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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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실존. 삶과 죽음

 

 


인간이 죽음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인간다울 수 있을까. 죽음은 파멸인 동시에 미지의 단계로의 도약이고 성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책을 읽은 여파에서부터 시작된 생각들인 것 같다.

신은 인간에게 생과 사를 함께 선물로 던져주었지만 인간은 두 가지 중 단 한가지에만 집중하고 몰입하는 듯하다. 바로 생. 삶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오로지 살아 있는 순간의 모든 것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 역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며 생의 마지막에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 마지막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거쳐가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 는 신경외과 전문의였던 어느 젊은 의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서른 여섯이라는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어렵게 암투병을 하면서도 레지던트 과정을 완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스스로의 삶의 역사를 남기기를 원했다.

그의 이름은 책의 저자이며 이 책의 주인공인 폴 칼라니티다. 그는 책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유언으로 책을 출간해줄 것을 부탁한다. 미완의 책으로 남게 됐을 폴의 원고는 그의 아내 루시에 의해 정리가 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책은 한 인물인 폴 칼라니티의 생 전반과 그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의사가 되기 전 그는 문학에 뜻을 두기도 했으며, 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진 재능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은 깊이 있는 깊이 있는 관계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사라는 직업만이 내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위로하며, 그들의 암울한 내면과 직면해서 깊이 있게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던 폴 칼라니티의 철학은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있으며 책의 무게감을 진중하게 담아내고 있다.

스스로 암 환자가 된 의사의 입장에서 의사 역시 병에 걸릴 수 있고 마지막에는 죽는다 라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갖게 되는 어떤 환상 같은 것을 바닥에 내려놓게 하는 듯도 하다. 의사 역시 사람이니까.

 

 

 

그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유기체는 죽는다. 이런 식의 표현은 당연한 정의이고 필연적인 경험에 기인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견디는 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이러한 표현을 과연 어떤 태도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는 죽음을 마주한 인간존재로서 마지막까지 실존적 철학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고통과 좌절, 암의 재발 과정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의지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인간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흔들리는 자아를 숨기지 않는다.

 

 

 

죽음과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은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을 중심에 두면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것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가 싶다. 배우자에 대한 연민과 염려,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은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 어떤 상실감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삶을 살아가는 마지막 과정인 죽음은 묘한 두려움이다. 많은 학자들이 절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며 다독이고 용기를 줄지언정 나는 아직도 여전히 두려운 듯하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살다 간 흔적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어느 누군가의 글을 기억한다.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어느 인간의 생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한 사람이었으며 뛰어난 의사였고, 자상한 남편인 동시에 든든한 아버지였던 하나의 생을 정리하는 진지한 열정을,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차분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끝까지 진지하게 생의 마지막을 불태웠던 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실신한 실존주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p64

 

-우리는 엄청난 투쟁과 고통을 딛고 이 세상에 오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토머스 브라운 경-의사의 종교)

-죽음이란 직접 대면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p76

 

 

-삶은 너무나 짧은 ‘잠깐’이기에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맡겨진 역할, 즉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시간과 방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p90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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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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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어떤 각성(覺醒)

 

인간은 신이 허락한 하나의 생을 살아간다. 여기에서 자의든 타의든 신의 계략이든간에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에서 멈추어 설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과거를 돌이켜보고 후회와 반성으로 자신의 자리를 다독이며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한다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지 않은가 싶은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래의 시간과 앞으로 펼쳐질 삶의 모습을 한치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인간은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부류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비현실적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류로 나뉜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시각에서 봤을 때, 보편적이기 보다는 비현실적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정신적으로 트인 사람이고, 육체적으로는 개방적인 사람이며, 종교적으로는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나니 꽤나 뻣뻣해지는 것을 느낀다. 말투도 그렇고, 자판을 두드리는 동시에 무음으로 입속에서만 중얼거리는 이야기도 그렇고 왜이리 삐딱한가. 작품은 접근방법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는 소설이었다.

때로는 현학적인 분위기가 넘쳐나고, 때로는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탐미적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휘감아 도는 듯했다. 때문에 도대체 이 사람 오스카 와일드란 어떤 인간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 도리언 그레이, 헤리경, 바질 홀워드는 사실 모두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는 선과 악 사이에서 도리언 그레이가 되었다가 헤리경이 되기도 하고 바질 홀워드가 되기도 하면서 사람들 가까이 틈을 집요할 정도로 비집고 들어온다.

 

먼저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 도리언 그레이는 미소년으로 등장한다. 그는 선과 악의 개념을 헤리경에 의해 알아가게 되는 인물이다. 불행하게도 선보다는 악의 길로 조금더 가까이 가는 선택을 함으로써 타락한 영혼과 마주하게 되고 이로 인해 흔들리게 된다.

반면 헤리경은 그 성격이 다소 복잡하다. 그는 순수한 청년인 도리언에게 타락의 싹을 심어주는 악의 근원으로 등장하지만, 휘몰아치듯 급변하는 도리언이라는 인물에 비해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조절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저 자신의 철학과 주관을 펼쳐보일뿐 다른 악의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요소를 가진 인물로 보여지기도 한다. 선한 듯 악한 인물인 동시에 악한 듯하면서도 선해보이더란 말이다. 그는 주변인물인 듯하지만 핵심적인 인물로 보이면서, 무엇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도리언 곁에서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며 그를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완성한 화가 바질 홀워드가 있다. 그는 선과 악 두 가지 중에서 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타락의 길로 접어든 도리언에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을 마지막까지 종용하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의도치 않는 죽음을 당한다.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은 사람 도리언 대신 바질이 그려낸 초상화의 얼굴이 추하고 역겹게 변해간다는 이야기는 작품 속 작가의 말처럼 초상화 속 얼굴이 도리언 그레이의 양심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피를 흘리며 교활한 모습으로 늙어가는 초상화의 얼굴과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 과연 도리언의 젊음은 절대적인 표상으로 남게 될 수 있을까.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후회로 초상화의 얼굴을 없애버리려 하는 도리언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일까. 비교적 예측 가능한 결말이긴 하지만 나름 통쾌?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불안했지만 그나마 작가가 내린 마지막 결말이 어쩐지 따뜻한 위로로 다가온다.

 

나르시시즘이 강하게 흘러드는 가운데 이기심과 자만심 분노와 교만,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과욕이 한 사람의 인간과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딴은 종교가 생겨난 그 이후부터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이 신에게 의존하려는 그 까닭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신의 부속물이 아닌 인간 본연의 존재로 살아가고자했던 많은 사람들의 지난한 각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상기하게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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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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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산자의 도리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번 책은 ‘인어가 잠든 집’이었다. 분홍빛의 파스텔 빛의 겉표지에 흰 색으로 편집된 글씨체가 주는 인상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책은 제목에서부터 상징성이 엿보인다. 인어가 잠든 집에 등장하는 인어는 어떤 존재일까. 인어라는 단어만 들어봐도 우리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인어공주 이야기는 슬픈 사랑 이야기다. 자신을 희생해서 사랑을 얻고자 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공주는 물거품으로 사라진다는 이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단순히 걷지 못하는 의미에서 두 다리가 붙어 태어난다는 인어 인간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어공주 이야기에서처럼 그 바탕에 깔린 몇가지 생각할 요소를 떠올리면서 이 작품을 읽어봐도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처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희생이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누구나 예상했던 비극적 결말(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할 것이다)임에도 불구하고, 인어공주 자신이 직접 원해서 선택하는 자기희생이 등장한다. 인어가 잠든 집에서 인어공주와 동일선상에서 들여다보고 분석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뇌사 상태이지만 공식적인 뇌사판정을 거부한 탓에 그저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딸 미즈호일까. 얼핏보면 걸을 수 없는 상태로 누워만 있으면서 기계의 힘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는 미즈호가 인어로 상징화 되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작품에서 인어를 상징하는 인물은 바로 미즈호의 엄마인 가오루코라고 할 수 있다. 가오루코는 작은 희망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딸을 지켜내려고 하는 적극적이면서도 강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모든 사람들의 불신과 외면 앞에서도 그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가오루코의 이야기의 끝을 인어공주의 이야기와 어떻게 비교하며 들여다보면 좋을까.

 

수영장에 빠진 딸은 의식이 없다. 의사는 뇌사 판정과 장기이식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심장이 뛰고 있기에 분명 살아있다. 그러나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에 뇌사판정을 내릴 수 있고, 장기이식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는 논리 앞에서 부모는 흔들린다. 작가는 장기기증을 하기 위해 뇌사의 개념이 생겼다는 의학적인 기준과 그 좁은 잣대로 인해 부딪히는 많은 의학적, 법적인 모순을 작품을 통해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고발하는 듯 보인다.

누가 감히 죽음을 쉽게 인정할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말이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작가는 책을 읽는 이들에게 죽음의 정의를 언제, 어떤 방법으로 내려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어려운 주제를 내민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에게는 이 주제가 풀리지 않는 무거운 숙제처럼 다가올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로 등장하는 인물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집착을 넘어 히스테리의 성향을 보이는 이 어머니는 특별나거나 이상한 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보통의 아주 인간적인 어머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비이성적인 성향으로 몰아가게 된다.

여기 현실의 복잡한 상황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그녀의 내면을 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딸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하면서도 장기이식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가려는 한 가족을 위해 자원봉사를 시작한다. 작가는 이 어머니의 행동을 모순화시키고 있다.

모든 악조건과 싸워가며 딸을 지켜내려는 어머니와 자국내(일본) 장기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전혀 다른 입장의 인물로 바꿔 등장시키는 작가의 의도는 단순하지 않다. 작가는 작품에서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판단하는 부분을 거론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순적인 주인공의 행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 본성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많은 감정선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한다.

 

장기이식이 필요한 한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고 했을 때, 그 이후에 이 어머니의 행동에 변화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작중 어머니라는 인물은 그 이후에도 딸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이어간다. 꿈처럼 환상처럼 그녀의 딸 미즈호가 작별을 고하고 떠나갈 때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집착은 정리되지 못한다.

 

인간의 생사는 신의 영역이다. 그런데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감히 인간은 그 신의 영역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호흡을 관장하는 기계를 인체에 삽입해 거추장스러운 인공호흡기 없이 호흡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신경을 인위적으로 자극해서 자의식 없이 사지를 자극해 움직이게 하는 시스템등을 소개하는 부분은, 놀랍기도 하고 딴은 매우 자극적이기도 한 대목이다.

 

딴은 사랑과 집착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사랑과 집착. 이 두 가지 감정을 반듯하게 선을 그어 나눌 수 있을까. 살짝이라도 벗어날라치면 사랑이 아닌 집착이 되고 마는 불안정한 감정들의 경계를 두고 어느 현자가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작가가 말했듯이 모든 이들의 관점을 다르다는 데에서 위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말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 안에서 중간자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즉 어떤 작가적 의도가 작품 안에 숨은그림처럼 깔려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히가시노 그는 끊임없이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는 듯했다.

 

자, 이쯤해서 인어공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서 사라져버린다. 슬픈 결말이다. 인어가 잠든 집의 결말은 어떨까. 어느 한 지점에서든지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은 두 이야기가 같다. 운명을 거슬러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선택을 했던 두 주인공은 결국 한쪽은 물거품이 되고, 한쪽은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스스로를 옥죄이던 뇌사판정을 인정하고 장기이식에 동의하게 된다. 사랑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성애라는 거대한 감성에 대한 많은 것을 생각해본 시간이었던 것 같다.

 

모든 종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은 산자의 슬픔이 부각될 뿐이지, 정작 떠나간 이들에게는 편안과 안식이 가득하리라 이야기한다. 집요하리만큼 상처를 남긴 생과 사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 한순간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들이다.

죽은 이를 편안하게 죽음 안에 머물게 해주는 것도 산자의 도리라는 생각 말이다.

비가 내리는 중이다. 죽음은.... 모든 죽음은 힘든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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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혁명적인 글쓰기 방법론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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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멈추지 말고 나아가기를...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 책은 200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나는 이 책을 2000년 10월 15일 구입했었다. 책을 구입할 때마다 날짜를 기록하는 습관으로 인해 얻는 소소한 정보다. 그런데 흐릿한 그 기억으로는 아마 당시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참 연애사업에 몰입했었으니 말이다. 한권의 책으로 인해 까마득히 지우고 살았던 시절들을 소환한다. 희망으로 부풀었던 기억과, 초라했던 기억과, 화사했던 기억과, 암흑같이 어두웠던 기억까지 이제는 덤덤하게 불러낼 수 있음에 감사한 일이다.

 

새로 글쓰기에 관련해 신청한 책 중 두 번째 책이 바로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이었다. 사실 낡은 책꽂이에 이 책이 있다는 걸 기억한 것은 책을 신청하고 난 이후였다. 서글픈 현실이다. 여기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책꽂이에 이중 삼중으로 올려진 책들을 밀어내고 오래전에 구입한 초판의 책을 끄집어냈다. 이런 일은 가끔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자주 일어나는가 싶다. 같은 책이 두 권.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개정 전후로 편집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씨 크기라든지, 문장 표현이 조금 바뀐 부분도 있었다. 포장이 살짝 바뀌었을 뿐, 내용은 여전히 매력적인 끌림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는 더 깊이 생각하고, 몰입하며, 침잠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을 제안한다. 글을 쓰는 목적에만 휘둘리는 냉냉한 인간이 아닌, 따뜻한 가슴과 여유로움의 시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작하라고 한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이 이웃들 속에는 글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비평가, 그들을 둘러싼 또 다른 다양한 이웃들까지.

 

작가는 챕터마다 짧은 주제로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시작과 마지막이 되는 하나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처음인 동시에 다시 끝이 될 수 있는 이 정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기에서는 글을 마주하며 세상에 공존하는 수많은 작가 그리고 독자이 갖는 편견, 선입견, 다시 다잡아야 하는 초심으로의 마음가짐과 자신을 지켜주는 온갖 생각들이 한꺼번에 준비되어 있는 그 정점이다. 책은 이 정점을 온전하게 흡수하고 그 이상의 세계로 뛰어넘으라한다.

또한 그녀 나탈리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수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녀는 그저 한 장의 그림지도를 보여줄 뿐이다. 지도를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그녀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글을 쓰는 일은 고된 작업이다, 라고 했던 나탈리의 말이 얕은 회환으로 거칠게 불거진 마음을 툭 건드린다. 꾹꾹 눌러 참았던 것들, 혼자 버티던 것들, 외면하고 있던 것들이 순간 화르르 바닥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 순간을 책을 읽으면서 이따금 대면하게 된다.

가능하면 객관적 시각을 지키며 냉정하게 책을 읽으려고 하는 내 의지가 살짝 바닥으로 기우는 순간이다. 그리나 이제는 모든 것으로부터 가만히 웃으며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나탈리는 절대 도망치거나 외면하지 말고 당당하게 마주보라 했다. 어떻게든 쓰고 또 쓰도 계속 쓰라는 일침을 가한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도 하고, 딴은 시골집을 지키며 나와 우리를 기다리는 우직한 은행나무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힘을 내뿜는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늘 불안해하고 낙담하며 슬퍼하고 좌절한다. 인간이 완벽한 존재라면 어쩌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을 노래하는 글이란 것이 이토록 오래도록 개인의 거친 삶 곁에서 자리를 지켜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흔들리기 때문에 불안한 모든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버티고,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스스로 깊은 내면의 얼굴에게 물어보게 된다.

 

한권의 책을 완독하고 얻은 결론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이가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뒷걸음치지 말고, 깊은 곳에 숨은 자신의 내면과 조우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써라. 지치지 말고 써라...말하는 나탈리의 말을 기억하자.

 

이제 호명을 할 차례다.

글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 호언하던 옛시절 동기들의 잊힌 이름들과 그 시린 가슴의 멍울을

또 시대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젊은 문청인들의 이름들까지

글은 언제까지나 함께 해줄 것이다

그 열정일랑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오래도록 타들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 라고만 하자. 그저 많은 글을 쓰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p33

 

-글쓰기는 재갈을 물리지 않은 야성이 숨 쉬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며 오직 그 순간 글 쓰는 사람과 다른 모든 것과의 연결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글쓰기 훈련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논리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게 된다. ......

..... 제발 어떤 기준에 맞춰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것을 잡아라. 손을 멈추지 말고 계속 쓰기만 하가. p35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p71

 

-듣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이 더 깊이 들으려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이 가는 길을 받아들일 때 그 사물에 대한 진실한 글이 태어난다. p103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이를 수 있는지 밝혀 주는 작품을 읽고 또 읽어라.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키우고 다정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거듭 체험하게 된다.p146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그냥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천국이니까.p184

 

-글쓰기에서도 커다란 들판이 필요하다. 너무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지 말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아무 이름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길을 헤맨 다음에라야 당신은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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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글쓰기 수업
배학수 지음 / 메이트북스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퇴근길 글쓰기 수업

-형식과 글 그리고 자기검열.

 

글쓰기에 관련된 책을 두어 권 신청했다. 그 중 한권이 ‘퇴근길 글쓰기 수업’이다.

이를테면 살아가는데 있어 중간점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만들고 창작하는 행위에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자기검열’이라고 했다. 타인에 의한 비판보다도 더 냉혹한 비판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왔다. 불행하게도 아니 솔직하게도 나는 늘 그 자기검열에서 패배하곤 했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자유롭게 표현하고 쓰는 것을 즐기다보니 이제는 오히려 자기검열에서 느슨해지는 감을 느끼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즐기면서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자기검열의 끈을 다시금 팽팽히 조여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은가 고민에 빠진다.

 

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잘 쓴 글과 좋은 글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를 나는 교수님들한테 ‘감동의 유무’라고 배웠다. 형식에 맞게 쓰여진 좋은 글이 감동의 요소까지 함께 갖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형식과 감동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라 한다면 나는 과감하게 감동의 요소를 선택할 의지가 있다. 형식에는 다소 맞지 않는다하더라도, 무언가 아련하고 깊게 와닿는 글이 더 좋은 글이라는 선택을 다시한번 똑같이 고수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문학작품만을 텍스트로 삼아 공부하던 개인의 낡은 신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책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퇴근길 글쓰기 수업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게 좋을까. 우선 저자는 자기만의 글쓰기 방법을 독자들에게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글의 구성과 형식, 그리고 현실감 있는 표현들을 이용해 각각의 글을 각각의 형식에 맞게 쓰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독자들에게 잘 쓴 글을 구분해서 바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저자가 정성스럽게 편집한 예시문장들은 집중해서 읽어볼만하다. 어쩌면 이 책은 다양한 예시문장을 통해 부연설명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독자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더불어 책의 가치를 끌어올린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예시 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는 우선 좋은 글의 기본이 되는 ‘좋은 문장과 문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과 문단을 단단히 다듬어가면서 우리의 시선을 다음단계로 이끄는데, 바로 방대한 에세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그 부분이다.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에세이의 종류는 말 그대로 다양하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에세이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일반적인 에세이의 개념으로만 생각하면서 접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저자는 설명문 역시 에세이에 포함시키고 있었고, 설득하는 글, 비평문 등. 우리가 표현하는 다양한 장르의 서식을 포함한 글을 모두 에세이라 총칭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스토리를 강조하는 글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책을 읽으면서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우선 긍정적 시각에서 보았던 저자의 개성 넘치는 표현에 속상하게도 정말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것을 고백한다. ‘낚시바늘 문장’과 같은 표현이라든지, ‘훅 문장’ 같은 표현이 거슬렸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무엇보다 책이 갖는 문제점은 너무 조직적이고 너무 세밀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각각의 문장마다 쓰는 방법을 논함에 있어 저자는 늘 순서를 정하고 도식화해서 설명한다. 어떤 글을 쓰기 위한 요소로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이다. 문제는 이런 도식화에 의한 설명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데 있다. 설명문, 비평문, 혹은 논설문? 영화 비평문, 무용 비평문.... 에세이의 영역에 이렇게나 많은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는 글들이 포함되고 있는데, 각각의 글들마다 써야 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나열하다보니 자꾸만 반복이 되고, 중복이 되는 것 같아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글은 모든 것들을 도식화 내지는 구조화해서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부분에서는 저자와 생각이 좀 다른 듯하다.

 

구성면에서도 한가지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다른 주제가 튀어나와서 글의 전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쩐지 전체적으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뭐랄까. 책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이야기하다보니, 글의 흐름이 자주 끊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각각의 파트에서 저자의 이야기는 도움이 될 만한 포인트가 많이 존재한다.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다. 더욱이 앞에서도 언급한바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예시문은 그 글 자체로 읽는 재미와 가치가 있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을 간과하지는 말자.

 

블로그 활동을 하는 지인이 글쓰기 강의를 하며 구체적으로 소설 강의계획서와 그 내용을 블로그에 공유를 했었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농담을 주워섬기며 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예전에는 과제로 했었는데 이젠 감이 떨어졌어요... 이제는 그저.. 이렇게 그냥저냥 살아요... 지금은 하늘에서 그냥 수북하게 감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라고.

그런데 감은커녕 작은 땡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게 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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