셸의 동의 아래 제이콥스는 그녀의 프로필을 온라인에 올리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남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결국 여성의 외모와 몸매에 집착하는 남자들의 속물근성을 예리하게 재단해 내는 개가를 올린다.

다음 과제는 아웃소싱(outsourcing)이다. 인도에 있는 허니와 아샤의 도움으로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돈을 지불하고 대신 시키는 것이다. 맨해튼의 유력 잡지 <에스콰이아>의 편집인에게는 적은 돈일지 모르겠지만, 월 1,000달러는 적은 돈이 아닌 것 같다. 하긴 그가 사는 맨해튼의 월세가 얼마겠냐만. 어쨌든 현대판 심부름센터에 맛을 들인 제이콥스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서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결과는 역시 어떤 경우에는 아웃소싱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더라는 간단한 사실.

“하얀 거짓말”이 과연 인간관계에 있어 나쁘기만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제이콥스는 “획기적 정직”이라는 명제에 도전하다. 물론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과연 모든 일에 “획기적 정직”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아니 어떻게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산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조지 워싱턴이 남긴 110가지 원칙 가운데 34번째 덕목이 특히 도움이 될 듯 싶다. 그게 무언지 궁금하다구? 그럼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를 직접 찾아보시라. 부록으로 잘 나와 있으니까.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신을 비롯한 각종 편향을 분석한 “합리성 프로젝트” 역시 흥미진진하다. 교육받은 지성인으로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생활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여전히 근거 없는 정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신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제이콥스는 논증한다. 특히 음식에 대한 다양한 편견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절로 공감이 갔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90퍼센트 이상이 ‘관성’과 ‘게으름’ 탓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이콥스처럼 자신에게 맞는 치약을 찾기 위해 40개가 넘는 치약을 사다가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임무는 이 괴짜 스턴트 저널리스트에게 맡기자.

도무지 운전과 인내심 강한 아내 줄리 말고는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이 스턴트 저널리스트는 심지어 누드 사진에까지 도전한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에서 히로인을 맡아 열연했던 메리 루이스 파커에게 누드 사진 촬영을 제의했다가 졸지에 자신도 옷을 벗게 된 제이콥스의 좌충우돌 체험기는 정말 압권이었다! 인터넷 시대에 2002년에 제이콥스가 직접 쓴 <메리 루이스 파커가 내 옷을 벗기게 만들었다>라는 기사를 직접 찾아봤다.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편집자는 누드 사진 촬영을 하면서 자기에게는 달랑 다이어트 콜라와 와인이 제공됐지만, 메리 루이스 파커에게는 진수성찬이 제공되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 그가 이 에피소드에서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통제권과 다양한 표현권’을 잃었을 때의 느낌이었노라고 말미에 조용하게 고백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궁금해 미치겠다>의 저자 제이콥스는 이 모든 실험을 무한한 인내로 참아준 아내 줄리에 대한 헌사로 이 흥미진진한 실험 프로젝트를 끝낸다. 어떤 이에게는 기행으로 보이는 일을 즐기면서, 책을 쓰고 그 책을 팔아 명성과 부를 얻는 제이콥스가 시전하는 재생산 프로젝트는 정말 부럽다. 그런데 과연 나에게 이런 실험을 할 수 있는 돈과 시간을 준다면 선뜻 내가 자원할 수 있을까? 인지부조화 차원에서 그건 아니지 싶다. 어쨌든 <기니아 픽 일기>라는 원제처럼 세 번의 기상천외한 실험적 삶을 마친 제이콥스가 다음번에는 또 어떤 기발한 주제에 도전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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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웃고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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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과 세 번째로 만나게 됐다. 올해 신간으로 나온 <일단, 웃고나서 혁명>이 바로 그 책이다. 2년 전에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와 <개가 남긴 한 마디>로 그의 문학 세계를 처음 엿볼 수가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형제의 나라 터키는 우리의 현대정치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고 한다. 이 책에서 네신의 빵빵 터지는 정치 풍자와 블랙유머에 더 공감이 가는 것 같다.

모두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단편모음집인 <일단, 웃고나서 혁명>에는 그냥 웃고 지나가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들이 등장한다. 기자 출신의 작가로 독재 정권 하에서 수감생활과 유배 생활을 직접 체험한 네신은 정치의 본질과 속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옥상에 올라가 이것저것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요구하는 미친놈의 이야기에서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폭주하게 되는 정치인의 속물근성을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아무도 듣지 않는 어느 노인의 예언은 어쩌면 조국 터키를 사랑하는 네신의 그것과 묘한 공명을 이루고 있다.

이장 선거에서 그동안 자신의 지위를 악용해온 외메르 영감의 낙선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앞장서서 공모를 한다. 하지만, 막상 선거에서는 그를 찍을 수밖에 없는 교묘한 작전을 펴는 외메르 영감에게 모두가 넘어가 어쩔 수 없이 그를 찍게 된다는 이야기에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터키 정치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야당과 여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외메르 영감의 모습에서 표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13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고 한다면 <암호가 뭐기에>와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온다>를 꼽고 싶다. 전자는 대대로 장군직은 업으로 삼아온 케난 장군 집안의 이야기다. 터키는 케말 파샤 이래 군부가 정권을 좌지우지해왔다.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족에게 군대식 생활을 강요하는 케난 장군(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케난 에브렌의 연상시킨다)의 모습은 터키 민중에게 민주주의 대신 계엄과 복종을 강요해온 터키 역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케난 장군은 자신의 후손은 물론이고, 집에서 기르는 개와 닭에까지 복종과 규율을 강조한다. 그에게 가정은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 아닌 “규칙이 지배하는 생활공간”일 따름이다. 자신의 대를 이어 군대에서 성공할 거라고 희망했던 손자 외즈툰치의 실패를 그래서 더 장군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승진에 실패한 외즈툰치가 그 이유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장면 역시 실정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는 터키 군부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왔다>는 개발도상국가의 비애와 블랙유머를 잘 조합한 이야기다. 미국인 가정의 접대를 받고, 하산 군은 빈 말로 초대를 했다가 낭패를 보게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면 되겠지하는 생각은 하산의 주변 인물들의 개입으로 보기 좋게 뒤집힌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손님을 초대한 하산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국 터키의 대표선수로 변신해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허세를 부린다. 진공청소기, 압력솥, 냉장고, 세탁기, 전축에 양탄자까지 이웃에게 빌리는 미국 손님 접대에 떠밀린다. 좁은 집에 어울리는 않는 가재도구를 임시변통으로 빌렸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선진국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벌어지는 해프닝을 아지즈 네신은 정말 냉정한 시선으로 꼬집는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찰국가 터키의 현실을 고발한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도 주목할 만하다. 감옥살이와 유배 생활에서 벗어난 주인공은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무허가촌에 보금자리를 차린다. 주변 상인들의 호의로 연명하던 그는 이사를 결심한다. 그가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그의 이사를 말리고, 그의 선행을 칭찬한다. 자신의 희생이 그들에게 먹히는가 싶었지만, 사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 경찰 때문에 호황을 누리게 된 상인들의 그의 이주를 말리려고 나선 것이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1915년생으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태어나 터키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머작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통해 터키와 터키 역사에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00권이 넘는 그의 저작 중에 열 번째로 국내에 소개된 <일단, 웃고나서 혁명>은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정치색이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꾸준하게 그의 작품을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는 이난아 역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맨 끝의 역자 후기에 나온 “2011년 겨울”이라는 글에 마지막으로 빵 터져 버렸다. 역시 아지즈 네신스러운 블랙유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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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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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 저술했다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를 완독했다. 가히 작가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고대 로마의 개국으로부터 시작해서, 공화정-제정, 동서로마의 분열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오롯하게 담아낸 작품이었다. 초심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일본 출신의 이방인이 방대한 로마사에 대해 이런 도전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할 만했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글쓰기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됐다. 고대 로마와 근대가 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를 다뤘는데 뭐가 하나 빠진 것 같지 않나? 시오노 여사는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 <십자군 전쟁>이라는 스펙터클한 테마에 도전장을 던졌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정치 종교적 선동으로 시작된 장장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느린 속도로 굴러가고 있던 중세 사회에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저자는 노르만 공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카노사의 굴욕(1077년), 에스파냐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려는 레콘키스타 운동을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대사건으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세속권의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는 <카노사의 굴욕>에 초점을 맞춘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비잔틴 제국의 구조요청에 응답한 우르바누스 2세의 막강한 권력행사를 십자군 원정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신은 왜 그 순간에 “그것”을 바라셨을까?

시오노 여사는 동방의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 하나를 간과한다. 1071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이끄는 비잔틴군이 아르메니아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그동안 서방을 형해 파도처럼 밀려오던 사라센 세력으로부터 지켜주던 비잔틴 제국은 이 전투를 계기로 제국의 근간이었던 아나톨리아를 상실하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그래서 동방정교를 신봉하던 비잔틴제국은 서방 가톨릭과의 뿌리 깊은 반목을 뒤로 하고, 교황에게 S.O.S.를 친다. 우르바누스 2세는 이 구조요청을 ‘신의 섭리’로 받아 들였고, 성지 예루살렘 해방전쟁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중세를 뒤흔든 대원정을 조직한다.

시오노 여사는 중세 시대에 이미 글로벌 경영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유럽 각지에 있던 생산기지이자 경제기지로 상호간에 연결되어 있던 수도원의 종교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교묘한 정치, 종교적 선동에 나섰다고 분석한다.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원대한 교황의 전략적 목표는 유럽 각국의 기사 계급은 물론이고 민중까지도 종교적 법열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다만, 교황권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독일)을 비롯한 각국의 왕들 대신 각국을 대표하는 제후, 기사 계급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대원정에 참여했다. 



 

우선 독일 대표 선수로 로렌 공작 출신의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보두앵, 프랑스 대표로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대표 선수 풀리아 공작 보에몽과 탕크레드를 저자는 세속적 욕망과 종교적 신념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십자군 이야기> 1편에서는 이들 십자군 1세대의 활약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오노 여사는 기존의 서방과 기사계급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탈피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들 기사들의 활약에 기초한 영웅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의 글이 “히스토리아(historia)”가 아닌 “게스타이(gestae)”라는 점을 이미 전작 <로마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지 않았던가. 책의 제목에 “이야기”가 들어간 것만 보더라도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는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재출간된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전자가 정사(正史) 스타일이라면 후자는 퓨전 스타일이다. 김태권 작가가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부분이 시오노 여사의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과 병참을 무시하고 오로지 종교적 신념만으로 무장하고 출발한 민중 십자군의 몰락은 예견된 실패였다. 



 

여기까지가 몸풀기였다면 기사 계급이 주축을 이룬 정규 십자군이 등장할 차례다. 경무장과 기동력을 위주로 구성된 이슬람 전사들 눈에 중무장한 갑옷과 투구를 쓴 프랑크 기사단의 위용은 근대전의 전장에서 탱크를 처음 맞닥뜨린 것과 같았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과 다니슈멘드의 분열을 이용해서 파죽지세로 니케아와 도릴라이움을 거쳐 소아시아를 통과한 십자군은 마침내 성도 예루살렘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공방전에 나선다.

이에 앞서 로렌군의 보두앵은 우연한 기회에 킬리키아와 에데사를 손에 넣게 되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보두앵의 정복이 향후 200년간 지속된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에데사의 보두앵은 곧이어 진행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모술과 이라크 방면에서 안티오키아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케르보가의 이슬람 지원군을 저지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시오노 여사는 역사의 자락에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개 사건이 역사의 큰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예리하게 짚어낸다.


이런 행운과 보에몽의 분전에 힘입어 악전고투 끝에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마침내 함락시킨 십자군의 창끝은 최후의 목적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슬람 지도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단지 영토 확보를 위한 침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전선에서 악귀 같이 달려드는 프랑크 기사들은 ‘신의 명령’이 아닌 단지 비잔틴제국 황제의 용병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크족의 가공할 침공 앞에 분열한 이슬람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이 십자군 손에 들어간 이후 1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십자군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십자군 1세대의 빛나는 성공과 예루살렘 해방 이후 전개된 십자군 내부의 갈등에 방점을 찍는다. 성묘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고드프루아가 죽은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등장한 보두앵과 십자군 국가의 배후 확보를 위해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전사 탕크레드가 <십자군 이야기>의 사실상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저자가 베네치아 상인의 관점에서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가치중립적인 저술을 시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서구 문명에 대한 편향성과 프랑크 기사(보에몽과 탕크레드)에 대한 찬양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가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십자군 전쟁을 재구성했는지 참고 문헌에 대한 목록이 전혀 없는 점도 아쉽다. 어디까지가 “인용”한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부터 저자 자신의 “이야기”인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독자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역사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게스타이)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역사의 고증이 우선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등장인물의 심정에 대한 추측 부분이 특히 마음에 걸린다. 역사적 사실과 천년도 지난 후대의 가정은 그간의 유구한 시간만큼 조화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하긴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이야기꾼’이지 역사학자는 아니니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겠지.

사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에는 경천동지할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저기서 모을 수 있는 정보의 집대성이다. 옛말에 구슬도 꿰어야 보물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역사의 단편적 사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작가의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십자군의 성공시대가 저물고, 위대한 이슬람 영웅 살라흐 앗 딘의 활약이 시작될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의 두 번째 인스톨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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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팡 수난기 - 루이 14세에게 아내를 빼앗긴 한 남자의 이야기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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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 하나. 1663년 1월 28일 프랑수아즈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트마르와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양 드 공드랭 결혼 서약하다.

프랑스 출신으로 시나리오 작가, 희극배우, 영화배우, 만화작가 그리고 소설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친 장 퇼레의 <몽테스팡 수난기>는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에 성공한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 있었던 스캔들에 블랙유머를 양념 삼아 기가 막히게 버무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군주에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금발의 고혹적인 미녀 아내를 뺏긴 어느 오쟁이 진 남자 몽테스팡 후작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 이야기가 궁금해서 네이버캐스트에 나온 태양왕 편을 읽어봤다. 사실 즉위 초기만 하더라도, 루이 14세는 후세에 알려진 것으로 그렇게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왕권은 신성하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지롱드의 난 그리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던 시대정신은 루이 14세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마자랭과 콜베르라는 명재상을 기용해서 내치를 다진 태양왕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베르사유 건설과 상비군의 강화 그리고 근대적 예술가 후원 시스템의 확립은 루이 14세 시기를 상징한다. 주목할 점 중의 하나는 복잡하기 짝이 없고 세련된 궁정 예법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루이 14세는 연애활동에도 열심인 왕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오쟁이 진 남편 몽테스팡 후작과 그의 아내 아테나이가 등장한다. 어처구니없는 결투로 약혼자를 잃은 프랑수아즈는 당탱의 동생 루이 앙리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가난하지만 사랑에 불타는 젊은 부부는 사랑놀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놀음을 위해선 고금을 막론하고 자금이 필요한 법. 가스코뉴 귀족은 자비를 들여 몇 번의 원정에 나서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빚만 잔뜩 지게 된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채무자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 철부지 부부는 ‘덩더쿵’ 사랑놀음에 정신이 없다.

한 방으로 인생역전의 기회를 찾던 루이 앙리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온전하게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내 아테나이를 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은 루이 앙리와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부부가 세 들어 사는 가발가게의 도제들을 온통 흥분의 바다로 몰아넣은 천하절색 아테나이가 왕비의 시녀로 발탁된 것이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좋았으련만, 호색가 루이 14세의 눈에 든 아테나이는 아예 그의 정부가 된다.

이제부터 장 퇼레의 블랙유머가 작렬하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은 절대군주의 정부가 된 아내 덕분에 금력과 권력을 모두 행사하게 된 루이 앙리를 부러워하지만, 진심으로 아테나이를 사랑하는 이 가스코뉴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회유와 협박, 유배 그리고 암살기도까지 차단해 내면서 오로지 사랑하는 아테나이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이미 베르사유의 진한 향기에 취해 버린 아테나이가 돌아올 리는 만무하다. 국왕을 조롱하기 위해 사슴뿔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남의 아내를 뺏어간 루이 14세를 비난하는 루이 앙리는 그야말로 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장인마저 왕의 정부가 되어 버린 딸을 두둔하는 말에 “장인 살해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1초간 고민하는 몽테스팡 후작의 상상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나 더 추가하면, 베르사유에 잠입한 몽테스팡을 도와주려고 가발가게 도제들이 만든 인간 사다리는 정말 눈물겨웠다.

<몽테스팡 수난기>를 읽으면서 신화의 재현이 떠올랐다. 제우스가 영웅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를 취해 낳은 헤라클레스 이야기와 아테나이를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무려 6명의 사생아를 낳은 루이 14세의 실화는 그대로 공명한다. 수많은 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프랑스의 국가질서를 바로 잡고, 국왕-귀족 그리고 평민의 질서를 세우겠다고 공언하던 태양왕이 실제로는 파렴치하게 시골 귀족의 아리따운 아내를 취해 부도덕한 일을 공공연하게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당시 지배계급의 치부를 그대로 들어낸다. 루이 14세가 원하던 국왕의 권위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베르사유 궁전,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이나 국민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든 대규모 원정이 아니라 청렴과 결백의 기초를 이루는 공명정대한 군주의 도덕성에 있었다는 점을 그는 정녕 몰랐을까?

장 퇼레의 책은 처음으로 읽었는데, 팩션 장르로 역사의 빈 공간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역량에 깜짝 놀랐다. 자신을 버린 아테나이를 잊지 못해 빈 관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오쟁이 진 시골 귀족의 짠한 순애보를 읽으면서, 허구와 사실 사이를 이렇게 능숙한 솜씨로 다룬 작가에게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검은 미사 사건> 같이 끔찍한 스캔들과 어쩔 수 없는 육체의 노쇠로 결국 국왕의 총애를 잃은 아테나이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했을까 과연 루이 앙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 <몽테스팡 수난기>는 짧은 행복 뒤에 자신을 숙명처럼 쫓아다닌 비극의 연쇄반응에 대담하게 맞선 가스코뉴 남자의 아련한 순애보를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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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 강의
박찬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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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엔가 <오마이뉴스>에서 주최하는 김호기 교수님의 강좌를 들었다. 모두 4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막스 베버의 책 때문에 강연을 신청했다. 하지만, 역시나 직장인으로 퇴근한 후에 강연 듣기만 참 난망했다. 2강을 듣고 나머지는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나와 하버마스 그리고 푸코의 인연은 멀어져 갔다. 그래도 첫 강의였던 에밀 뒤르켕과 막스 베버의 강의는 참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박찬운 교수가 고른 16권의 명저 소개에 들어가 있는 뒤르켕의 <자살론>이 그래서 더 반가웠나 보다.

법학자가 꼭꼭 씹어서 들려주는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켕의 명저 <자살론> 이야기는 흥미롭다. 수사학과 논리학같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학문과는 달리 비교적 후발 주자에 속하는 사회학의 연구 범위와 주제를 설정한 연구가는 철저하게 개인의 행위인 자살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방점을 찍는다. 39분마다 한 명씩 자살한다는 통계처럼 경쟁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자살공화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뒤르켕은 자살의 이유보다 자살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이 연구과정에서 그가 추론해낸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방법론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이기적, 이타적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분류법은 원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자는 여전히 내 사무실 책상에 올려져 있지만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아쉽게도 김호기 교수님의 강좌에서 빼먹은 바로 그 강의다. 평생을 인간의 이성 연구에 소진한 푸코의 글을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는 저자의 말에 용기가 용솟음치지만, 여전히 프랑스 본토인들도 어렵다고 말하는 그의 저작은 그야말로 넘사벽일 뿐이다. 이성이 근대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생각되지만, 푸코는 반대로 억압된 자유, 통제 그리고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허상이 아닌 근대사회의 실체를 보라고 주문한다. 그 대안으로 인간의 이성 능력을 찬양하는 실존주의 철학보다 이성 저 너머에 있는 “구조”로 이 세상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감시와 처벌> 각론에서는 기존의 신체형이 아닌 범죄의 예방과 교화 차원에서 자유형으로 대변되는 감옥으로의 전환에 대해 푸코는 설명한다. 더 나아가 근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형 구축을 위한 방법론과 고도로 계산된 정치기술을 분석한다. 우리나라에 한 때 성행하던 국민체조 분석을 통해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세계마저 지배하려고 했던 권력자의 의도를 저자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푸코의 책은 꼭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과연 그 때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권위에 대한 복종> 역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책이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세기의 재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했다.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은 게르만 아저씨들이 절대 원래부터 흉악하거나 난폭한 품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정말 우리 이웃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사람들이 생각한 그런 괴물이 아니라, 한 명의 성실한 관료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출신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비합리적인 권위에 복종하게 되는가에 대한 비극의 원인을 밝히는데 도전했다. 적당히 살고 좋은 게 좋은 것일까? 우리는 너무 익숙한 이런 표현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저자는 비합리적인 권위라면 저항하고 분노하라고 분연하게 주문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빌려 불편한 진실이라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박찬운 교수는 이런 딱딱해 보이는 책 말고도 C.W. 세람의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과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는 책도 추천한다.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고고학에 정통한 비전문가가 부드럽게 풀이해주는 책이야말로 나같은 문화이방인에게 적합하지 않을까? 세람에 따르면 과거는 미래를 항해하는데 꼭 필요한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저자가 고른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에 얽힌 부분에 대한 해설은 정말 흥미로워서 당장에라도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아울러 시민을 압도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 문화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박물관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건물이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제안도 마다하지 않는다.

2010년 출판계 최고 베스트셀러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하버드대학교와 정의라는 코드가 맞물리면서, 공정과 정의에 목마른 많은 이들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샌델 교수의 책이 인식의 문제였다면, 존 롤스의 <정의론>은 그 인식을 실천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롤스식 세상 바꾸기의 시작은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었다. 저자는 본격적인 정의에 대한 설명에 앞서 공리주의와 사회주의적 접근의 장단점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소수의 권익 보호와 개인의 자유가 합의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롤스의 꿈이었다. 롤스의 요약을 따르면 사회적 부를 배분하는 원칙이야말로 <정의론>의 핵심이란다.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롤스는 사회주의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평등적 자유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무상급식과 건강보험을 우리가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 사회안전망이라고 규정한 부분에서는 정말 벌떡 일어나 격하게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 우리가 읽어야할 고전과 명저를 읽었다면 마땅히 의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실천이 뒤따라야할 것이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관념적 책읽기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책을 읽고 실천에 나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독서인이 세상에 답하는 방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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