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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가 대단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20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오래 걸렸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출간이 되었다가 절판의 운명에 처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독자들의 품에 들어오게 된 사연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죽인 소녀>는 불혹의 나이에 추리소설 작가로 등단하게 된 하라 료의 두 번째 작품으로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한다. 역시 하드보일드 작가답게 군더더기들은 죄다 빼 버리고 바로 사건의 핵심으로 주인공 사와자키와 독자들을 몰아넣는다. 우리나라에는 조금은 생소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탐정이 이웃 일본과 미국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다.
탐정 사와자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마카베 씨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졸지에 마카베 씨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딸인 사야카의 유괴범으로 몰린다. 하지만 곧 사와자키는 유괴범의 지시대로 6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유괴범에게 전달하는 역을 맡게 된다. 도쿄의 거리를 누비며, 유괴범의 지시대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던 중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사와자키는 의식을 잃는다. 물론 그가 배달하고 있던 현금이 든 돈 가방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 이제 사와자키는 자신이 어린이 유괴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의심을 안은 채,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괴범의 추적에 나서게 된다.
<내가 죽인 소녀>에서 하라 료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심리묘사나 배경보다는 오로지 실제적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가공했다는 지명들은 마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쿄 도심을 질주하는 사와자키의 블루버드 안에서, 그가 미행하는 골목길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캐릭터 간의 대사 역시 일품이다. 불필요하게 장황한 대사 대신에 간결하면서도 갈등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간의 의사전달과 감정묘사를 위한 짧은 대사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역시 유괴 사건의 단서 제공에 있어서도, 독자들이 너무 좌절하지 않게 하면서 계속해서 작가의 사건전개를 따라 오게끔 하는 작법 역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숙성시키는 하라 료 스타일다웠다.
하지만 역시 2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주는 괴리감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예를 들면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20년 전의 상황에서 누군가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사와자키는 공중전화를 이용해야만 했다. 다른 것도 아닌 그 공중전화가 일본 발전의 상징이라고까지 치켜세우다니.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도쿄의 지명에 대해 조금 더 알았더라면 소설의 재미가 좀 더 와닿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신주쿠니 가쿠슈인이니 하는 지명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있나. 그리고 무언가 한 건 터뜨려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부도수표가 된 조직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와 사와자키의 과거로 인도해줄 와타나베 겐고의 그림자가 얼비치는 정도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대개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그렇듯이 <내가 죽인 소녀> 역시 초반부 전개가 좀 어려웠다. 하지만 고 부분만 넘기면 재미가 배가되면서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본격적으로 사와자키의 추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