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open한지 넉 달째 접어들고 있다.  아직은 어쩌다 한 건씩 들어오는 케이스와 전에 있던 회사에서 지분매도로 매달 나오는 약간의 돈으로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버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회사로써의 어려움도 그렇고, 역시 케이스 수임에 아주 민감해지는데, 이는 빨리 털어내야 할 부분이다. 

 

어제 저녁에 상담문의가 들어왔던, assess하기로는 수임이 거의 확실한 케이스였는데 여기보다 3시간이 빠른 동부에 있는 사람이라서 급박한 사정에 다른 곳에 의뢰를 했다는 이메일을 오전에 받고나니 기분이 좀 그랬다.  급히 처리할 일들이 산적해 있어,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점심까지 바쁘게 보내고 나니, 다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깝다....-_-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하건만 역시 범인인 것이다, 나는. 

 

그래도 좋은 생각을 하자면 상담은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인데, 수임으로 연결이 되지 않더라도 비교적 젊은 커리어에 속하는 나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으면 되니까, 천천히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거라고 나를 위로해 본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남을 위해 공부하고 이를 소화하여 케이스를 처리해 주는 것인데,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일정한 수준의 의뢰/액수 수준의 일이라면 매일 바쁘게 뛰지 않아도 비교적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다.  소박하게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면서 그저 여행하고 책을 읽고 운동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책읽기를 얘기하니 요즘의 근황도 빼놓을 수가 없다.  책읽기는 늘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는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주변에 나눌 사람이 거의 없기에 - 사실 나같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것도 이상한 것이겠지만 - 책읽는 행위 그 자체가 너무 외롭게 느껴진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내 서재에 방문하시는 분들이 늘고, 심지어는 글도 남겨주시는 분들이 생겼다.  나도 그분들의 서재를 들락거리면서 많이 배우고.  이런 온라인상의 '교류'때문인지, 이 외로움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책읽기를 하고 책수집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새삼 느껴지기에 더욱 그렇다. 

 

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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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5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6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12-06-0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ㅡ 처음 인사드리네요,
저도 책읽는것 ,,참 좋아하는데,,ㅎㅎ
요즘은 살짝반항기 같지만요,,반가워요,

transient-guest 2012-06-06 00: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종종 그럴때가 있는데요, 만화책이나 눈과 머리에 쉬운책을 읽어서 다스려요.

달사르 2012-06-05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점점 보기가 힘들어지는데요. 여기 알라딘에 와서 저도 트란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온라인상의 이런 '교류'도 참 멋진 거 같애요. 앞으로 책이야기, 책수집 이야기, 많이 해요~

transient-guest 2012-06-06 00: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같은 경우는 부모님과 누나를 빼면 주변에 책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요. 좁은 인간관계이기는 하지만서도. 앞으로도 얘기나누자고요.ㅋ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괴환상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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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물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답게 추리소설 역시 정통 서구권의 세례를 받은 일본의 추리소설은 매우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발달하여 현재에도 꾸준히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장르도 다양해져서 일반적인 창작부터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종류, 기담 같은 작품들까지 정말 많은 작품군이 나오고 있는, 어떻게 보면 부럽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정통 추리물의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왜 그런지 일본의 추리소설은 뭔가 surreal하고 기괴하다.  란포의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특히 그러한데, 마치 이토 준지의 만화를 소설로 읽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전단편집 3에 수록된 작품들은 사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추리'가 부족하다.  그저 담담한 작가의 필체로 기담괴담을 나레이트 하고 있다는 편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잡다한 글들은 모았기에 어떤 작품에서는 습작의 냄새가 나기도 하고, 아예 에드거 엘런 포를 모방하여 각색한 것처럼 보이는 글들도 여러 번 눈에 띄었다. 

 

이로써 전단편집 세 권을 모두 읽었는데, 이 역시 나날이 늘어가는 나의 추리소설 문고에 매우 valuable한 addition이 될 것이다.  이렇게 early days의 거장들이 쓴 작품들은 섭렵하고 나면, 좀더 현대로 와서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을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추리소설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있지만, 굳이 토를 달자면 '추리'보다는 '첩보'물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나의 좁은 소견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접해본 얼마 안되는 작품들은 모두 그랬던 것 같다.

 

전단편집 3부작은 구매하여 소장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슬그머니 절판되어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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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6-0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 소설은 괴기물이 많죠.정통추리물로는 '이전동화'가 좋더군요.괴기물 중엔 장편으로 <외딴섬의 마인>이 으시시해서 읽을만했어요.

transient-guest 2012-06-06 00:48   좋아요 0 | URL
오호 구해보고 싶네요. 그러고보니 단편집을 위주로 읽은 것 같아요. '음울한 짐승'인가, 동서에서 나온. 정말이지 포를 닮은 것 같네요, 란포는요.

노이에자이트 2012-06-06 11:39   좋아요 0 | URL
란포 전단편집 2권에 '음울한 짐승'이 실려있고, 1권에 '이전짜리 동전'이 실려있어요.

<외딴섬의 마인>은 동서문화사에서 <외딴섬 악마>라는 제목으로 나왔군요.

transient-guest 2012-06-07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트님:

맞아요.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더라구요. 제가 동서미스터리문고로 먼저 '음울한 짐승'과 '외딴섬 악마'를 읽었거든요. 그래도 뭐 전단편집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3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네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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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출구심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은 역시 면세점과 서점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한국돈이 좀 남아 있길래 환전하기도 뭐하고해서 - 는 핑계 - 근처 서점으로 달려갔다.  무겁기 짝이 없는 hand carry였지만, 관물대를 통과한 터라 비행기에 못 가지고 타게 될 리는 없다는 자신감에 남은 공간만큼을 더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기왕지사 올 때 이렇게 사가지 않으면 다시금 금단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훨씬 더 비싼 값을 주고 사버릴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공항서점답게 찾는 책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누락시켰던 제레미 리프킨의 신작과 그전부터 읽을까 말까 망설이던 도킨스, 그리고 다른 MISC한 몇 권을 들고 나오려다가 마침 하루키의 잡문집이 눈에 뜨길래 냉큼 집어들었다, 그의 다른 작품 하나와 함께.  hand carry가방에 낑겨 넣으려다가 포기하고 notebook PC백에 우겨넣고서 비행기를 타자마자 펴들게 되었다.  10시간은 날아갈 터,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야 그중 반도 채 안될터, 눈에 확 들어오길 바라면서 읽어내려갔는데... 이 책...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바로 왔다.

 

말 그대로 하루키의 잡문집인 이 책에는 다양한 그의 과거 이야기, jazz, 살던 이야기, 특정 작품의 배경 내지는 창작에 관한 이야기 등 정말이지 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미 특정 이야기가 반복됨을 미리 서두에 알려주는 친절함까지 - 여러모로 근좌에 읽었던 모 교수의 책과 비교된다 - 하루키의 전작행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책을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만난것은 책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구는 행운! 

 

머리아픈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그의 이야기들일 뿐이였기에 비행기에서 읽기도 딱 좋았고, 하루키라는 사람을 조금 더 알게 해준 책이 된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출판된 책이기에 오래된 이야기와 함께 근래의 side story들도 엿볼 수 있는 이 책,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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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0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길 잘했다..에 한 표. ^^
저는 하루키의 지인들 이야기도 좋았구요. 무엇보다 하루키의 심성을 알게 되어 참 좋았어요. 이런 사람이니 이렇듯 멋진 소설을 쓰는구나, 싶어서요.

transient-guest 2012-06-06 00:50   좋아요 0 | URL
그쵸? 속이 꽉 찬, 그러나 결코 좁지 않은 그런 작가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일본현대문학이려니 했는데, 읽을수록, 알아갈수록 깊이가 있네요.
 

장시간 비행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하고 정신이 좀 없지만, 내일은 또 일찍 사무실에 나가서 미팅 준비도 하고 나갈 일처리도 해야한다.  안산다고 그렇게 해놓고도, 이번에도 역시 잔뜩 싸들고 왔다.

 

역시 자리가 없어서 괴도신사 뤼팽 시리즈와 이순신전집은 못 들고 왔다.  그래도 어림잡아 5-50권은 됨직하다.  한동안은 책걱정은 없겠다 싶어 흐뭇함...

 

그런데...정말 난 미친건가????????  세관통과야 책이 관세대상이 아니라서 문제가 없었지만, 항상 수하물 부칠때, 찾을때, 그리고 hand carry의 무게가 20kg가 훌쩍 넘어가서 들고다니느라 고생하면서도 이걸 포기할 수 없으니 말이다.

 

암튼 이제 일도 열심히 운동도 열심히 독서도 리뷰도 열심히...다시 나의 생활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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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2-06-04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책 주문 폭발한 제 카드내역을 실물로 보는 것 같은 사진이네요 ㅎ

transient-guest 2012-06-05 00:04   좋아요 0 | URL
ㅎㅎ 안녕하세요.
참 많이도 사들고 왔네요.

이진 2012-06-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외국에 사시는 거예요? 익숙한 책들이 군데군데 보여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12-06-05 00:04   좋아요 0 | URL
네 미국에 있습니다. 들고 오느라 고생했으니 천천히 잘 즐겨야죠.

다락방 2012-06-0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더미를 보자마자 저걸 대체 어떻게 들고 다니나 싶어요. 정말 고생하실 듯. ㅎㅎ 저는 일전에 회사로 율리시스 주문했다가 집으로 그거 한 권 들고가는데 너무 힘들어서 토할뻔 했거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transient-guest 2012-06-06 00:52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는 정말 크고 무겁죠, 거의 성서같다는ㅎ. 들고오느라 꽤 고생했어요. 손톱도 다치고. 그래도 읽을게 많아져서 좋네요. 조이스는 대학때 더블리너스로 처음 접했는데, 한창 Ireland에 빠져있을 무렵이었죠. 마이클 콜린스로 졸업논문 써낸게 기억이 나네요.

북극곰 2012-06-0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뿌듯할 그 기분이 이해가 갑니다. 하하하.

transient-guest 2012-06-06 00:53   좋아요 0 | URL
ㅋㅋ 매우 뿌듯해요. 늘어가는 책을 볼 때마다.

달사르 2012-06-0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도착하셨군요!
팔은 아팠겠지만 지금 얼마나 뿌듯하실지요. 앞으로 한 권씩 야곰야곰. ^^

transient-guest 2012-06-06 00:53   좋아요 0 | URL
넵. 천천히 아껴가면서 읽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너무 좋아했던 형이 한분 있었다.  형이 우리학교에 어학연수를 온 것이 계기가 되어,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내가 한국에 올때마다 형을 만나곤 했었다.  형은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다양하고, 가끔은 괴짜같은 방식으로 이를 풀어내도록 도와주곤 했었다.  98-9년인가부터 4-5년 연락이 끊겼다가, 형과 같은 학교 출신의 지인에게 형의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하게 되었었다.  그때 난 한창 로스쿨에서 '피똥'을싸며 고생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형은 그새 자기의 꿈을 이루어 방송국 PD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벌써 불멸의 이순신 같은 대작의 조연출을 맡고 있는. 

 

2004년 여름이었나?  한국에 있는 로펌에서 인턴쉽을 하면서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때라, 두어달을 역삼동에 있는 작은 원룸에서 지낼때였는데, 그 바쁜 와중에도 형은 시간을 내서 나를 만나주곤 했었다.  그때 형과 마지막으로 했던 술자리에서 형은 당시 강한척을 하면서, 속을 닫고 살아가던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 같다.  압구정동에 있었던, 로데오 거리 어디엔가 세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의 바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그리고 일년이 지나서 나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본다.  나에게는 시험과 취업 사이의 공백기간이었던 그 무렵, 형은 또다시 화려하게 한 계단 더 자기의 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공모한 영화제작에 감독으로 뽑혔던 것이다.  형이 항상 꿈꾸었던, 프랑스 영화처럼 아름다운 영화 시나리오를 만들고, 형은 스탭과 배우를 섭외하고 그 여름/가을에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영화내용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 내가 그 영화 번역을 도와주었기 때문인데, 형은 갖 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영화가 완성되면 이미 아시아권하고 동구권에 배급이 되기로 했으니까, 네가 시나리오 번역도 도와주고, copyright 자문도 해주라.  이거 잘 되면 계속 entertainment쪽 일도 할 수 있을거야'라면서.

 

내가 본, 지금도 속속들이 내용을 기억하는, 그리고 주연배우들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하는 이 영화.  '피아노 포르테'는 그러나 작품화되지 못했다. 

 

당시 방송국에는, 어느 직장이나 그렇지만, 심한 파벌싸움, 그리고 언제나 있는, 밑에 사람을 밟는 상사... 그런것들이 있었나부다.  그런데 하필 이런 자들이 형을 방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창 영화를 찍어가고 있는데, budget를 cut해버린것.  당시 형은 사비를 털어가면서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budget cut이 나오자, 동분서주하면서 외부투자까지 유치를 했는데, 이걸 그 상사가 veto한 것이다.  역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배우섭외와 맞물려 소속사로부터 무언가를 받은 정황이 유추된다. 

 

정말이지 순수했던 형의 마음은 다년간의 방송국 생활 - 거기는 정말 험한 곳이기도 하지 않은가 - 에도 그런 일에 무디어지기엔 너무도 여렸던 것 같다.  계속되는 압력, 터무니없이 낮아진 budget, 내 기억에는 약 3-40%로 깎인, 으로 대충 영화를 하나 만들어 버리라는, 그리고 데리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자기 자식같은 시나리오를 깎아내고 떨어내라는, 이미 지칠대로 치쳤던 형의 마음은 이를 견디어 내지 못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나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해 가을 번역된 시나리오를 형에게 보내주고나서 수 개월 후.  신문에 'xxx PD' 자살미수로 중태라는 글이 뜬 것이다.  유서를 보면 심각한 심리적-정신적 공황상태였다고 한다.  형의 친동생 말에 의하면 그 유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형을 방해했는지도 나와있다고 한다.  난 아직 그 유서를 보지 못했지만, 작은 힘이나마 생기면 꼭 보았으면 한다.  꼭. 

 

아산병원에서 내가 본 형의 모습은 너무 불쌍했다.  전두엽이 상해서 튜브를 끼고 도우미 아주머니의 손으로 하루에 몇 번씩 자리를 바꾸어가며 누워있는 형의 모습에는 고작 몇 달전만에도 의욕에 넘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그리고 언제나,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기울여 들어주던 형의 잔상만 남아 있었다. 

 

그후에도 가끔 난 형의 꿈을 꾼다.  망가진 몸의 겉모습은 반 식물인간 상태이지만, 이 몸에 trap된 형의 정신을 만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꿈에서 형은 항상 생전의 모습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기적같은 일이지만, 손상된 전두엽이 마치 끊어진 전기회로가 갑자기 다시 connect되듯이 돌아오기도 한다고 하는데, 형의 몸이 그렇게 회복되었으면..

 

정말이지 오랫만에 본 '고즈넉하다'는 표현을 보니 형이 생각이 났다.  형의 시나리오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말인데, 번역하느라 꽤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람.  형이 보고 싶다.

 

형이라면 지난 4년간 이루어진 총체적인 국부의 수탈과 5류인들의 발호, 그리고 이제서야 터져나오고 있는 방송국 직원들의 항의파업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아니, 형도 거기에 동참하였거나, 이미 방송국을 떠나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창때 꿈꾸던 유학 - 내가 있는 곳에 와서 같이 공부하고 일하고 술마시고 토론하면서 한 시절을 보내자던 - 생활중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 내가 했던 말이라고 고작 '형 내가 밥주는거랑 잠은 재워줄께.  근데, 담배는 꼭 나가서 피워야 한다...'였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왠지 슬프다.

 

(1)

  • 고즈넉하다[고즈너카다]

    [형용사]

    • 1.고요하고 아늑하다.
    • 2.말없이 다소곳하거나 잠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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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0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마음이 다 아프네요. 형의 꿈이 전두엽을 떠나 어느 누구의 꿈에 닿아 있을까요..
'고즈넉하다'란 단어는 형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을 거에요. 아주 고즈넉하게 말이죠.

transient-guest 2012-06-01 21:13   좋아요 0 | URL
고즈넉하게 저를 바라보면서 가끔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해요. 우리 젊던 시절의 그 마음 그대로, 그 다짐 그대로 살고 있냐고. 아우.. 눈물이 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