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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 가는 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3
E. M. 포스터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평점 :
언제고 읽을 책은 읽게 된다는 게 나의 지론 중의 하나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에드거 모건 포스터의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던 <인도로 가는 길>을 읽었다. 이 책이 나온 게 1924년이니 딱 97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구나.
공간적 배경은 1920년대, 아직 영국이 제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식민지 인도의 가상의 공간인 찬드라푸르다. 그리고 별 특별할 게 없는 곳의 마라바르산의 어느 특별한 동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저자는 독자를 인도한다.
당시 식민지 인도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우선 무굴 제국에 이어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치안 유지를 위해 어떻게 보아도 속물일 수밖에 없는 치안 판사 로니 히슬롭 같은 이들을 현지에 파견했다. 그 목적은 철저하게 식민지 인민의 치안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식민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없었다면 인도 국가는 혼란으로 빠져들 거라는 주술을 인도 인민들에게 걸었다. 그 결과, 훗날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벌어진 혼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인도 사람들이 영국인들에게 자신들을 언제 통치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절대 아니다. 순전히 자국의 원료 생산지이자, 산업혁명으로 과다 생산된 면직물을 팔아먹기 위한 시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뿐이다. 풋내기 관료인 치안 판사 히슬롭은 현지인들에게 친절하면 안된다는 이상한 신념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인종주의자일 뿐이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주어진 권력 때문에 독단은 디폴트로 장착하고 있었다.
소위 영국물을 좀 먹은 하미둘라나 주인공 닥터 아지즈 그리고 마무드 알리 같은 인사들은 영국 식민지배의 본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 투쟁 대신 그들에게 비굴하게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들이며 그들의 그늘 아래서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그런 신세였다고나 할까. 물론 때때로 벌어지는 차별은 감수해야 했다. 특히, 아지즈 같은 의사 선생은 자신의 상관인 캘린더 소령보다도 뛰어난 의술을 자랑하지만 순전히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백인들만의 리그인 클럽에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이 장면에서는 읽다만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이 연상되기도 했다.
카스트 제도라는 엄격한 신분 제도와 더불어 영국의 식민지배 계급으로 나뉜 찬드라푸르에 두 명의 영국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미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치안 판사 히슬롭의 어머니인 무어 부인과 로니의 약혼녀인 아델라 퀘스티드가 그들이다. 개화된 인도주의자들을 자처하는 이 두 명의 여성들은 징세관 터턴이 주관한 브리지 파티에서 보여지는 가식적인 연기에 진력을 낸다. 그들은 가짜가 아닌 ‘진짜 인도’를 만나고 싶어한다. 사실 영국인들이 만들어낸 허상이 불과한 진짜 인도 역시,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알 수 있겠지만 무어 부인과 퀘스티드에겐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저 빨리, 어쩌면 로니와 결혼해서 자신이 평생을 보낼 지도 모를 곳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아이 셋에 상처한 남자 닥터 아지즈가 아주 적절한 상대로 부상한다. 브리지 파티가 있던 날, 무슬림 사원에서 닥터 아지즈와 처음으로 만난 무어 부인은 아지즈의 인격을 높게 평가한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아지즈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는 그런 속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영국 신민인 저자 에드거 모건 포스터 저자가 그런 평가를 한다는 건 하나의 역설일 수밖에 없는 그런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결국 그 역시 지배계급의 일원인 영국 출신 백인이 아니었던가.
한편, 아지즈는 궁극적으로 나중에 경솔한 선의로 판명이 났지만, 무어 부인과 미스 퀘스티드를 마라바르 동굴로 초대했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퀘스티드 양이 동굴에서 아지즈에게 추행을 당했다고 기소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찬드라푸르는 발칵 뒤집혀 버렸다. 어디 감히 검둥이 원주민이 고귀한 영국 부녀자를 희롱했단 말인가? 식민지에 거주하던 영국 제국의 신민들은 사건의 자세한 전후경과도 알아보지 않고, 자신들이 모욕받은 것처럼 광분하기 시작한다. 반면 지역의 명망 있는 의사인 아지즈 역시 만만치 않은 동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시릴 필딩이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판을 들어가며 아지즈 편에 섰다.
마라바르 동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김빠진 콜라처럼 진행되던 서사는 아지즈 재판을 정점으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너무 재밌기 때문에 스포일링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지만,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그럴 수 없음을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어쨌든 에드거 모건 포스터 선생의 절묘한 소설적 배치에 대해서는 정말 극찬을 할 수밖에 없다. 아지즈 재판에서 악의 근원, 죄수, 문제의 인물 그리고 피고로 불리는 아지즈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수 있었던 무어 부인은 소동을 피해 배를 타고 본국행을 선택했다. 해당 재판은 히슬롭의 부하이자 인도인 판사인 다스 씨에게 맡겨졌다. 그에게는 솔로몬 이상 가는 지혜가 필요한 판국이었다. 유죄나 무죄를 선고해도, 어느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그런 역설적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지즈와 필딩의 강력했던 결속와 우애 그리고 상호간의 신뢰는 투옥과 재판과정을 거치면서 격렬한 반영주의자로 변신한 아지즈의 오해로 무산되어 버렸다. 자신의 선의가 철저하게 배신당한 아지즈는 도저히 이전의 그런 선하고 쾌활한 남자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아지즈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 일련의 자기피해 의식이 망상으로 이어지면서 아지즈의 필딩에 대한 오해는 극단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결론은 대영제국와 식민지 인도의 공존을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델라 퀘스티드나 무어 부인이 알고자 했던 레알 인도의 모습들은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굳이 동서양의 차이를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에서 오는 차이들을 선의로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포스터 선생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퀘스티드가 로니 히슬롭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계속해서 물었던 것처럼,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퀘스티드 양은 어쩌면 자신이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그런 인도 국가와 그곳에 사는 이들에 대한 애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게 아닐까. 그런 애정은 어쩌면 시간이 해결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게 문제였다.
요즘 일일 코로나 발생자수가 경이적인 40만 명을 넘고 매일 같이 3천여 명이 코로나로 사망하는 가운데 인도의 공공 의료 시스템은 붕괴되었다는 외신을 보고 듣는다. 코로나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실력도 없는 21세기 인도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한 때, 그들을 지배했던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소설에서 아지즈는 힌두교도와 무슬림 그리고 시크교도가 공존하는 하나의 인도 타령을 해댔지만, 영국제국의 기획한 분할통치라는 특유의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훗날 인도는 유혈 속에서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1984년에 데이빗 린 감독의 연출로 동명의 영화가 발표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데이빗 린 감독의 마지막 영화였다. 소설에서는 아델라 퀘스티드 양이 못생겼다고 나오는데, 영화에서 아델라 역을 맡은 주디 데이비스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음악은 모리스 자르가 맡았다. 이제 소설을 다 읽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면 되겠지.
소설의 전반은 상당히 고전했지만, 마라바르 동굴 사건을 기점으로 <인도로 가는 길>은 막장드라마를 능가하는 그런 읽는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포스터 선생의 유작인 <모리스>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열린책들에서 새롭게 포스터 전집을 내면서 중고시장에서 포스터 선생의 책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냥하는 맛에 하나씩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