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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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지식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역사를 읽었다. 세계 3대 전기 작가라 불리는 작가는 머리말을 통해 이 책에서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을 담아내려고 했고, 역사 스스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에 일개 역사가가 각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역사가 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츠바이크는 그렇게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오롯하게 평가는 글을 읽는 독자에게 넘기는 수완을 발휘한다.

모두 12개의 역사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시작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 마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이다. 천 년 동안 서방 기독교 제국의 방파제로 작용해온 비잔틴 제국은 이제 수도만 남은 제국으로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편,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오스만 제국의 젊은 지도자 마흐메트에게 비잔틴 제국의 보석 콘스탄티노플은 반드시 점령해야할 필생의 사업이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노력으로, 마흐메트는 엄청난 크기의 청동 대포와 자그마치 1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선다.

입술이 다치면 이가 시린다[脣亡齒寒]는 교훈을 몰랐던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은 오스만의 침략에 맞서 지원을 요청하는 비잔틴 황제의 호소에 눈을 감는다. 제국 간의 영토분쟁, 동서교회의 분리 이래 로마 교황과 동방정교회 장로간의 불화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 다음은 서방 제국 차례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을까? 콘스탄티노플이 마흐메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난 뒤, 서방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엔나가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고서야 가공할 만한 술탄의 힘을 느꼈으리라.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루제 드 릴이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앞두고, 스트라스부르 시장의 제안으로 급조된 노래가 프랑스 혁명 대의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자유와 평등, 박애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나선 시민군에게 루제가 만든 곡보다 더 어울리는 노래는 없을 것 같다. 비록 훗날 루제는 혁명에 염증을 내고, 반혁명주의자로 돌아섰지만 그가 만든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국가로 삼색기가 펄럭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고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19세기 유럽 아니 세계의 운명을 뒤바꾼 단 1초의 결정이 제시된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 역시 세계사의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다. 벨기에의 워털루 언덕에 포진한 영국의 웰링턴을 격파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천재적인 전략과 위대한 프랑스 군대를 아낌없이 투입한다. 문제는 영국을 지원할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군을 전장에서 떼어 놓을 목적으로 파견된 그루쉬 원수의 결정이었다. 워털루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서둘러서 황제를 도우러 주전장으로 이동하자는 소장파 장교의 의견을 무시하고 황제가 내린 명령에만 집착한 그루쉬 원수가 내린 1초의 결정으로 결국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그가 만약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대신, 나폴레옹을 도우러 전장으로 뛰어들었다면 세계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20세기 마지막 남은 인류의 처녀지 남극으로 향했던 영국 출신 로버트 스콧 탐험대의 위대한 실패 역시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읽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서 읽었듯이, 고립무원의 추위 속에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력한 경쟁자(아문센)에 앞서 남극에 조국의 ‘유니언 잭’을 꽂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스콧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건 선착한 아문센의 편지와 노르웨이 국기였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했다면, 그나마 해피엔딩이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모두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동사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는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까지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긴 편지와 처절하게 남긴 기록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도전정신을 되새긴다.

마지막 주자로는 “세상을 경악케 한 열흘”의 주인공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우리에게는 레닌이라는 더 잘 알려진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다. 제정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스위스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파던 독서가 레닌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조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귀국을 서두른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란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은 탁월한 선동가이자, 혁명가인 레닌의 귀국을 원하지 않는다. 아직 휴전이 발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조국의 배신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독일 측과 개인 자격으로 타협한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혁명에 도화선을 당긴다. 이렇게 러시아의 심장부로 날아간 혁명의 탄알은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시간의 질서’에 균열을 가했다. 당시 레닌의 결정은 목적적 인간의 지향성에 대한 뚜렷한 본보기였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저자 츠바이크는 세계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에 주목한다. 콘스탄티노플의 그 유명한 삼중벽을 무용지물로 만든 “케르카포르타”가 튼튼하게 방비되었더라면, 워털루에서 그루쉬 원수가 1초의 결정을 재고했다면, 레닌이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 속의 작은 실수나 오판이 역사적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역사의 큰 흐름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역사의 가정은 그저 분석과 인과관계의 설정을 좋아하는 후세 사람들이 부질없는 상상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대로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을 즐기시라, 역사에 각색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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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조각 창비청소년문학 37
황선미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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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을 너무 오래전에 보내서 이제는 그 시절이 어땠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지금 되돌이켜 봐도 그 시절에 공부하라는 소리 말고는 좋은 소릴 들어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들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강화된 사교육과 도를 넘는 살인적인 입시경쟁, 낭만적인 학창시절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말처럼 들린다. 황선미 작가의 <사라진 조각>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개선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네 청소년 시절의 자화상처럼 다가온다.

주인공 신유라는 참 ‘잉여’스러운 캐릭터다. 아버지는 회사의 중역으로 늘 바쁘고, 한 살 터울 위의 오빠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우등생 그리고 엄마는 그런 오빠에게 올인한다. 그저 그런 성적에 그야말로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인 유라를 엄마는 미국도 영국도 아닌 필리핀으로 유학 보내겠단다. 어떻게 보면 행복한 고민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오은주 여사는 자신의 희망이자 기대주인 유라의 오빠 신상연을 민사고에 보내기 위해 거치적거리는 존재인 딸내미인 유라를 멀리 치우려는 속셈이다. 유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실망스러웠겠는가.

교우관계도 원만치 못한 유라는 이런 저런 일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자 가출을 감행하지만 막상 갈 곳이 없다! 으레 이런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절친 같은 사이드킥 하나 없는 유라, 참 불쌍하다. 어쨌든 열몇살난 중학생이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부모에게 자신을 봐달라는 관심유도형 가출을 결심하고 진주행 버스표를 사지만 결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게다가 핸드폰에는 자기를 찾는 한 통의 문자나 전화도 없다는 사실에 유라는 좌절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상연에게서 터져 나온다. 동물원에서 사자를 찾던 날, 유라는 우연히 오빠와 유학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재희를 본 것 같다는 의혹에 사로잡힌다. 설상가상으로 상연과 그의 우등생 친구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어머니들은 유라네 집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고, 유라는 우연찮게 그걸 엿듣게 된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황선미 작가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어느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미스터리까지 추가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대가 바뀌어도 개선되지 않는 우리네 교육문제의 해법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어느 특정한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고학력 일류대 선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이 꼭 필요하다. 모두가 내시 균형에도 등장하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 빠져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이전투구 하는 방식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기심은 오히려 교육 문제를 악화시킬 따름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사교육을 나라고 하지 않겠는가.

공교육 시스템에서는 항상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에 적합한 전인교육을 부르짖지만, 현실과의 메울 수 없는 괴리 때문에 교육의 수혜자인 학생들에게 얼마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아울러 가정문제 역시 되짚어 볼 일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행복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부모 세대의 책임이 아닐까. 그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식의 물질주의에 기초한 이기주의야말로 우리가 지양해야할 일일 것이다.

문득 엉뚱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봤다. 우리나라에 만약 살인적인 입시경쟁이 없었다면 우리네 청소년 작가들은 과연 어떤 주제를 글의 소재로 삼았을까 하고 말이다. <사라진 조각>에서도 여타의 청소년 소설에 공식처럼 나오는 우등생에 대한 도식이 등장한다. 하긴 늘 공부 안하고 말썽 부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뭐가 색다를 게 있을까. 공부 잘하는 범생이들의 일탈이 이야깃거리가 되겠지. 그렇다고 마냥 르포 스타일의 글도 마뜩치 않고, 간만에 읽는 청소년 소설을 접하면서 청소년 소설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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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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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도미에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판화가로 널리 알려진 귀스타브 도레의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도레는 특히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주제로 한 판화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신흥 부르주아 자본가들에게 도레의 작품은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에 이어 다시 중세로 돌아간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는 나나미 여사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문장과 함께 귀스타브 도레의 세밀한 판화로 천 년 전 신의 뜻으로 행해진 성전을 되짚어 보는 재미가 있다.

11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성도 예루살렘이 위치한 중동의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어느 정도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로 서진하는 무슬림 세력의 비잔틴 공략이라는 국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세이오스 1세가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구조를 요청하면서 천년에 걸친 종교전쟁의 도화선을 당기게 된다. 당시 서유럽 제국 사이에서 최고의 종교권력을 자랑하던 로마 교황은 유럽 각지의 봉건 제후에게 이교도에 빼앗긴 성지 수복이라는 매력적인 화두를 던졌고,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기사 계급이 이에 열렬히 호응하면서 십자군 원정의 대단원의 막이 열렸다.

민간에서도 은자 피에르(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에 그 어벙하게 등장하는 선동가)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천국행 티켓을 약속하면서 십자군 원정의 열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하지만,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병참 문제없이 무턱대고 원정에 나선 민중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계 국가에서도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가 동부유럽의 헝가리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르기도 한다. 이들의 소문을 들은 비잔틴 제국은 그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고 이들을 소아시아 투르크령으로 실어 나른다.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클르츠 아슬란이 이끄는 투르크 전사들과 본격적인 회전을 치르게 된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십자군 전사들은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과시하면서, 이어지는 안티오키아 공방전 그리고 예루살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마침내 기독교 세계의 숙원이던 예루살렘 공략(1099년)에 성공한다. 승리 후, 십자군 기사들은 이슬람교도를 무차별 학살하고, 이슬람 사원을 철저하게 파괴하면서 후세에 두고두고 비판받게 된다.

나나미 여사의 글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이슬람 출신 에미르들은 프랑크인(무슬림들이 서방 십자군을 부르던 표현)들이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왕국을 필두로 한 영구적인 국가 건설을 도모할 줄 몰랐다고 한다. 원정 초기 서방 제국의 군세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적전분열로 자신들에게도 역시 성도였던 예루살렘 공격에 나서지 못했던 이슬람 세계에서도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게 된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 천년의 인물 중 12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한 살라흐 앗 딘, 우리에게는 <킹덤 오브 헤븐>의 그 관대한 이슬람 군주로 알려진 살라딘이 바로 그다.

살라딘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 역시 십자군 못지않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하고 조상 전래의 땅에 침입한 외세에 맞서 성전을 개시한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예루살렘 수복(1187년)에 성공한다. 이 부분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자세히 다뤄져서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희대의 영웅에게는 맞수가 있기 마련이다. 무슬림 세계에 살라딘이 있었다면, 십자군 기사 중에는 사자심왕 리처드가 있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서 비록 리처드는 무슬림의 손에 뺏긴 예루살렘을 탈환하진 못했지만, 이미 승세가 기운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 원정이 이후에도 수차례나 반복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리처드로 대변되는 서유럽 기사들의 약속을 중요시하는 기사도 정신이 반드시 지켜졌던 건 아니다. 영국 출신의 사자심왕은 포위된 무슬림 전사들에게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모두 학살한 좋지 않은 사례를 남겼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으리라. 리처드와는 대조적으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수복한 후, 기독교들을 살려 주었을 뿐 아니라, 재산까지도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승자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관용을 보여주었다.

십자군 전쟁의 맞수 살라딘과 리처드의 대결을 마지막으로 무슬림 세력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겠다는 기독교 제국에 대한 교황의 호소는 공염불로 그치게 된다. 베네치아의 꼬임에 빠져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질 않나, 소년 십자군으로 동원된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는 본래의 순수했던 성전은 세속적 욕망의 현현으로 전락하게 된다. 특이하게도 나나미 여사는 오스만투르크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도 “십자군 전쟁”에 포함시킨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면서도, 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십자군 전쟁의 굵직굵직한 사건의 줄거리를 뽑아낸 귀스타브 도레의 일러스트에 나나미 여사의 주석은 금상첨화다. 본격적인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에 앞서 가벼운 몸 풀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나미 여사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랬듯이, 십자군 원정의 정치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십자군 원정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미친 영향에 상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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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요정
김한민 글.그림 / 세미콜론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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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공간이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길에서 출퇴근하는데 소비되는 시간이 너무 많다. 게다가 피곤하기까지 하고. 그런데 우리에게 공간은 이렇게 단순하게 이동의 대상일 뿐일까? 보헤미안 라이프를 떠올리게 하는 삶의 궤적을 가진 김한민 씨는 공간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을 <공간의 요정>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소설의 주인공 송이는 자기가 좋아라하는 공간인 동물원에서 이 짧으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연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이 요정이라는 “비밀”을 알게 되고, 요정 사냥꾼 우고의 도움을 받아 ‘도시성형’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요정을 데려다가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장면은 참 정겹다. 그 도시성형 전문가는 작금의 무상급식 이슈로 세간의 화제가 된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을 연상시킨다.

송이네 아버지는 만물 연구가답게 시를 싸대는, 아니 시를 써대는 시지렁이의 도움을 받아 요정의 가축화해서 “기분”을 만들어내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송이의 절친 시지렁이 트라클 녀석은 절필을 선언하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자연히 시를 충전받지 못한 요정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하직한다. 아버지의 조수이자 충실한 요정 사냥꾼인 우고는 요정 장례업자로 은밀하게 요정의 시신을 처리한다.

도시성형업자의 난개발로 살 곳을 잃어 무지막지한 수의 난민 요정이 발생하면서 우고의 요정 사냥업은 번창한다. 하지만, 기분을 원하는 송이의 아버지에게 그런 요정들은 귀찮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꼬인 요정”이 등장하고 그 녀석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송이 아버지는 그동안 추진해오던 무모한 사업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들어가 살겠다는 폭탄선언을 날린다. 이에 송이는 요정사냥꾼 우고와 아버지에 맞서 반항을 하게 되는데...

김한민 작가가 <공간의 요정>에서 말하는 요정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솔직히 말해서 어려서부터 현실적이었던 나는 요정이나 산타 클로스 같은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 일찍이 더동화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런 존재로 인식했던 게 아닐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연애마저 유예당한 오늘날을 사는 이들에게 과연 <공간의 요정>은 어떤 의미일까. 개발과 효율만을 강조하는 수많은 도시성형업자들의 주장으로 우리의 휴식공간인 녹지와 공원이 줄어드는 현상은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그림소설을 통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공간의 요정>은 우리의 환경과 생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열 살배기 송이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도 함께 다루고 있다. 어려서 믿었던 요정의 존재가 왜 나이가 들면서는 더 이상 와 닿지 않게 되는 걸까. 송이 아버지는 인간인 자신과 요정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송이가 태어났다는 거창한 구라를 친다. 그 정도로 요즘처럼 알 것 다 아는 아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송이는 요정 어머니의 부재를 과연 어떻게 받아 들였을지 궁금하다.

책의 뒷얘기에 실린 미처 자세히 다루지 못했다는 요정의 프로필이 참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녀석은 “산책로요정”이었다. 간식거리와 산책을 즐기는 산책로요정,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요정사냥꾼 우고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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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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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하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당당하게 한 자리를 꿰고 있는 <오셀로>를 다시 읽었다. 굳이 이탈로 칼비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제 고전이라 하면 ‘다시 읽어야’ 한다는 건 식상하기까지 하다. 의심 때문에 아내를 죽인 어느 반편이 같은 남편의 이야기가 원작이 쓰인지 수백 년이 지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독자를 유혹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원형이 아직까지도 우리네 삶 가운데 작동한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이 비극을 읽으면서, 제목에 내세운 주인공 오셀로보다 오셀로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희대의 모략가이자 ‘꾼’ 기질이 다분한 이아고가 이 비극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아고는 사이프러스로 부임한 무어인 총독 오셀로의 부관 자리를 내심 노리지만, 자신보다 인격적으로나 실력에서 뛰어난 캐시오를 오셀로가 등용하자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부숴 버리겠어’라고 결심한다. 글을 쓰다가 문득 궁금해진 점은 이아고가 과연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고 그런 치밀한 음모를 세웠는지였다. 항상 그렇지만 운명이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한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를 쓱 빠져 나가듯이 그렇게 되게 마련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아고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캐시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열패감에 사로 잡혀 사악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베네치아 시절부터 데스데모나를 사랑한 얼뜨기 로더리고를 이용해서 돈을 갈취하고, 어둠 속에서 캐시오를 습격하게 사주한다. 그런데 가만, 돈을 뜯어냈다고? 철저한 상업 국가였던 베네치아에서 권력과 명예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금전이었다. 권력에서 소외된 이아고는 차선으로 돈을 선택한다.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권부에 다가설 수 있다는 명징한 판단이 들어서였을까, 이아고의 권력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이아고와 함께 비극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남편 이아고에게 전달한 에밀리아 역시 전통 소설에서 보이는 평면적 인물에서 한참 벗어난 캐릭터로 등장한다.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는 연옥에라도 뛰어 들겠다는 그녀의 폭탄선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오쟁이 진 남편은 과연 그런 치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자의 성공을 위해 <은밀한 유혹>까지 시도한다는 건 자유연애주의가 만연한 현대에도 수용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 이제 이아고의 모함 때문에 오쟁이 진 남편으로 착각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처참하게 죽인 오셀로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지금도 여전히 일반적이지 않은 국제결혼, 그것도 무어인 출신으로 베네치아의 유력한 가문의 아름다운 데스데모나와 결혼한 오셀로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사이프러스를 지키기 위해 총독으로 부임한다. 베네치아의 최전방 전권을 가진 총독으로 파견될 정도라면, 인종을 떠나 그의 실력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군사나 정치면에서는 그렇게 유능하다고 판단되는 오셀로가 의외로 이아고의 거듭된 모략으로 파멸해 가는 과정은 그래서 더 생경하게 다가온다.

과연 오셀로가 그렇게 뛰어난 판단력의 소유자였을까? 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스스로 오쟁이 진 남편이라고 확신했을까? 자수성가가 한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감 결여와 자신이 이룬 것을 언제라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게 아닐까? 그동안 여러 전쟁터에서 승승장구해온 외적 자신감 내면에는 이런 심리적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아고에 의해 촉발된 질투의 광기는 자신과 아내 데스데모나를 파멸로 몰고 간다. 관계자들을 동원한 대질 심문 한 번만 하더라도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이미 희곡 전문 작가가 등장할 정도로, 문화 소비시장이 있었나 보다. 21세기 한국에서는 먹고 살기에 바빠 연극이나 공연은커녕 책 한 권 읽기가 버겁다고 아우성이다. <오셀로>를 읽으면서 역시 희곡은 무대를 통해 접해야 제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매 여름마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게으름 때문에 관람하지 못한 게 아쉽다. 물론 고어를 사용하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제대로 알아들었을 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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