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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웃고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과 세 번째로 만나게 됐다. 올해 신간으로 나온 <일단, 웃고나서 혁명>이 바로 그 책이다. 2년 전에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와 <개가 남긴 한 마디>로 그의 문학 세계를 처음 엿볼 수가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형제의 나라 터키는 우리의 현대정치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고 한다. 이 책에서 네신의 빵빵 터지는 정치 풍자와 블랙유머에 더 공감이 가는 것 같다.
모두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단편모음집인 <일단, 웃고나서 혁명>에는 그냥 웃고 지나가기에는 쉽지 않은 주제들이 등장한다. 기자 출신의 작가로 독재 정권 하에서 수감생활과 유배 생활을 직접 체험한 네신은 정치의 본질과 속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옥상에 올라가 이것저것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요구하는 미친놈의 이야기에서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폭주하게 되는 정치인의 속물근성을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아무도 듣지 않는 어느 노인의 예언은 어쩌면 조국 터키를 사랑하는 네신의 그것과 묘한 공명을 이루고 있다.
이장 선거에서 그동안 자신의 지위를 악용해온 외메르 영감의 낙선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앞장서서 공모를 한다. 하지만, 막상 선거에서는 그를 찍을 수밖에 없는 교묘한 작전을 펴는 외메르 영감에게 모두가 넘어가 어쩔 수 없이 그를 찍게 된다는 이야기에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터키 정치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야당과 여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외메르 영감의 모습에서 표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13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고 한다면 <암호가 뭐기에>와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온다>를 꼽고 싶다. 전자는 대대로 장군직은 업으로 삼아온 케난 장군 집안의 이야기다. 터키는 케말 파샤 이래 군부가 정권을 좌지우지해왔다.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족에게 군대식 생활을 강요하는 케난 장군(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케난 에브렌의 연상시킨다)의 모습은 터키 민중에게 민주주의 대신 계엄과 복종을 강요해온 터키 역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케난 장군은 자신의 후손은 물론이고, 집에서 기르는 개와 닭에까지 복종과 규율을 강조한다. 그에게 가정은 편안한 휴식의 공간이 아닌 “규칙이 지배하는 생활공간”일 따름이다. 자신의 대를 이어 군대에서 성공할 거라고 희망했던 손자 외즈툰치의 실패를 그래서 더 장군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승진에 실패한 외즈툰치가 그 이유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장면 역시 실정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는 터키 군부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 미국인 손님이 왔다>는 개발도상국가의 비애와 블랙유머를 잘 조합한 이야기다. 미국인 가정의 접대를 받고, 하산 군은 빈 말로 초대를 했다가 낭패를 보게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면 되겠지하는 생각은 하산의 주변 인물들의 개입으로 보기 좋게 뒤집힌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손님을 초대한 하산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국 터키의 대표선수로 변신해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허세를 부린다. 진공청소기, 압력솥, 냉장고, 세탁기, 전축에 양탄자까지 이웃에게 빌리는 미국 손님 접대에 떠밀린다. 좁은 집에 어울리는 않는 가재도구를 임시변통으로 빌렸다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선진국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벌어지는 해프닝을 아지즈 네신은 정말 냉정한 시선으로 꼬집는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찰국가 터키의 현실을 고발한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도 주목할 만하다. 감옥살이와 유배 생활에서 벗어난 주인공은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무허가촌에 보금자리를 차린다. 주변 상인들의 호의로 연명하던 그는 이사를 결심한다. 그가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그의 이사를 말리고, 그의 선행을 칭찬한다. 자신의 희생이 그들에게 먹히는가 싶었지만, 사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 경찰 때문에 호황을 누리게 된 상인들의 그의 이주를 말리려고 나선 것이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1915년생으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 태어나 터키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머작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통해 터키와 터키 역사에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00권이 넘는 그의 저작 중에 열 번째로 국내에 소개된 <일단, 웃고나서 혁명>은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정치색이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꾸준하게 그의 작품을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는 이난아 역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맨 끝의 역자 후기에 나온 “2011년 겨울”이라는 글에 마지막으로 빵 터져 버렸다. 역시 아지즈 네신스러운 블랙유머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