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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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서로 넬라 라슨의 1929년 작품 <패싱>을 신청했다. 도서관에서 일단 책은 빌렸다. 그리고 읽지 못하고,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책을 펴 보지도 못하고 반납했다.

 

그리고 넷플릭스 <패싱>의 존재를 알게 됐다. 원작 소설에 앞서 영화부터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절반 정도 보고 나서, 미리보기로 책도 읽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영화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흑백 화면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주인공 아이린(리니) 레드필드가 등장한다. 사실 흑백필름만으로는 그녀의 인종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녀의 남편인 브라이언과 함께 있으면 그들이 흑인 부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아들들인 주니어와 테드(시어도어)도 마찬가지다.

 

의사로 일하는 브라이언 그리고 흑인 연맹(Negro League)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리니의 조용하고 평안한 일상에 리니의 옛 친구 클레어 벨류가 등장하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시카고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은 드레이튼 호텔 바에서 리니는 우연히 옛 친구 클레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은 클레어가 백인 같은 외모에 백인 남편과 함께 있어서가 아닐까.

 

여전히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시절, 리니는 항상 모자의 망사로 자신을 가리고 다니는 듯하다는 그런 느낌을 준다. 감독은 블러리 효과로 주위의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는 리니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포착해낸다. 아니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비록 흑인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이지만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검둥이라는 모욕을 받고 싶지 않다는 심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녀의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는 바로 이해가 된다.

 

반면 패싱으로 가난한 집안의 흑인 처녀에서 부잣집 마나님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한 클레어는 언제나 자신감에 넘친다. 클레어의 초대에 마지못해 리니는 그들이 머무는 스윗트룸에 갔다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클레어의 남편 존 벨류에게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한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 미국사회는 그랬단 말인가. 뒤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아니라 흑인들 바로 앞에서 그들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혐오한다는 말을 어떻게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지껄여댈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지독한 모욕에도 리니는 의연하게 대처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클레어는 편지로 리니에게 자꾸만 들이대지만, 리니는 그런 클레어를 자꾸만 밀어낸다. 아마 나라도 그랬으리라. 남편 브라이언 역시 웃기는 짜장이라고 클레어를 평가한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됐다. 클레어는 계속해서 리니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클레어는 그녀의 편지를 아예 뜯어 보지도 않는다. 결국 리니의 집을 찾아와 비록 백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지만, 외롭고 불행하다는 고백을 하는 클레어. 그런 그녀에게 리니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클레어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리니의 아들들인 주니어와 테드에게도 그리고 남편 브라이언에게도. 심지어 리니의 집에서 일하는 주와도 친밀함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 영화에서는 재즈 피아노의 선율이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마다 등장해서 엇갈리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후벼 파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제 재즈 피아노가 등장할 차례가 되었는데 싶을 정도다. 흑인 연맹에서 주최하는 댄스 파티에 자신도 참가하겠다고 나선 클레어. 그곳에서 리니의 남편 브라이언을 필두로 멋쟁이 흑인 남성들과 잇달아 춤을 추며 클레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소설가 휴 웬트워스에게 리니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로, 클레어의 패싱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리고 웬트워스는 클레어에게 그녀도 패싱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데 그게 과연 필요한 일일까라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그전에 리니는 클레어와의 대화에서 좀 더 돈이 필요하다는 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항상 필요한 돈의 존재를 알리는데 인색하지 않다. 나는 왠지 클레어가 큰 판돈을 건 도박판에서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남편 존의 박대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언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하얀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녀가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도 결국 외롭고 불행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백인 행세를 하는 클레어는 삶의 어두운 단면을 대변한다. 반면, 곳곳에서 들려오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모욕 그리고 폭행에 치를 떠는 남편 브라이언을 다독이며 의연하게 대처하는 리니는 클레어의 그것과 대척점에 서 있다. 실제로 192754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발생한 존 카터 린치 사건을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브라이언에게 리니는 화를 낸다. 아버지는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는 자신의 모국에 대해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리니는 어떻게든 진실을 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클레어가 자신의 가정과 지인들 사이에 깊숙하게 침투할수록 리니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아이들과 살림에만 신경 쓰던 리니는 갑자기 등장한 클레어 때문에 심신이 피로하다. 남편 브라이언과 클레어가 따로 연락하고, 혹시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심리들을 각색과 연출을 맡은 레베카 홀은 기가 막히게 포착해낸다. 곳곳에 흐르는 재즈 음악의 선율에 리니가 덧없이 피워대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는 정말...

 

영화는 결국 클레어의 정체를 알게 된 백인 남편 존 벨류의 등장에 이은 비극으로 끝난다. 너무 순식간이라 사건의 경위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러저러한 정황만 드러날 뿐. 소설은 영화에 비해 좀 더 매운 맛이다. 21세기 PC 시대에 맞춰 레베카 홀은 될 수 있으면 N 워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원작의 감성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커트 보네거트의 임사 체험을 희화한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충격적인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에서 합법적이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제도도 미국의 헌법 내에서 합법적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인물들 가운데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토머스 제퍼슨은 말로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흑인 노예를 부렸다고 한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커트 보네거트 작가는 다시 자신만의 스타일f로 미국의 제도와 건국의 아버지를 비판했다.


[뱀다리]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어서 몇 자 더 적어 보련다.

 

영화에서 리니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클레어의 인종차별주의자 남편인 존 벨류를 만난다. 존은 그녀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며 손을 내민다. 하지만 리니는 그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같이 있던 지인에게 자신이 백인 행세하던 시절에 아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클레어는 차별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삶은 온통 위선의 천국이었다. 그러는 동안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리니를 찾아와 고백하듯이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패싱이라는 절차를 통해 백인 행세를 해도, 그녀의 뿌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그런 클레어에 비해 행복해야 했던 리니도 다른 이유로 불행했다. 갑자기 등장한 멋쟁이 친구가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 가고, 자신의 지인들마저 하나 같이 클레어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평안했던 리니의 삶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이다. 술에 취해 침대에 누워, 천장에 난 금을 발견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 난 삶에 이런 미세한 균열을 잡아내는데 도가 튼 작가 한 명을 알고 있었지. 그렇다, 제임스 설터만큼 이런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작가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원작의 각색을 맡은 레베카 홀이 설터 선생의 팬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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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15 1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영화도 있군요. 재미있을거 같아요~!! 리니와 클레어의 대비가 인상적이네요~ 아무리 감추더라도 본질은 안바뀌니 딜레마 인거 같아요. 책으로 읽어도 흥미진진 할거 같습니다 ^^

이 신작을 희망도서로 빌렸다니 좋으셨을텐데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셨다니 ㅜㅜ

레삭매냐 2021-12-15 13:11   좋아요 3 | URL
사진 퍼 나를 땐 몰랐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밑에

Nothing is black and white.

라고 되어 있네요. 멋짐요.
책은 다시 빌려다 보려구요.
어제는 비가 와서 못갔습니다.

미미 2021-12-15 12: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화 재밌겠네요!!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은 <닥터 키보키언>말씀하신 건가요?

레삭매냐 2021-12-15 13:11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

제가 소싯적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
가 누구냐 누군가 묻는다면 지체
하지 않고,

커트 보네거트와 루이스 세풀베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얄라알라 2021-12-15 12: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 결제 안 했는데, 완전 보고 싶어지는데요^^

레삭매냐 2021-12-15 13:12   좋아요 4 | URL
영화는 무지 재밌습니다 -

어쩜 그리 섬세하게 주인공들의
감정들을 잡아내는지 감탄해 마
지 않았습니다.

흑백 필름 특유의 느낌과 카메라
워크도 대단했습니다. 블러리가
참 인상적이었죠.
그냥 끝장이었습니다.

페넬로페 2021-12-15 13: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침 넷플릭스에 이 영화 있으니 일단 영화부터 봐야겠어요~~
책은 언젠가 읽게 되겠지요 ㅎㅎ

레삭매냐 2021-12-15 13:13   좋아요 4 | URL
저도 책을 빌리지 못해서 우선
영화부터 봤는데, 영화가 책보
다 순한 맛인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N 워드가 남발하는
것 같더라구요.

독서괭 2021-12-15 13: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계속 다른 분들 리뷰 보며 재밌겠다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매냐님 글이 결정타.. 이번에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ㅠ 영화도 매력적일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12-15 14:04   좋아요 4 | URL
영상 음악 그리고 주인공 리니
의 불안한 시선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얄라알라 2021-12-15 13: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꿋꿋하게 넥플릭스 결제 안하고 있는데, 레삭매냐님 저를 흔드시네요 ㅋㅋ˝그냥 끝장˝이라 말씀하시니

레삭매냐 2021-12-15 14:04   좋아요 3 | URL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트레일러
보고 반해서 대기 중이었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얄라알라 2021-12-15 13: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독서괭님께서도 레삭매냐님을 ˝결정타˝ 추천으로 언급하심 ^^ ㅋㅋ

독서괭 2021-12-15 14:31   좋아요 4 | URL
결정타 맞아서 방금 주문했습니다..ㅋㅋ

mini74 2021-12-15 16: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거랑 표지가 다르네요. 이 표지가 뭔가 더 강렬한 이 책 좋았는데 설터작가님이 한 수 위인가요? ㅎㅎ 제임스 설터 도 1월에 만나봬야겠군요 ㅎㅎ 안그래도 스콧님이 영화가 더 좋다고 해서 보고싶었는데 넷플릭스에 있군요 ~

레삭매냐 2021-12-15 16:39   좋아요 2 | URL
아마 민음사에서 나온 책을 만나
신 것 같습니다 :>

설터는 고저 사랑입네다.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양반
이라고 하더라구요.

영화는 꼭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라로 2021-12-16 21: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는데요, 매냐님께서 아주 멋지게 글을 써주셨군요!!^^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극적인 것을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무리 백인처럼 보이는 클레어도 발은 흑인의 발이더군요.
주와 뒷정원에서 얘기할 때 리니가 들어와서 자기의 겉옷으로 클레어의 발을
덮어주는 장면에 아주 잠깐 보이는 클레어의 발,,,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올려주신 천장의 균열도 첫 번째 남편이 바라봤을 때보다
두 번째 리니의 눈으로 보게 되는 균열은 더 가지를 뻗은 것처럼 보이고요.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더구나 1929년의 작품이라고 하시니!

레삭매냐 2021-12-24 19:10   좋아요 2 | URL
영화로 먼저 만나고 나서 결국
책으로도 만나 봤습니다.

근데, 영화의 느낌적 느낌이 워
낙에 강렬하다 보니 소설의 이미
지가 잘 잡히지 않았던 것 같습니
다. 레베카 홀 감독이 각색을 기가
막히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닉을 ‘깜씨‘로 번역하는 패기에
좀 놀랐습니다.

발 스토리는 미처 닿지 못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증맬루.

새파랑 2022-01-07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주말에 독립서점 가셨다가 우주점도 한번 방문하시면 될거 같아요 ^^

mini74 2022-01-0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축하드려요 *^^*

서니데이 2022-01-07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thkang1001 2022-01-07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1-10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