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떠났을까? - 알렉시우스 1세 vs 고드프루아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20
김차규 지음, 박상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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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는 물론 세계사를 배울때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시대적 구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각 시대로의 변화를 초래한 사건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군 전쟁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십자군 원정에 깊이 관련된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법정에 세운다는 것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십자군 전쟁은1095년부터 1270년까지 크리스트교를 믿었던 중세 서유럽의 국가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고자 이술람교도들과 벌인 대규모 군사원정을 말하는 것으로 무려 8차례 일어났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십자군 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이 단지 1099~1187년, 1229~1244년 뿐이였다고 하니 그 기간만을 보자면 십자군 전쟁은 득보다 실이 더 많이 보이지만 십자군 전쟁이 서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보다 더 클 것이다.

 

셀주크 튀르크가 크리스트교인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음 신자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것을 막게 된 것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원인이며, 이에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는 로마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감추어진 진실은 여러가지 있다. 동방 정교회를 정복해서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교황의 의도,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하는 장남 이외의 아들들을 재물욕과 함께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어쩌면 8차에 걸친 대대적인 출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출병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황권이 실추되고, 각 지역이 왕권이 오히려 높아지게 된다. 또한 약탈을 통해서 들어 온 문물들이 근대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주게 됨으로써 서구 중세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1차 십자군의 지휘관이였던 고드프루아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되찾은 예루살렘을 알렉시우스 1세 자신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예루살렘 왕국을 세워서 스스로 군주가 되었기에 이번 소송을 통해서 그의 잘못을 밝히고 자신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자 함이 청구 목적이라고 알렉시우스 1세는 말한다.

 

 

십자군의 출병이 애초에 그속에 개인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 과정에 일어난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서 알렉시우스 1세 역시도 십자군이 위험이 처했을때 도움을 주지 않은 점이나 고드프루아가 알렉시우스에게 예루살렘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기에 예루살렘 반환을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법정의 판결인 것이다. 알렉시우스 1세에게는 안타까운 판결이겠지만 원래 예루살렘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십자군이지 그속의 개개인이 아니니 어쩔수 없는 주장이 된 셈이다.

 

다만 법정의 판결문에 적힌 내용처럼 '비잔티움 제국이 오랜 세우러 동안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고, 총대주교구를 세워서 위상을 높인 것은 인정하는 바이니' 이로써 예루살렘이 가진 본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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