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이 금지된 도시? 굳이 데카르트의 사유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이 사유, 다시 말해서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한편으론 생존을 위해 부단 없이 생각을 해야 하는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스페인 출신의 작가 마누엘 F. 라모스는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엄청난 세월이 흐른 기원후 49세기로 독자들을 조심스럽게 인도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카르멜로 프리사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나이 서른 안팎의 복지부 공무원이다. 그는 내리막길을 보면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 잡혀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났나 보다.

어느 날, 그렇게 내리막길을 보고서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뛰는 도중에 세계 대통령의 핸드백을 가지고 도주하던 범인과 충돌하면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한 카르멜로에게 반한 여간호사의 육탄공세와 심지어 여성인 세계 대통령조차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세계 대통령의 각료로 ‘나쁜 환경부 장관’인 조르드는 이를 이용해서 영웅 카르멜로에게 가공할만한 범죄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전임 세계 대통령인 아나를 하야시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어떤 점 때문에 스페인 독자들이 열광을 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마누엘 F. 라모스의 은유와 블랙유머가 가득한 스토리텔링들은 어쩌면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 휘발이 되었는지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추리소설의 장르적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로 인해 집중력이 분산이 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일본 작가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에서처럼 소설 처음에 아예 등장할 인물들의 이름을 죽 늘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관계와 개연성에 대한 설명이 사족처럼 따라 붙었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듯한 미스터리한 연쇄살인과 주인공이 검증받지 않은 시술을 통해 거의 불사신과 같이 재탄생된다는 설정은 마음에 들었다. 사실 200쪽 남짓한 짧은 분량에 그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는 게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까. 현재로부터 근 30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빌 게이츠의 가문이 거의 전설처럼 유지된다는 가설 또한 흥미로웠다.

그렇게 먼 훗날에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연금제도의 존재와 모든 각료들이 정무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의 취향 때문인지 모처의 비밀클럽을 출입한다. 물론 사회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책읽기도 금지되고, 음악의 존재마저 없는 가운데 예의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무슨 낙으로 살지 궁금했다.

아쉽게도 스페인식 블랙유머와 나랑은 그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이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책을 읽게 됐다. 물론 저자인 김갑수 씨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이 책이 김갑수 작가의 작업실인 “줄라이홀”에 관계된 에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포의 모처 지하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꾸몄다는 작가의 말에 선뜻 부러움이 피어올랐다. 자신의 서식지보다 두 번째 거처라고 할 수 있는 아지트가 작가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본말전도의 상황. 게다가 작업실에서 무슨 작업을 하느냐고 묻지 말란다. 그 내용은 책을 읽으면 낱낱이 밝혀질 테니까 말이다.

일단 그는 방송 진행, 강의 그리고 원고 집필로 밥벌이를 한다고 한다.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적이면서도 충분한 밥벌이를 하기가 어려워지는 세태에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음껏 사발째 들이키고, 3만 장이나 되는 레코드들을 원 없이 들으면서 자신만의 아지트에 틀어 박혀 자신이 자처한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기들과의 떠들썩한 파티 타임을 오가는 그의 삶에 어찌 부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어려서 LP를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작가는 돈이 생기는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 생두와 LP를 모은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라이선스도 아닌 빽판을 죽어라 모았다. 정말 나중에 가치도 없는 그런 빽판을 말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CD가 LP를 대신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 CD마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춰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LP만세를 외치면서 이제는 이름마저도 생소한 턴테이블에, 상당한 가격임에 틀림없을 스피커 유닛과 앰프 타령을 해대는 지은이의 글은 독자를 소외시키는 느낌마저 들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음반-커피 그리고 오디오파일 이야기 중에서 맨 끝의 오디오파일 부분이 가장 지루했다. 왜냐구? 개인적으로 이제는 더 이상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플라스틱 음반을 들을 기회가 손으로 꼽을 정도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말하는 그런 장비들을 갖출 경제력이 없으니깐. 이건 그냥 돈 몇 푼 더 주고 커피 필터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뭐 그래도 커피 이야기와 음반 이야기는 읽는데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아쉽게도 개인적으로 커피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커피 생두를 가는 그라인더와 일본 모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커피 용품 일체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오디오파일의 삶보다는 비용이 좀 적게 들지 않을까?

역시 가장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바로 음반 이야기다. 물론 작가처럼 그런 어마어마한 컬렉션을 꿈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군대 시절에 처음으로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연주한 리스트의 <사랑의 꿈 3번>을 듣고 나서 클래식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물론 그전에는 팝송, 그 중에서도 헤비메틀을 즐겨 들었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 스트레스해소용으로 듣던 헤비메틀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곤 한다. <디아파송>이니 <부루의 뜨락> 같은 클래식 전문점들을 찾던 시절이 생각난다.

물론 문명의 이기에 완전하게 투항해 버린 나는 LP 대신 CD를 대체 미디엄으로 잡았고, 한동안 지난 세기의 명연주자들과 명지휘자들이 직접 연주하고 지휘한 복각CD들을 한참 찾아 듣곤 했다. 물론 지글거리는 잡음은 기본이었지만, 사라사테가 직접 연주한 <찌고이네르바이젠>이나 베를린 필의 초대 상임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 그리고 마지막 카스트라토의 소름끼치는 육성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오늘 서점에 갔다가 내가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에 책으로 지표가 되어 주었던 안동림 씨가 새로 펴낸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란 책을 슬쩍 펴보았다. 즐겨 듣던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카를로스 클라이버 같은 이름이 아주 반가웠다. 아, 작가가 말한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의 <리흐테르>를 찾아 보았는데 그 책이 국내에 출간돼 있었다! 카라얀과 리히터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의 웅대하면서도 장엄한 오프니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김갑수 작가의 아날로그 음반과 커피 그리고 오디오 예찬에 태클을 걸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그 취미생활들이 누구나 다 손쉽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에게는 줄라이홀이 자신이 꿈꾸는 도피안의 세계로의 초대장일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차안의 세계처럼 그렇게 멀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없다, 어쨌든 부럽다는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가 대단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20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오래 걸렸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출간이 되었다가 절판의 운명에 처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독자들의 품에 들어오게 된 사연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죽인 소녀>는 불혹의 나이에 추리소설 작가로 등단하게 된 하라 료의 두 번째 작품으로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한다. 역시 하드보일드 작가답게 군더더기들은 죄다 빼 버리고 바로 사건의 핵심으로 주인공 사와자키와 독자들을 몰아넣는다. 우리나라에는 조금은 생소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탐정이 이웃 일본과 미국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다.

탐정 사와자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마카베 씨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졸지에 마카베 씨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딸인 사야카의 유괴범으로 몰린다. 하지만 곧 사와자키는 유괴범의 지시대로 6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유괴범에게 전달하는 역을 맡게 된다. 도쿄의 거리를 누비며, 유괴범의 지시대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던 중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사와자키는 의식을 잃는다. 물론 그가 배달하고 있던 현금이 든 돈 가방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 이제 사와자키는 자신이 어린이 유괴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의심을 안은 채,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괴범의 추적에 나서게 된다.

<내가 죽인 소녀>에서 하라 료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심리묘사나 배경보다는 오로지 실제적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가공했다는 지명들은 마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쿄 도심을 질주하는 사와자키의 블루버드 안에서, 그가 미행하는 골목길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캐릭터 간의 대사 역시 일품이다. 불필요하게 장황한 대사 대신에 간결하면서도 갈등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간의 의사전달과 감정묘사를 위한 짧은 대사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역시 유괴 사건의 단서 제공에 있어서도, 독자들이 너무 좌절하지 않게 하면서 계속해서 작가의 사건전개를 따라 오게끔 하는 작법 역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숙성시키는 하라 료 스타일다웠다.

하지만 역시 2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주는 괴리감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예를 들면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20년 전의 상황에서 누군가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사와자키는 공중전화를 이용해야만 했다. 다른 것도 아닌 그 공중전화가 일본 발전의 상징이라고까지 치켜세우다니.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도쿄의 지명에 대해 조금 더 알았더라면 소설의 재미가 좀 더 와닿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신주쿠니 가쿠슈인이니 하는 지명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있나. 그리고 무언가 한 건 터뜨려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부도수표가 된 조직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와 사와자키의 과거로 인도해줄 와타나베 겐고의 그림자가 얼비치는 정도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대개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그렇듯이 <내가 죽인 소녀> 역시 초반부 전개가 좀 어려웠다. 하지만 고 부분만 넘기면 재미가 배가되면서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본격적으로 사와자키의 추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왕자의 귀환>을 리뷰해주세요
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아주 오랜만에 만날 수가 있었다. 파주에 갔다가 어린이 청소년들이 즐겨 읽는 책들을 내는 전문 브랜드 비룡소 서점에서 <어린왕자>를 보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돌베개 출판사에서 김태권 작가와 우석훈 교수가 의기투합한 <어린왕자의 귀환>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서 아주 기대가 됐다. 사실 돌베개 블로그에 들러서 책이 나오기 전에 미리 웹툰으로 올려진 김태권의 작가의 그림을 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김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이야기>를 통해 처음으로 그의 작품 세계와 만날 수가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구 부시 행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점철된 <십자군이야기>가 2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어린왕자의 귀환>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렇다 <어린왕자의 귀환>은 생텍쥐페리의 명작 <어린왕자>의 패러디 버전이다.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소설에서 소행성B612와 장미에 관심을 두었다면, 김태권 작가는 이 책에서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그동안 선전해 오던 ‘시장천국 불신지옥’의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유효한 아젠다가 아니라는 현실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첫 십년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시효가 지나 버린 신자유주의 망령에 사로 잡혀 있다. 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서나 통용이 가능하던 파이를 키워 분배를 하자는 파이론(論)이 여전히 득세를 하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고용불안이 심화되고 있으며, 도대체 해법이 보이지 않는 비정규직 문제와 날이 갈수록 그 격차가 벌어져 가는 빈부의 차이를 벌리는 소득분배의 문제들은 정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어린왕자의 별을 망쳐 놓은 정체불명의 신자유주의 자본가를 찾아 나서는 우주여행에서 김태권 작가가 비정규직 왕자로 내세운 두 명의 캐릭터인 남수와 주영의 구한말 타임머신 여행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던 백 년 전에 이미 반드시 국가가 수호해야 할 국가 기간산업인 전기사업을 민영화시키려는 시도가 미국과 미국 자본가에 의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현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의 폐해가 이미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구미선진국가들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 무리수를 두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수년 전 미국 동부를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대규모 ‘블랙아웃’(정전) 사태도 극단적인 민영화로 인한 부작용의 한 예로 들 수가 있겠다. 아울러 오바마 정부에서도 모범 사례로 꼽고 있는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에 자신들의 입맛대로 수정을 가하려고 하는 움직임 역시 김태권 작가와 우석훈 교수의 예리한 눈길을 피해가진 못하고 있었다.

김태권 작가의 패러디된 그림들이 어쩌면 이렇게 작금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태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옛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즐겨 쓰던 수법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기법이 현재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사측에서 구사하고 있는 노노대결 구조로 치환되고 있다는건 신문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내용이었다. 일자리를 잃으면 사회적 안전장치의 부재로 인해 바로 극빈층으로 전락해 버리고, 심지어 일하고 있어도 일하는 빈곤층(working poor)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에 대해 우석훈 교수는 각 장마다 달려 있는 해제를 통해,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그에 대한 대안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미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기업의 육성과 대안 경제에 대해 설파해온 우석훈 교수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이 판치는 시장자본주의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에 보다 큰 가치를 둔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신자유주의 우주에서 살아남는’데 한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노키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6
카를로 콜로디 지음, 김양미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른이 돼서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세 권의 동화가 있었다. 아니 내가 동화라고 믿었던 책이라고 해야 할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그리고 다시 읽기 전까지 미처 작가도 몰랐던 <피노키오>.

이번에 인디고 출판사에서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의 6번째 시리즈로 당당하게 출간된 <피노키오>의 저자는 카를로 콜로디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라고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커지는 나무인형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몇 백 년은 됐을 거라고 어림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채 150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한다.

역시 동화답게 <피노키오>는 더말할 나위 없이 교훈적이다. 어른들을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하라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본 아이들의 모습에 대한 전형이라고나 할까? 아마 어린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극악한 반어린이 정서를 다룬 책도 없을 것 같다. 모름지기 어린이들이라면, 공부보다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뛰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어른들을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지극히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행간에서 읽으면서 마음이 갑갑해졌다. 확실히 어린이가 보는 피노키오와, 어른이 읽는 피노키오의 차이는 그렇게 엄청났다. 아마 21세기 사교육 광풍이 부는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이보다 더 ‘교훈’적이면서도 적합한 콘텐츠를 담은 고전동화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보니 게으름을 피워서, 소가 되었다는 옛 설화는 이탈리아산 동화에서는 당나귀 버전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렇게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는 스토리텔링의 내러티브에는 그런 유사성이 있는 걸까?

피노키오가 가진 금화를 500배로 뻥튀겨 주겠다는 고양이와 여우 듀엣의 유혹은 몇 년 전 중국펀드 광풍을 가져왔던 묻지마 투자의 패턴과 너무나 흡사했다. 감언이설에 속아 엄청난 수익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투자했지만 피노키오에게 돌아온 것은 빈 손 뿐이었다. 피노키오 같은 얼간이에게도 자신이 가진 것을 뻥튀기 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한다는걸 작가는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피노키오>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한 유물론적 다위니즘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기원은 말하는 나무토막을 발견한 버찌 할아버지(안토니오)였다. 나면서부터 게으르고, 부모님(제페토 할아버지)의 말이라고는 정말 죽어라고 듣지 않는 피노키오가 편부 슬하에서 어머니의 사랑(파란 머리 요정)을 알게 되면서 개과천선하게 된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나무인형에서, 가난하고 병든 부모의 수발을 드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금 과장하면 유물론적 진화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어른이 돼서 <피노키오>를 읽으면서 내내 스탠리 큐브릭이 기획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A.I.>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소망의 중심에는 자신을 길러주던 어머니 모니카로부터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 영화에서 데이빗은 푸른 머리 요정에게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그의 꿈을 이루어주는건 터무니없게도 외계인이었다. 비록 단 하루긴 하지만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되는 데이빗의 그것과 카를로 콜로디가 창조해낸 멋진 캐릭터 피노키오의 꿈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확실히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동화 <피노키오>의 상투적인 메시지 대신, 조금은 삐뚤어진 어른의 시각으로 보는 새로운 스타일의 <피노키오>와의 만남이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어른이 되어야 하는 피노키오의 노동윤리
    from Perspectivism 2011-02-18 01:13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전철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맥베스를 보다가 말고, 드라큘라를 보다가 말았지만 하나 끝까지 본 책이 있으니 바로 피노키오다. 고전을 '실제로' 읽어보면 만화, (위의 슈렉같은) 영화, 광고 등을 통해 각색된 몇 개의 장면들로만 기억하던 내용과 실제의 내용이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피노키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이야기,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생환한 이야기가 사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