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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 강의 푸가
안 들라플로트 메드비 지음, 정기헌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9월
평점 :
프랑스 소설인데도 전체적인 모티브나 분위기가 너무 나의 정서와 잘 맞는 것 같다. 요즘은 아무리 남자가 육아와 가사에 참여하고는 있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그 두가지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실제로 육아를 위해 부부중 누군가가 전담 역할을 해야할 때 당연히 그 몫은 아빠가 아닌 엄마인 경우가 많다.
소설 속의 클로틸은 10여 년간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의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다 쌍둥이들이 입학하게 되면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자 마음 먹게 된다. 더이상 애들에게만 매여 있지도 않아도 괜찮을 자신만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아마도 집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느낌이다. 나중에 애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지 하고 말이다. 실제 그렇게 하는지 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날을 꿈꾸며 힘들고 지친 오늘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긴 시간을 엄마들은 인내하는 것이다.
"정신없이 어질러진 집 치우면서 사는 것 이젠 못하겠어. 열심히 치워 봐야 고개만 돌리면 금세 또 엉망이 돼 있는 걸. 마치 집 안 곳곳에 숨어 잇던 혼돈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아. 그런 날들의 연속이야.....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테야. 남이 시키는 일 말고. 그런데 날 봐. 나한테 누가 일을 주기나 하겠어?"
감정을 엄마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엄마가 세상의 전지전능한 신인것 마냥 자신들 앞에 닥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던 아이들은 이젠 더 이상 없다. 아이들은 점차 엄마의 품을 떠나 또래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사회적 지위를 굳히기 위해 더욱 바빠질 뿐이다.
클로틸 역시 두 쌍둥이를 보내고선 후련함과 동시에 약간의 허무감을 느끼는 이유다. 아마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 대목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자신의 제2의 인생을 위한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클로틸은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바로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 준 딸 마들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라진 딸을 찾아 퀴르 강가를 애완견 보와 함께 헤매다 강 건너편에서 마들렌을 발견한다. 그저 할아버지댁에 가기 위해 학교를 나왔다는 아이의 말에 그녀는 일단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지만, 그 순간 자신이 목소리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목소리를 잃고 회복하기 위해서 치료를 받으러 다니다, 말은 못하지만 오히려 노래는 부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전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이다. 평소의 모습을 잃음으로써 그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그녀 자신의 운명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클로틸이 음악과 노래에서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고 더 나은 모습을 향해 가는 일들에 주변 사람들은 달라진다. 그녀의 남편 벵상은 평소처럼 그녀가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그 일상이 깨진 것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친구 알릭스는 콜로틸의 행복한 삶을 통해서 자신이 느끼던 대리만족적 행복이 깨진 것이 싫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아틸레르는 딸이 목소리 잃고 목소리의 회복에 집중하지 않은채 오히려 노래를 더 부르는 것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서야 찾은 자신의 인생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예전의 클로틸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녀는 이젠 '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여성은 항상 두 배의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p.211)
처음엔 잘 견디는 것 같던 세 사람은 그녀가 노래에 집중하면 집중할 수록 더욱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고, 그녀의 큰 아들은 이전과는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에서 그 간격이 커지면 커질 수록 엄마를 더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들과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냉담함 속에서 더욱 힘들다. 왜 엄마는 행복해져서는 안되는가 말이다. 왜 엄마는 가족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절대진리인 마냥 그렇게 계속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약간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이제 좀 벗어 버리는 게 어때! 네가 노래를 해도 주변 사람들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무언가를 얻으면 얻었지. 아직도 모르겠어? 너를 그토록 의심하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 그 '저음' 은 바로 네가 평소에 말할 때 사용하는 그 목소리야!"(p.137)
그녀가 자신의 소신대로 자신의 삶을 살기로 하고 아마도 평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용기를 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자신의 꿈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순간 온 우주가 자신을 돕는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도 점차 그녀의 달라지는 모습들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엔 그녀의 그 모습들이 '예전의 클로틸'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본인 한명이 변한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자신의 삶으로 나머지 인생은 분명 이전과는 달라진다. 인생의 어느 순간 터닝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그 계기가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처음엔 나의 달라진 모습에 나의 가족과 친구들은 거부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의 바람대로 산다면 어느 순간 정말로 난 사라지고 없다. 내가 없다면 결국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