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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32 - 제3부 천하통일 32 입명왕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10월
평점 :

딱 57일이 걸렸다. 지난 7월 27일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32권을 읽는데 걸린 시간이다. 물론 그동안에 다른 책들은 만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이 시리즈부터 끝내야 한다는 그런 모종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난 두 달간 나의 모든 독서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간사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희대의 영웅이자 권력가 그리고 모략의 달인 이에야스는 고희의 나이를 넘어 이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다. 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인 시대에 74세의 노인은 확실히 천수를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천하는 평정되지 않았고, 센고쿠 시대의 기운은 빠지지 않았다. 이미 오사카 대전에서 결전에 나섰던 사나다 유키무라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인 전국인의 모습이었다. 미카와 너구리 선생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신불을 앞세워 노래하고 있지만, 전쟁이 춤추는 시대를 좋아하는 무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야규 무네노리나 세키슈사이 같은 이들이 신카게류의 사람을 베지 않는 활인검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전란의 시대를 칼과 창 한 자루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씨가 먹히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물론 이런 난세에 꽃을 피우는 무사들과 달리 상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상인들에게 평화의 시대는 교역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소중한 시기이기도 하다. 아, 그런데 전란의 시대에 상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는 게 아닐까? 나중에 오고쇼 이에야스에게 올리브유로 튀긴 도미 요리를 올린 3대 챠야 시로지로도 오사카 전투 당시 동군에게 남만에서 수입한 대포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로라하는 일본 재벌들도 모두 일본 제국주의 시절 전쟁을 계기로 부흥한 그런 기업들이 아니던가.
어쨌든 미카와 너구리 선생의 생애 마지막 미션은 바로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와 오슈의 도쿠간류(외눈박이 용) 다테 마사무네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오사카 전쟁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히데요리 모자를 죽게 만든 일로 해서 오고쇼 이에야스는 큰 심리적 부담을 안게 됐다. 어쨌든 도요토미 타이코가 남긴 유자를 죽게 만들었다는 점은 천하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런 과오가 아닌가. 2대 쇼군 히데타다와 그가 거느린 가신들의 생각과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경험한 오고쇼의 생각은 결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방자한 언행을 일삼하는 자신감 넘치는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테루의 문제를 아무 일 없이 넘어가기는 어려웠다. 우선 타다테루는 장인 다테 마사무네의 영향으로 자신 역시 다음 쇼군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오고쇼에게 히데요리가 죽은 오사카 성을 넘겨 달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었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십대 청년의 생각과 고희를 넘긴 노장의 생각은 접점이 없었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도 타다테루는 전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동군 측에 위기를 불러올 뻔 하기도 했다. 무례를 들어 쇼군의 가신을 죽이기도 했고, 난전 중에 아군 부대를 적군과 함께 몰살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유를 만들면 한이 없겠지만 미카와 너구리 선생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재능과 야심을 겸비한 타다테루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을 좀 더 파보면 모든 문제는 이에야스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일단 오쿠보 나가야스라는 문제적 인간을 타다테루의 중신으로 붙여 주고, 더 큰 야심가인 다테 타다테루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한 결정은 모두 자신이 내린 게 아니었던가. 저자는 그런 이에야스의 인간적 고뇌를 다루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어쨌든 누가 뭐래도 예의 결정과 문제의 시발은 오고쇼가 잘못 내린 결정의 후과였다.
다양한 전술을 동원해서 우선 타다테루를 자중시키고, 에치고 외지에 유폐하는 데 성공한 미카와 너구리 선생은 마지막 상대를 굴복시키는데 나선다. 하지만 타이코에게도 반항한 전력의 도쿠간류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이에야스가 죽던 해인 1616년 정월에 쇼군이 대군의 하타모토를 동원해서 오슈 정벌에 나설 거라는 소문이 에도 성에 파다하게 퍼졌을까. 오고쇼와 쇼군이 술책을 부려 자신을 체포하고 카이에키에 나설 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도쿠칸류는 자신의 사위 타다테루 숙청 와중에 매사냥을 핑계로 자신의 영지인 무츠로 튀어 버렸다. 어쩌면 이런 기략을 무시로 구사하는 다테 마사무네야말로 마지막 전국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칸토에서 매사냥을 핑계로 대규모 군사연습이라는 무력시위를 보이기도 했던 오고쇼는 챠아 시로지로가 진상한 도미 튀김을 먹고 발병했다. 다음 순서는 죽음을 대비한 행사들이 차례로 진행된다. 우선 무츠의 도쿠간류가 병문안에 나서 진심으로 오고쇼의 질서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긴 사위 타다테루의 실각, 전쟁이 나면 자신을 보좌할 참모 카타쿠라 카게츠나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무츠의 호랑이는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타다테루를 뺀 나머지 아들들을 불러 자신이 이룩한 에도 바쿠후 쇼군이 지배하는 질서유지에 만반의 대비를 하라는 유지를 남긴다. 자신은 비록 무(武)로 천하를 제패했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오직 유가의 장유유서로 대변되는 질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미카와 너구리 선생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선배격에 해당하는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천수를 넘어선 수명과 많은 자손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영주에 대해 쇼군에게 직접 고할 수 있는 언로를 만들어 놓은 것은 탁월했으나, 영주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그리고 수탈 사실을 고한 농민에게는 반역이라는 책임을 물어 책형으로 처벌하라는 결정은 역시나 시대적 한계를 느낄 수 있는 처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순간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던 미카와 너구리 선생은 인생나무라는 비유를 들어가며 드디어 극락왕생의 길에 올랐다.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 씨가 센고쿠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나치게 미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들었다. 제 아무리 천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이에야스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할 수는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신은 요도 부인과 히데요리 모자를 끝까지 살려 주고 싶었으나, 쇼군의 직계 부하들이 그들을 할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생로병사가 모두 신이라는 존재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 천명 의식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바지 사장인 아들 히데타다 대신 실제적인 권력의 중심은 슨푸에 자리잡은 오고쇼 이에야스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천하의 모든 이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오고쇼가 오사카 여름 전투 말미에 엄명을 내려 히데요리 모자를 보호하게 했다면, 그들의 운명이 비극으로 끝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저 후다이 가신들의 뿌리 깊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적대감의 발로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큰 사건이지 않았던가. 히데요리 모자의 죽음은 미카와 너구리 선생 말년을 장식하는 명백한 오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나의 지난 57일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여정은 마무리되었다. 이번 추석 전에 다 읽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아니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작심하고 읽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은 도전이었던 것 같다. 한창 도서관으로 책을 빌리러 다닐 적에 동네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이 책을 읽기 전에 <오다 노부나가>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어젯밤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지막 권을 다 읽기 전에 미리 <오다 노부나가> 1권을 주문했다. 이 시리즈는 달랑(?) 7권이라 그다지 부담이 가지 않을 듯 싶다. 이번 추석 때는 아마도 <오다 노부나가>를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