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욕망의 추구와 몰락의 서사
어느 순간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가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제 도서관에 책 반납 하러 가는 길에 빌렸다. 마음 같아서는 시공사에서 나온 RSC 셰익스피어 선집으로 읽고 싶었으나 내가 주로 가는 도서관에는 비치가 되어 있지 않아 올재 클래식 버전으로 읽었다.
서양 문학은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로 대변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문호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올재 클래식에서는 본문에 앞서 장황한 설명이 달려 있는데 모두 패스하고, 원전에 집중했다.
모두 5장으로 이루어진 희곡 <맥베스>는 실존했던 알바 왕국(스코틀랜드)의 막 베아드 막 핀들라크(1005~1057)라는 인물을 모델로 삼아 쓰였고, 1606년 초연되었다고 한다. <맥베스>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그린 휴먼 드라마인 동시에 대단히 정치적 작품이기도 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으로 1603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만방에 알리길 원했다.
신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왕이라는 왕권신수설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제임스 1세는 국왕 덩컨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결국 파멸하고 마는 주인공 맥베스의 비참한 추락을 통해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1세는 자신의 그런 의도를 작가인 셰익스피어가 충분히 구현했다고 믿을 걸까? 문학 작품은 수용자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게 아니었던가.

<맥베스>는 노르웨이와 결탁한 코더 경의 반란을 덩컨 왕의 충직한 신하들인 맥베스와 뱅코우 그리고 맥더프들의 활약으로 제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등장한 세 명의 마녀들이 맥베스와 뱅코우에게 일련의 예언을 전한다. 그것은 맥베스가 글래미스와 코더의 영주가 되고, 또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뱅코우의 후손이 왕위를 잇게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덩컨 왕의 사촌이었던 맥베스는 충직한 신하에서 흔들리는 역신으로 캐릭터가 전환된다. 마녀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맥베스는 왕위 찬탈의 꿈을 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덩컨 왕은 충신 맥베스에게 죽은 코더 경의 영지를 하사한다. 그러자, 맥베스는 다음 예언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녀들은 맥베스가 왕이 될 거라는 예언만 했지, 어떤 식으로 왕이 될 거라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랬더니만 맥베스는 자신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의 사주를 받아(?) 자신의 영지를 방문한 덩컨 왕을 시해한다. 왕의 사후, 후계자들인 맬컴과 도날베인이 도주하면서 왕위는 그대로 맥베스에게 굴러 떨어진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맥베스에게 영광의 순간이 계속 이어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최고 권력자가 된 찬탈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했다. 다음 목표는 바로 자신과 마녀들에게 같이 예언을 들었던 뱅코우였다. 맥베스만큼은 아니지만, 다음 왕자들을 낳을 사람으로 지목된 뱅코우를 없애야 자신의 자리가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한 맥베스는 자객을 보내 뱅코우와 그의 아들인 플리언스를 제거하려고 한다.
덩컨 왕을 시해하면서 폭주하기 시작한 맥베스는 결국 뱅코우 암살에 성공한다. 다만, 그의 아들인 플리언스는 도주에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를 여는데, 그 자리에서 죽은 뱅코우의 유령을 목격한다. 나는 맥베스의 안녕을 위협하는 유령이 덩컨 왕이 아닌 뱅코우의 유령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뱅코우와 더불어 덩컨 왕의 유령도 같이 등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느 시점에서, 덩컨 왕을 적극적으로 암살하고 왕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던 레이디 맥베스야말로 이 희곡의 진짜 주인공이 아닌가 싶었는데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 아저씨는 세 마녀들이 진짜 주인공이라는 썰을 주장한다. 우리가 어렵게만 생각하는 철학의 본질이 비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질문과 반항이라고 규정한다. 인류 역사에서 수천 년 동안 군림해온 신분제에 대한 도전을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적대시해온 사실을 지적하면서, 국왕에 대한 시해를 부추기는 듯한 예언을 날린 마녀들이야말로 <맥베스>의 실질적인 주인공들이라는 주장이다. 오, 이거 흥미로운 걸 그래.
한편, 뱅코우 암살로 폭주하기 시작한 맥베스는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 불참한 또 다른 유력한 영주 맥더프 압박에 나선다. 이에 맥더프는 이웃 잉글랜드로 망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해가 가지 않는 점 중의 하나는 왜 맥더프는 자신의 처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지 않고, 결국 맥베스가 보낸 자객들의 손에 죽게 만들었냐는 점이다. 혹시 맥더프는 훗날 맥베스 타도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자신의 처자들을 희생시킨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잉글랜드로 망명한 맥더프는 이미 그곳에 있던 덩컨 왕의 왕자 맬컴과 합류하고, 잉글랜드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시워드 경이 인솔하는 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맥베스 토벌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처음의 상황에 중첩되는 점이 바로, 외세와 결탁한 국내의 반란세력이라는 점이다. 코더 경도 노르웨이와 결탁해서 덩컨 왕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던가. 맥베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보면, 맬컴 일당도 역시 외세와 결탁한 반란군과 정확히 일치했다. 코더 경이 어떤 이유로 해서 반란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에 맬컴 일당과의 비교가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맥베스는 다시 한 번 마녀들의 예언 혹은 신탁을 듣기 위해 찾아가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이 가능한 예언들을 얻고 돌아온다. 그런데 첫 번째 예언이 맥베스의 성공에 대한 예언이었다면, 두 번째 예언들은 그의 몰락 혹은 추락과 파멸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러니까 동일한 예언이라도 어떻게 해석 하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마녀들의 첫 번째 예언이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면 국왕 시해라는 속성 해결책을 사용하지 않고도 맥베스가 이룰 수 있는 그런 예언이었다면, 두 번째 예언은 완전히 맥베스가 통제 불가능한 그런 수준의 예언이었다. 잉글랜드 용병부대가 수도 던시네인으로 향하는 있다는 첩보가 날아들고, 농성전에 돌입하는 순간 네 번째 마녀로도 볼 수 있는 레이디 맥베스가 운명한다. 그녀의 역할에 비해 너무 싱거운 엔딩이 아니었나. 극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고, 맥베스는 결국 맥더프의 손에 죽고 만다.
내가 보기에 맥베스는 사촌이자 자신의 주군이었던 덩컨 왕을 시해한 것보다 자신의 전우이자 동료였던 뱅코우를 암살한 사실에 더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왕이 되고자 했지만, 정작 왕이 되어서는 권력의 단맛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영주들의 반란과 전왕의 후계자가 획책한 반란 진압에 나서야 했다. 몰락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맥베스는 전장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아야했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군주 제임스 1세는 이런 서사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그가 셰익스피어에게 이런 종류를 서사를 주문하지 않았을까? 감히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들과 의회 나부랭이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말이다.
진짜 오래 전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는 광채로 만났을 적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정보가 1도 없이 만나다 보니 그냥 참으로 비극적이로구나 싶었지만, 나이가 들고 그나마 깨달음을 얻은 뒤에 만난 거장의 작품은 또 다르게 다가왔다. 하긴 바로 이런 맛에 고전을 읽는 게 아닐까. 만날 때마다 새로운 나만의 해석이 가능하니 말이다. 더 나이가 들어서 만나게 되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벌써부터 궁금할 따름이다.

[뱀다리]
오늘이 복날이란다. 날은 드랍게 덥구나... 습하고.
맥베스는 모름지기 그 잘 드는 칼로 엄한 사람들을 잡는 살인검(殺人劍)을 할 것이 아니라, 나처럼 마늘이나 까서 중생의 호구를 구제하는 활인검(活人劍)으로 사용했어야 했다. 그게 자신의 정신건강이나 행복을 위해서도 좋았으리라. 파삼 한 뿌리 들어가지 않은 백숙은 끝내줬다. 세 마리에 만원이었는데 솥이 작아서 한 마리는 미처 넣지도 못하고 바로 냉동실로 갔다네.
[뱀다리2] 번역을 맡은 김우탁이라는 분은 1927년 생으로, 역자가 구사하는 번역은 요즘 번역투가 아니었다. 맥베스는 상감으로, 레이디 맥베스는 중전이라 표기해 주셔서 순간 이조시대인 줄.
[뱀다리3]

연식이 있는 인간이라 그런진 몰라도, 2015년작 <맥베스>보다는 보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가까운 스타일의 오손 웰즈가 주연을 맡은 1948년 <맥베스>가 더 땡기네요. 이건 너무 오래 전 영화라 그런진 몰라도 구하기도 쉽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