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2017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걷는다. 어깨는 약간 움츠러들었고, 나이가 들어 예전보다는 보폭이 줄고 약간은 조심스러워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목표지점을 향해서 정확히 나아가는,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의 걸음걸이다.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가 다시 돌아와 만든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영화가 끝난 후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의 걸음이다.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많이 걷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벗겨진 머리에 비니를 쓰고, 늘 입는 점퍼를 입고 그는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고(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력서를 돌리기 위해 돌아다니고),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간다. 그는 그렇게 움직여야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목수로 살아온 오랜세월,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그의 몸에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관공서의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들이다. 전화로 이루어지는 수급 자격심사, 인터넷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 꼼짝없이 앉아서 들어야하는 의미없는 이력서 작성 강의.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다니엘이 관공서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항의문구를 쓰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감동을 준다. 그것은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은 흥미롭다. 영화는 암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전화 통화로 시작하는데, 이 통화는 꽤 길게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이루어지는 이 암전 속의 통화는 꼼짝없이 어둠속에서 그 내용에 귀기울여야하는 관객에게 그 통화의 내용을 주목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떤 답답하다는 느낌을 시각적으로도 제공하는데, 이는 그 통화의 당사자인 다니엘이 느꼈던 심정이 관객에게 전이되는 효과를 낳는다. 다니엘과 관공서 직원의 통화, 그러니까 심장병을 앓아서 일을 쉬고 있는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을 대상이 되는지, 혹은 일을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지를 평가하는 이 통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상당히 부조리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이 심사가 단순히 행정편의를 우선하여 전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그 질문들 역시도 매우 부조리하다. (심장병을 앓았던 다니엘에게 팔을 들어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방식에 다니엘이 항의하자, 직원은 그런 식으로 항의하면 수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부조리한 질문들을 반복할 뿐이다. 일을 한동안 하지 말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은 다니엘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뿐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희극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부조리한 코믹극은 영화의 내내 이어진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사람은 너무 기가 차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물론 가장 희극적인 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도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산업의학전문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가 소재인 이강현의 다큐 <보라>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전의 리뷰에서 나는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이 장면에서 이 의사들이 권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단지 바보같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지극히 부조리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이런 다니엘의 움직임을 그대로 묵묵히 따라가는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희극적인(그래서 비극적인) 부조리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연대들이다. 그러나 연대라고 해서 어떤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켄 로치가 예전부터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옆에서 한 마디 거들어주거나, 낡고 부서진 물건들을 고쳐주거나, 택배를 대신 받아주고, 인터넷으로 대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해주는 것. 이러한 작은 연대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켄 로치가 영화적인 트릭을 쓰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이어야 한다는 점. 영화 속 다니엘과 관계를 맺는 이들은 나이나 인종 면에서 의도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와 가장 큰 도움을 주고 받는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북아프리카 쪽에서 온 이민자 출신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 케이티의 딸이 이민자들의 음식인 쿠스쿠스를 들고 와서 다니엘에게 같이 먹자,고 하는 장면도 있다. 그 대사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식으로만 자막번역이 되었는데, 맥락은 이해되지만 조금 아쉬운 번역이다.), 그와 관계를 주고 받는 옆집 흑인 청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밖에 작은 도움을 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직원이나 도서관에서 그를 도와주는 흑인 청년, 혹은 다니엘이 관공서 바깥에서 스프레이로 글을 쓰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 그를 찬양하는 노숙자도 마찬가지이다. (켄 로치의 이 보편적인 연대에는 적과 아군을 가르는 선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관공서의 말단 직원들도 여기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여직원 같은 캐릭터도 영화 속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연대와 복지의 어떤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복지도 결국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선별적 복지'라는 말은 누군가가 말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영화 속에서도 케이티의 딸이 식료품 지원을 받는다고 놀림을 받았다며 케이티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두 가지, 그러니까 관공서의 고압적인 부조리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위 사람들과의 작은 연대는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로 상징되는 한 인간)은 이 일련의 부조리함을 통해 자존감을 조금씩 침범당하고 잃기도 하지만, 대신 작은 연대들을 통해 그 침해된 자존감을 조금씩 보충해(회복해)나가며 결국 하나의 인간으로 한명의 시민으로 남는다. 그것은 다니엘의 마지막 선언으로 극명하게 보여지는데, 그 선언은 아마도 켄 로치 자신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개도, 보험번호 숫자도, 하나의 화면 속 점도 아닌, 정당한 권리를 지닌 한명의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선언. 다시 말해서 이 선언은 영화의 제목에 있는, 다니엘이 스프레이로 관공서 벽면에 썼던 문구의 서두에 있는 그 말 'I, Daniel Blake'와도 맞닿아 있다.

 

켄 로치가 영화 속에서 말해오던 것은 늘 그런 것이었다. 켄 로치의 영화는 심플하다. 켄 로치의 영화는 다니엘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가야할 곳을 알고, 그곳에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심플한 걸음걸이. 이 영화에서도 켄 로치는 그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장면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컴퓨터 좌석이 다 찼다는 말을 다니엘이 듣는 씬이 있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장면 전환하여 잠시 후 다니엘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장면만 보여줘도 될 듯 하지만, 켄 로치는 굳이 이 사이에 다니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리 상점가를 배회하는 장면을 끼워넣는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늘 그러듯이, 이 영화에서 그 쌓인 장면들은 마지막에 힘을 발휘한다. 그의 그 선언이 단지 말뿐인 공허한 선언이 아님을, 그가 차곡차곡 쌓은 영화 속의 여러 장면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예전부터 그랬듯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낙관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누군가는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 어떤 낙관적인 현실이 있는가? 영화 속 결말에 어떤 낙관이 있는가? 하지만, 낙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닐까. 나는 그 마지막에서 어떤 낙관을 읽어내고 싶다. 다니엘의 글을 케이티가 읽고, 그곳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의 면면을 차례대로 비추는 그 마지막. 다니엘과 작고 사소한 관계들을 주고 받았던 여러 사람들, 다니엘이 변화시킨 작은 세계. 켄 로치가 그리던 세계는 거대한 투쟁만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작고 사소한 관계들, 갈등들이 존재하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영화는 후기에 들어올수록 점점 도리어 낙관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대체로 영웅을 요구하거나 어렵고 힘든 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한 명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것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은 어떤 결기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이것을 영화 속 포스터에 있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범위내에서의 점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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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20 0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 맥거핀님의 시선을 통해 보는 영화의 맛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아닌 자체 제작 소규모 빵집 같은^^

켄 로치가 영화로 보여주는 연대의 뚝심은 자기 위치에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게 참 존경스러워요.

맥거핀 2017-01-20 14:49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까?^^ 쓸데없는 얘긴데, 제가 사는 곳 근처에 김XX 베이커리라고 새로 생겼거든요. 그래서 와..이렇게 이름을 걸고 하시는 거면 엄청 맛있겠네..싶어서 신나서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이 없어서 놀랐어요..왜 굳이 이름을 걸고..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_-

켄 로치가 이왕 은퇴번복한 김에 몇 개 더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칸 황금종려상도 받으셨으니 아마도 한두 개는 더 만드실 것 같은..

AgalmA 2017-01-21 03:47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런 빵집 있어요ㅎ 빵을 워낙 좋아해 지방에 유명한 빵집 있음 찾아가 먹거든요. 그런데 아니 이게 왜....하는 빵집들 종종 있었어요ㅋ;;

은퇴했다 다시 돌아오는 예술가들 워낙 많아 요즘 은퇴 잘 믿지도 않지만ㅎ; 켄 로치 감독은 많이 만들수록 좋을 듯^^

맥거핀 2017-01-23 18:42   좋아요 2 | URL
저도 유명한 빵집이나 맛집 같은데 어쩌다가 가게 되는 일이 있는데요. 그렇게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많이 없네요. 사실 줄서고 이러는 걸 별로 안하고 싶어서 맛집 같은 곳에 가도 조금 기다리라고 하면 그냥 나와요.^^;

희선 2017-01-20 0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 앞부분을 보면 어쩐지 화가 날 것 같기도 합니다 다니엘과 같은 마음이 될 것 같아서... 오래전에 주민증 처음 만들 때 일이 떠오르네요 집에 아무도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는데, 그런 사정 같은 건 듣지도 않고 벌금을 내라고 해서 울었던... 지금 생각하니 그때 왜 울었는지 모르겠네요 벌금이 그렇게 많았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억울해서 그랬던 건지도...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니... 지금도 잘살지 못하지만, 그때는 어려서 집이 가난하다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사정은 있겠습니다 그런 걸 다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네요 규칙이다 규정이다 하면서...

다니엘도 그런 것에 부딪쳤을 듯 싶네요 가까이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눠서 다친 마음이 좀 나아졌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은 이웃과 좀 멀어지기는 했지만, 이웃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사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 이웃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닐 때도 있고 피부색이 다를 수도 있는 거죠

큰 것도 작은 것에서 시작하잖아요 작은 힘이 결국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씩 하다보면 나아진다고 여기면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 안 된다면 나중에라도... 얼마전에 이런 말을 들어서 말했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7-01-20 15:02   좋아요 3 | URL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행정이란 게 받는 사람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행정을 행하는 사람 중심이지요.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행정‘서비스‘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주민증 같은 거는 그 자체가 논란의 소지가 많은 것이죠. 나라에서 일괄적으로 주민등록을 강제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하신대로 벌금을 매긴다,는 거 자체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지문날인도 받고 말이죠.

그렇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죠.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연대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고, 연대 나온 사람만 해야 할 것 같고 그러지만(-_-), 그게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가 다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는 딱딱한 인간이라 이웃들과 마주쳐도 가끔 눈인사만 합니다만..뭐 그래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와야죠.

결국 힘이 없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란 그런 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입으로만 국민통합을 외치는 통치자들이 가장 쉽게 써먹는 전략이 분열시키고 고립시키는 거니까요. 위에서 말한 ‘선별적 복지‘ 같은 것도 그런 것의 일환일 것이구요.

희선 2017-01-21 02:18   좋아요 2 | URL
일본은 주민증이 따로 없어서 의료보험증이나 다른 걸로 한다고 하더군요 주민번호 어쩐다는 말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지문 찍은 거 생각났어요 그런 거 하는 거 한국밖에 없을까요 범죄를 예방한다는 말로 처음에는 찍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지문이나 DNA 같은 걸 경찰한테 주기도 하잖아요(이건 보통 일이 아닐 때군요 그런 책을 봐서) 한국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모두 지문을 찍는다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거 기분 별로 안 좋았습니다

살면서 잊어버려서 그렇지 여러 가지 안 좋은 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곳하고는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기도 하달까 ‘연대 나온 사람만 연대하는 건가’ 하는 말 재미있네요 이런 말 재미있어 하다니... 저도 이웃하고 친하게 못 지내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도움이 필요할 때 조금이라도 도우면 괜찮겠죠 그런 것이라도 해야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7-01-23 18:49   좋아요 1 | URL
저도 외국의 경우에는 주민등록시스템이 있는 곳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아요. 사회보장번호 같은 것은 있지만, 그것은 복지안전 차원이고, 우리나라처럼 일종의 관리 형태를 가지진 않죠. 어떻게보면 후진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긴 뭐..주민세 같은 것을 아직도 걷는 것을 보면 말이죠. 주민세라는 것은 예전의 인두세와 같은 것이니까요.

요즘에는 이웃의 개념이 희미했졌지만, (특히 대도시 같은 경우 말이죠.) 아직도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을 때가 종종 생기죠. 뭐 그리고 싫든 좋은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주차 문제니 층간소음 문제니 공동관리 문제니 뭐니 해서 같이 무엇인가를 처리해야하는 경우들이 있구요. 이웃들과 얼굴이라도 트고 지내는 게 좋기는 합니다. (가끔 너무 극성스러운 이웃 빼고는요.^^;)

오늘은 정말 추운 날씨로군요. 건강에 유의하세요.

2017-02-02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9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9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교사, 김태용, 2017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떤 영화를 볼까 망설였다. 최근에 거의 극장에 가지를 않아서 후보군은 많다. 먼저 첫번째 후보군은 별로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봤고, 볼 것을 권하고 있는 목록들이다.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스터>, 꽤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패신저스>, 관객들에게 꿈의 체험을 가져다준다는 <라라랜드>. 아니면 다른 후보군도 있다. 믿고 보는 감독들의 영화들, 그러니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나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영화. 이 영화는 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영화를 골랐다. 하나는 감독의 전작 <거인>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현재의 시장에서 꽤나 모험적인 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여성 원톱 혹은 투톱 영화는 드물다. 처음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여성 두 명이 전면에 있는 그 포스터 때문이었다. 최근에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여성 두 명이 전면에 있던 포스터가 있던가? 이해영의 <경성학교>(공교롭게도 이 영화도 배경이 '학교'다) 혹은 이언희의 <미씽: 사라진 여자>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남성들을 여러명 출연시켜야 흥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마스터>가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다시 케케묵은 줄을 긋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첨언하건대 이 영화가 무슨 페미니즘 영화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약간 반농담으로 말하자면 사실 제목부터가 반페미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구글에서 '여교사'를 검색해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다만 이것이 모험적인 시도이며, 개인적으로 모험적인 시도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골랐다고 강변하고 싶을 뿐이다.  

 

   

김태용의 영화 <여교사>에는 크게 두 가지의 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계급이라는 축(흔히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이며, 다른 하나는 치정이라는 축이다. 여기에 다른 하나의 축도 더 작동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는 그것을 거의 무시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윤리의 축인데, 글쎄... 이 축마저 작동하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 축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우리 관객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별로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여교사로 나온 김하늘이 오래전 드라마 <로망스>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오로지 문제되던 것은 이 윤리의 축이었다. 하기는 <로망스>는 오 필승 코리아,가 울려퍼지던 해의 드라마였다.) 아무튼 영화 상에서 그 윤리는 거의 희미해졌다. 적어도 교사 효주(김하늘)에게나 다른 교사 혜영(유인영)에게나 죄책감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죄책감이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는 것은 다른 것들인데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계급이나 치정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일종의 삼각형으로 작동한다. 계급의 측면에서 보면 두 명의 흙수저가 있고, 한 명의 금수저가 있다. 치정의 측면에서 보면 두 명의 여교사가 있고, 한 명의 남학생이 있다. 계급의 측면에서는 당연히 흙수저가 금수저보다 약자이며, 치정의 측면에서는 잃을 것이 많은 (여)교사가 더 약자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당연히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일종의 권력을 가진 교사가 학생보다는 더 강자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일단 재하의 캐릭터가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으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여교사와 남학생 사이의 관계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반대를 상상해보라. 남교사 두 명과 여학생 한 명이라고 가정해보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효주는 이 약한 것 두 가지를 모두 가졌다. 그녀는 아주 간단히 말해서 계약직 여교사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상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이런 영화에서 불안한 삼각형의 고리는 필연적으로 해체되기 마련이며, 변화가 일어나는 쪽은 그 고리에서 늘 가장 약한 쪽이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어느 방향인가 하는 점일 뿐이다. 

 

이 마지막에서 영화는 결국 가장 파국적인, 혹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로 향해간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의 구성은 꽤나 흥미로운데, 이야기의 흐름이 급박하기도 하거니와 설명이 되지 않는 빈 공백을 남겨놓기 때문이다. 마지막 직전에 효주는 결국 백기투항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혜영에게 투항한 효주는 혜영과 함께 (아마도 혜영이 묵는 것처럼 보이는) 호텔에 간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정도의 추가의문점이 생긴다. 하나는 왜 하필이면 호텔인가,라는 점이고 - 이 공간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다른 하나는 이 호텔 씬이 하필이면 이런 구도로 시작하는가,라는 점이다. 이 마지막 씬에서 효주는 거의 혜영의 하녀처럼 보인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부차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효주의 투항과 이 호텔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효주가 혜영에게 무릎을 꿇었던 운동장 장면과 효주가 주방에 있고, 샤워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혜영이 효주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누워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재잘거리는 이 호텔 장면 사이에는 감정의 진폭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생략된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말해야하는 한 가지. 이 영화는 어떤 생략들을 주무기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그런 것은 잘 드러나는데, 영화는 캐릭터를 설명하려는 씬들을 생략한 후 곧바로 이야기로 들어간다. 어떤 교사가 임신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사장의 딸 혜영이 새로운 교사로 온다. (사실 갑작스럽게 이렇게 툭 자르고 들어가는 것 또한 일반적인 한국영화들에서 잘 보여지지 않았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효주는 그 혜영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리어 혜영은 효주와 친해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여기에서 의문. 효주는 왜 혜영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보이는 것일까. 다른 교사들의 말대로 혜영에게 먼저 나서서 친한 척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영화에서 생략이란 사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생략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공백은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여러 결로 다채롭게 만들기는 하지만, 지나친 생략은 관객에게 어떤 풀리지 않는 의문을 만들어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는 약간은 독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효주의 캐릭터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효주와 혜영의 관계를 먼저 드러내는 것은 흥미로운 시도이긴 하지만, 어떤 의문들을 만들고 그 의문들은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일종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영화의 마지막들을 보면서 효주의 행동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 가지 '사소한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결정적인 트리거는 무엇이었을까. 재하(이원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사랑했던 재하(와의 관계)를 혜영이 너무 하찮게 여겨서였을까. 둘 중의 어느 하나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무게를 재어 본다면 그 중의 어떤 것이 더 무거울까.

 

약간 도식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처음이 더 무겁다고 한다면 그것은 치정의 무게이고, 나중이 더 무겁다고 한다면 그것은 계급의 무게이다. 그 둘 중의 어느 쪽일까. 나는 그 질문, 그 무게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효주도 그 무게를 잘 몰랐던, 혹은 여전히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그래서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 굳이 재하를 부르고 무게를 달아보려 한다. 사실 이미 답은 나와있고, 자신도 답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영화의 서늘한 점은 사실 그 마지막의 파국적인 결말에 있지 않다. 아마도 가장 서늘한 점은 흙수저들이 가졌던 거의 유일한 무기이자 가능성이자 희망인, 사랑마저도 이 영화에서는 부정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도식적으로 말한 김에 조금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계약직 여교사 효주와 가난한 남학생 재하의 사랑은 존재한 적이 없었고(아니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마저도 혜영의 장난감이라고 말해야하니까.), 효주는 그 과정에서 오래된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끝나버린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결국 이 오래된 남자친구도 재하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씬을 다시 기억해보자. 영화의 시작부, 임신한 정규직 여교사가 휴직에 들어가자, 교감은 계약직 여교사들에게 임신을 하면 재계약을 하지않도록 계약서를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홀로 남은 효주는 빈 교무실에서 혼자 남아 무엇인가를 먹는다. 이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상징하는 것이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다른 것을 말하고 싶다. 이미 그 이전에 그녀가 무엇인가를 홀로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까. 남자친구가 짐을 챙겨서 나가고 텅 빈 집에서 그녀는 홀로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쓸쓸하고 위태롭게 보였다. 서늘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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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2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이 영화, 개봉하기 전부터 노출에 관한 (언플 성향이 짙은) 언론 보도가 있었어요. 영화가 기대에 미치치 못해 실망한 관객들이 많았을 겁니다.

맥거핀 2017-01-13 00:51   좋아요 1 | URL
제 글은 뜸했습니다만, 저는 cyrus님 글 계속 잘 보고 있어서 그렇게 낯설지 않네요.^^ 잘 지내셨나요?
말씀하신 기대는 ‘노출‘에 관한 기대겠지요? 뭐 그런 것을 기대하고 보신 관객이라면 분명히 실망하셨을 겁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밖에 홍보를 할 수 없는 영화사의 선택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내세울 게 별로 없는 영화이기도 하고 또 안타깝게도 그런 게 먹히기도 하는 게 현 추세니까요.

AgalmA 2017-01-13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느므느므 반갑^0^!
효주(김하늘)-혜영(유인영) 구도 보니 드라마 밀회에서 혜원(김희애)-영우(김혜은)이 떠오릅니다. 두사람이 처음 소개되는 장면 아주 인상적이었죠. 혜원이 영우가 정부와 밀회를 나눈 호텔로 찾아가 그녀를 수습해주면서도 모멸을 당하던 장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저 장면처럼 딱 그랬죠. 김희애의 대단한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의 당당함이 부딪히던 인상적인 장면였죠.

맥거핀님 이런 글 엄청 기다렸음^^!

맥거핀 2017-01-14 15:12   좋아요 1 | URL
네..저도 반갑습니다. 오래만에 돌아와도 환영도 해주시고 좋네요.^^
제가 <밀회>를 참으로 띄엄띄엄봐서 잘 기억이 안나기는 하는데요. 영화상에서 그래도 혜원에게는 어떤 당당함이 있는데, 영화상에서 효주는 사실 꽤 안쓰러워요. 조금 더 둥글둥글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그런데 둥글둥글함이 흙수저의 덕목은 아니잖아요. 흙수저도 까칠하게 살 수 있는 건데 왜 그렇게 살 수 없도록 구조가 되어있는지..마지막에 그녀가 홀로 무엇인가를 먹는 그 씬이 참으로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희선 2017-01-13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자일 때는 남교사라고 쓰지 않는데 여자일 때는 쓰더군요 이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기도 해요 여자중학교나 여자고등학교에 다닌다 해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라 하면 될 텐데, 여중생이나 여고생이라고도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신기하기도 합니다(오래전 일이어서 확실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거의 안 했을 거예요) 일본에서 그렇게 써서 한국에서도 그렇게 쓴 것인지, 확실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다자이 오사무 소설에는 <여학생>이 있더군요 한국에서는 여중이나 여고에 다닌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건 좀 다른 뜻이기도 하죠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우연히 효주가 무엇이든 다 가진 혜영한테서 하나쯤 빼앗겠다고 한 걸 봤습니다 그게 제자인 것 같은데, 그것마저 잘 되지 않다니... 그런 마음으로 학생한테 다가갔다 해도 마음이 조금 기울기도 했을까요 예전이었다면 선생님하고 제자가 그러면 아주 많이 뭐라 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걸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는 좀 어렵겠지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만날지라도... 그런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합니다

가난한데 사랑도 제대로 못하다니, 어쩐지 슬프군요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뭐든 안 된다, 는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합니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요


희선

맥거핀 2017-01-14 15:18   좋아요 1 | URL
뭐 정확히 말하면 차별적인 용어 맞지요. 남학생이라든가 여학생이라든가 하는 용어는 차별적인 느낌이 없는데, ‘여교사‘라고 하면 조금 그런 게 있죠. 그래서 저도 위에서 쓸 때 조금 망설였는데, 뭐 일단 영화 제목부터가 ‘여교사‘이니까요. 예를 들어 특정 직군에서 특별히 한쪽 성별이 적거나 하면 앞에 그렇게 ‘남‘이나 ‘여‘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예를 들어 ‘간호사‘) 교사의 경우에는 도리어 여교사가 훨씬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게 카피였죠 아마? 모든 것을 다 가진 너에게 하나쯤 뺏으면 안되나..뭐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이 영화에서는 효주의 그 말 마저도 결국 실현된다고 볼 수 없으니까요. 이야기로 보면 꽤나 무거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 [거인]도 꽤나 무거워서 영화 초반부에는 그보다는 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더 무서운 것 같군요.
 

 

 

티셔츠, 성우, 넥슨, 게임, 웹툰, 메갈, 메갈4, 페미니즘, 일베, 오유, 정의당 등등 여러 키워드가 얽혀있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다만 이제 어떤 것이 간명하게 정리되는,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낼 수 있었던 세계는 진즉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사태는 동일하지만, 동일한 사태를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지지할 수 있는 지점과 지지할 수 없는 지점은 미세하게 갈라지고, 차이가 생겨난다.

 

그것은 물론 이 일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경험과 성향,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 가지고 있는 정보량 등에 따라서 거의 어떠한 사건이든, 그 사건을 보는 개인의 관점은 수백, 수천가지로 갈라진다. 그리고 바로 그 관점이라는 것이 다시 사건에 영향을 미쳐 사건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거의 모든 사건들에는 늘 그것을 요약하려거나 정리하려는 시도, 혹은 간편하게 전선을 재정비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것은 대체로 어떤 것을 정리하거나, 간명하게 만들려는 이 시도 자체가, 사태를 왜곡시키거나 어떤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건에서도 이 관점들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다. (이것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는 자체가 어쩌면 그 관점들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크지 않은 관점의 차이를 면밀하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바로 그 미세한 차이들이 건설적인 논의로 갈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에서 이 선긋기 시도들은 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선의 이편인가, 선의 저편인가. 당신의 관점을 명확하게 밝혀라.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지지자, 혹은 어떤 반대자라는 낙인을 찍은 후, 선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혐오하는 퍼포먼스에 재빨리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이 메커니즘은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복잡해진, 어떤 것도 사실은 간명하게 정리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별다른 스포는 없으니 읽으셔도 된다.) 영화에서 악의 축(?)인 양복남 용석(김의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석우(공유)에게 공격당하자, 냅다 소리부터 지른다. "이 새끼 감염됐어!" 그리고 그 순간 효과적인 전선이 만들어져 재빨리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외침은 예를 들어 이것과 매우 닮았다. 이 새끼, 빨갱이야! (여기 '빨갱이'에 다른 적당한 것을 넣어도 효과만점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 혹은 '종북'만한 게 없다.) 그렇게 선을 긋는 것. 좀비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 <부산행>은 내게는 어떤 정치적인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차의 수많은 객차들과 각 객차들에 갇혀 있는 좀비들. (예전에 '촛불 좀비'라는 말을 여기서 떠올려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리고 좁은 창문을 통해 저 너머 좀비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편의 정상인들. 그러나 과연 이편이 정상이고, 저편이 좀비인 걸까.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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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8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0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5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08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객차가 새삼 격차로 읽히네요. 맥거핀님이 보셨듯 연상호 감독 전작 특성상 <부산행>에서도 `정치적인 은유`가 안 담길 수는 없었으리라 봅니다. 한국은 지옥의 솥처럼 그게 들끓는 곳 아닙니까.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새누리가 `민주주의` 타령하는 우스운 꼴처럼 한쪽에선 선이며 정의며 말할 수 있지만, 누구든 어느 카테고리에서는 한쪽 귀, 한쪽 눈 감고 보고 말하고 있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걸요.
바쁘십니까. 제가 할 소리 아닌 줄 알지만ㅎ; 글이 뜸한 이웃이 왜이리 많죠; 맥거핀님의 글에 담긴 차가운 맛이 전 늘 좋아요 :)

맥거핀 2016-09-10 01:21   좋아요 2 | URL
부산행은 사실 메시지가 비교적 명징합니다. 그 마지막만 보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죠. 다만 중간에서 그 마지막에 이르는 과정이 약간 미심쩍은 측면은 있지만요. 거기서 어떤 `징후`를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결말(그러니까 어떤 주장)은 좋다고해도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주장이 도출되는 과정)의 미심쩍음...위에서 제가 쓴 메갈 문제(이것도 아직 현재진행형이군요)도 물론 이와 비슷한 면이 있구요. 다시 말해서 요즘에는 어떤 것이 선 안인지 선 밖인지, 혹은 어떤 것이 정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2016-09-08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0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4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일 북플에 접속할 땐 몰랐는데 맥거핀님 서재가 한달동안 글이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

맥거핀 2016-09-14 01:05   좋아요 0 | URL
요새 조금 뜸하죠? 글쓰기 뿐 아니라, 알라딘도 그다지 자주 오지를 않는데, 마침 오니 cyrus님 댓글이 있어 반갑네요.^^ cyrus님도 좋은, 행복한 추석 되시기를 바랍니다.
 
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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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L인가.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소개한 소개글을 보면서부터 의문을 가졌다. 왜 '이한열'이 아니라 L일까. 김숨의 소설 <L의 운동화>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우리가 흔히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그러나 또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말이 될 것이다), 대학생 이한열의 남아 있는 한짝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내용이 중심이 된 이야기이다. 사실 언뜻 보면 이 소설에서 굳이 이한열의 이름을 L이라는 이니셜로 처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 사건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터이고, 소설에서도 굳이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배경지식이 거의 없더라도, 소설을 조금 읽다보면 이 소설의 L이 이한열을 지칭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자명하게 알게 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표현으로서 그를 'L'이라고 지칭할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이한열이 아니라, 왜 L인가.

 

소설은 크게 세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사건이다. 1987년 6월 9일 시위 현장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연세대생 이한열. 그의 왼발에 있던 운동화는 사라졌고 - 다시 말해서 집회 현장에서 한 여학생이 주인 잃은 운동화를 주워 집회 사회를 맡은 학생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끝내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날들이 흘러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운동화가 이한열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것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 그의 오른발에 있던 운동화만 남았다. 다른 하나는 복원이라는 것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이다.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왜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그것은 복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복원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이한열의 운동화라면 그 운동화를 새것같이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한열의 발에서 벗겨진 그 상태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후 지금까지의 28년의 시간을 담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공산품의 하나인데, 굳이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어떤 방법을 써야 이 복원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해야 할 질문은 많고, 답을 찾기까지 고려하여야 하는 사항은 많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할 것 같은데, 여기에 다른 한 가지가 흥미롭게 끼어든다. 연관되는 듯, 혹은 연관되지 않은 듯한 다른 여러 사람의 이야기. 대표적인 것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주체인 '나'와 복원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양화 전문 복원가 '그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한 이야기.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치료하는 센터에 다녀오던 날, 버스를 탈 엄두가 안나고, 택시가 잡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까지 데려오던 날의 기억. 두 시간을 꼬박 걸어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아들 운동화의 왼짝과 오른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가, 오른발에 왼짝 운동화가 신겨 있었어요. 운동화 짝이 바뀌어 발 방향이 틀어진 아들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거예요. 그늘 한 점 없는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면서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아들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걸 생각하면...... 세검정 못미처, 아들의 오른발에 신긴 운동화 끈이 풀어져서 새로 묶어 주면서도 운동화 짝이 바뀐 것은 몰랐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운동화 끈이 또 풀릴까 봐 세게 당겨 묶으면서도요."(p.70~71) 아들은 이제 시설에 들어가 있고, 그녀는 가끔 꿈을 꾼다.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 꿈에서 그녀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아들의 왼발에 신기고 있는 운동화가 오른짝이라는 것을 알면서 신기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자신, 그렇게 쪼개져 있는 상태로.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말고도, 복원실 사람들, 혹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 의뢰하는 기념관장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보내온,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신문에 실린 L의 운동화 기사를 보았다는, 86학번이라는 익명의 사내가 보낸 메일도 있다.  

 

삼화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가, 영문으로 타이거(TIGER)라고 쓴 로고가 붙어 있던 그 운동화가 실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L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 p.216~217

 

이 이야기들 속에서 김숨은 묻는다. 그 운동화들,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였던 그 운동화들은 어디로 갔는가, 라고. 단지 L의, 그러니까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M의, J의, L의, K의, 그러니까 수많은 '나'들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그 운동화는 어디로 갔는지 말이다. 물론 김숨은 이때 단지 운동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6학번인 이 익명의 사내가, 하루종일 수없이 누군가를, 때로 자신을 혐오하다가도 체념하게 만드는, 각종 지긋지긋한 일들에 시달렸을 이 사내가 겨우 한숨 돌리는 마음으로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펴들고 그 안에서 우연히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고, 주저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 긴 메일을 쓰게 만들었던, 그가 가졌던 궁극적인 의문이 이 메일에는 들어있다. 그 운동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있었던 그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지금의 M도, J도, L도, K도,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그런 의문.

 

다시 말해서 김숨은, 그녀가 만들어낸 이 허구의 이야기들, 그러나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단지 끄집어냈을 뿐인 이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이 단지 역사적인 이야기로만 읽히기를 바랬던 것 같지는 않다. 즉 김숨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단지 역사적 유품, 혹은 기념물로만 보기를 원치 않아 보인다. 복원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면서, 단지 어떤 역사적인 가치로 그것을 박제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개인들이 그 '무엇인가'를 각자 끄집어내어 복원하기기를 이 소설은 바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간단하지 않다. 그 부서진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은 대체로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복원은 파괴 혹은 손상과 거의 동일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손상시키고 파괴한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 속 '나'가 소설의 중반이 넘도록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기를 주저하는 것, 그리고 그의 운동화에서 유기물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는 것은 아마도 그것에 맞닿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복원을 결국 회피할 수 없다.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인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이한열의 운동화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익명의 L의 운동화이기도 했고, M이나 J, 혹은 K의 운동화,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마음 속 어딘가에 이제 부서진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 복원이 필요한 그것은 무엇이며, 복원이 된 그것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한 형태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L의 운동화가 복원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그것을 본 '그녀'는 말한다. 지금도 꿈을 꾼다고.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리고 그런 자신이 쪼개져 있는 꿈. 그러나 그 꿈은 조금 형태가 달라져 있다. "셋이요.....아들의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를 신기는 나와......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그리고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그렇게 셋이요."(p.264)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나'들이 있지 않을까. 잘못된 무엇인가를 택하는, 혹은 잘못된 무엇인가를 행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나. 여기에 이제 또다른 '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 그 '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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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어떤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대학을 다니면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집회를 나갔던 날의 기억. 집회의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들은 어느덧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학교보다 시내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이상한 흥분감과 기대감, 그리고 불안감이 교차하는 사이, 점차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오늘 백골단이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사수대를 결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경험이 없던 1학년 학생들은 많이 불안해했고, 그 중의 하나였던 나는 아마도 더 불안해했던 것 같다. 내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늘 우리들을 이끌고 다니던 선배 하나가 말했다. "야, 너는 여기 사람들 가방 다 모아서 집에 가있어. 가방 매고 뛸 수는 없잖아. 너는 여기서 집도 가깝고."

 

나는 선배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을까, 아니면 쉽게 머리를 주억거렸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크고 작고 형태도 다양한, 여러 색이 울긋불긋하게 섞여 있던 가방들을 어깨에 매고,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그렇게 나는 지하철 몇 정거장을 거쳐 집으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가방들을 억지로 가지고 집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지하철 보관함에 가져다 두거나, 가까운 카페 같은 곳에 가지고 갔어도 되었을텐데. 나는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바보 같은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나는 집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열패감과 안도감이 교차했을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집에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까.

 

몇 시간이 지난 후 중간에 무리가 산산이 흩어졌는지, 혹은 무엇인가에 쫓겼는지, 아이들은 하나 둘 씩 우리 집 근처로 오거나, 드물게 전화를 해왔다. 오늘은 가지러 갈 수 없으니 나중에 찾아가겠다거나, 내일 학교로 가지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 근처로 왔고, 나는 하릴없이 그 때마다 가방을 들고 그들을 만나러 가야만 했다. 땀에 젖은 아이들의 얼굴은 번들거렸고, 지쳐보이기도 했지만, 별 거 없었다며, 단지 열심히 뛰기만 했다고 웃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입가에는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다른 것이 달려 있는 듯 했다. 같이 시내로 나갈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무엇인가가.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그들이 가방을 들고 나타났던 나에게서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무엇이었을까. 나야말로 쪼개졌으면 좋겠다. 가방을 들고 나타난 나와 가방을 찾으러 나타나는 나로. 그리고 어쩌면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나로. 

 

나는 무엇을 복원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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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발과 가방 … 우리 모두가 가지는 감상(感傷)과 계시(啓示)에 대해서
    from 공음미문 2016-09-08 23:17 
    벌써 20년 전이 되었습니다. 한여름 우울 속에서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었던 일이. 그 책에서 강렬히 남았던 몇몇 인상 중 하나가 ‘잃어버릴 뻔했던 한열이 조카의 고동색 샌들 한 짝’입니다. 길에 버려진 많은 것들 중 신발은 유독 사람을 애잔하게 합니다. 머리끈이나 볼펜을 발견할 때와는 분명 다른 기분입니다. 맨발로 돌아가진 않았을 텐데, 대부분의 버려진 신발은 ‘이젠 쓸모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멀쩡한 신발을 볼 때엔 ‘사고’를 떠올리게
 
 
희선 2016-07-08 0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L이 이한열이라는 걸 알아도 L은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무언가를 되살려야 하는... 저는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아니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느 날 아쉬웠던 일, 어느 날 잘못한 일... 이렇게 말하니 뭔가 생각날듯 말듯하네요 그런 건 아주 가끔 생각나기도 해요 잠깐 생각하고 말기도 합니다 어제도 걷다가 오래전 일을 잠깐 떠올렸네요 왜 그랬지, 하는... 그런 일 나중에는 안 하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르게 할지도...

둘로 나뉜 자신이라고 하니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이 생각나네요(여기 나온 건 아이가 어릴 때 그랬지만, 어린데 그러다니 싶네요 아니 어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건 생각나지 않고 그것만 생각납니다) 둘로 나뉜 자신을 말하는 게 그것만은 아닐 테지만, 여기에는 하나가 더 나오는군요 셋이라니... 꿈속의 꿈, 세번째는 잠자면서 그걸 바라보는 자신...

사람은 좋았던 것보다 안 좋은 걸 더 잘 기억하기도 하네요 살면서 좋았던 일도 있었다는 걸 기억하라는 말도 있고, 잘못한 걸 더 잘 기억해내라 하는 말도 있으니 둘 다 맞는 말이겠죠 어떤 일이냐에 따라 다를 것도 같네요


희선

맥거핀 2016-07-08 14:10   좋아요 2 | URL
인간의 기억이란 대체로 불완전하고, 또 매우 스스로를 속이기 쉬운 것이라서, 대체로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잊어버리고는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기억, 혹은 어떤 거대한 불행과 같은 것들 말이죠. 기억을 억압하는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자꾸 들춰내는 것은 어떤 고통을 동반하기에 그렇겠지요. 작은 사건도 그렇고,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같은 것들도 사람들이 자꾸만 더 이야기하지 마라,하는 것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겠죠.

하지만 어떤 사건은 기억해내는 게 아주 고통스러울 지라도, 기억해야만 하고, 다시 되살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 되살려야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복원가의 질문이고, 그리고 또 우리모두가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긴 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모두들 어딘가 하나쯤은 복원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을 너무 믿지 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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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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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떠올렸다. 단지 이 소설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마약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시카리오>를 보면 언뜻 영화 본편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본 줄거리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족이 영화의 본편과 상관이 있음은 물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질문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아마도 예전의 리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 마지막,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격 소리에도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아이들의 축구 시합을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마약으로 인한) 만연한 범죄에 이제는 무감각해진, 어쩌면 그것을 당연한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는 거의 악마의 도시처럼 묘사된다. 거리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총격 소리가 들리며, 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경찰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도 사람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며, 그 모든 것에 무감해진 것일까. 그런데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내가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야하는 것은 그 무감각한 표정 이면에 깔린 공포, 그 공포에 담긴 살고싶다는 외침이 아닐까.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가기 위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은 척 하는 법,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콜롬비아에서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던 '고난의 10년'의 시간에서.  

 

특별한 시대였어요. 그렇잖아요? 폭탄이 누구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면 다들 걱정을 하고. 자신이 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디에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공중전화가 없으면 전화를 빌려 쓸 수 있는 집을 알아내서 그 집 문을 두드려야만 하고.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에 매달리고,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가 죽은 자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매달리면서 살아야 했죠. 우리는 각자 집안에서 지냈죠. 기억해요? 공공장소는 피했어요. 친구의 집, 친구의 친구의 집,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의 집, 어떤 집이든 공공장소보다는 선호했죠. 

- p.313~314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도망친 하마, 그러니까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만든, 이제는 쇠락한 오래된 동물원에서 도망쳤다가 죽은 하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시작한다. 그가 그것에서 떠올린, 그에게 고통을 준 한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와의 오래전 만남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이 서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주인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오래 전 일어난 사건이며, 주인공은 이제 그것을 되돌아보며 서술하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제 그 사건이 주는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것에서 벗어난 이후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국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자신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드리운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로 읽으면 아름답고 좋으련만, 단지 그렇게 읽을 수만은 없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이 명징하게 보여주는데, 주인공에게는 이제 아내가 떠난 텅 비어 있는 집만 남아있다. 그것에서 어떤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안한 마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리카르도 라베르데나 그의 부인 엘레나 프리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부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혹은 그들이 무엇을 극복했다,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극복했다거나, 이겨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 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비록 그런 일들이 발생해서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편한 확신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결과들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손해를 벌충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연계 고리가 우리를 현재 상태의 우리로 변화시켜버렸다는 사실을 누군가 우리에게 알려줄 때면 왠지 모르게 공포감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 p.290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이 이 소설에는 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이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장면인데, - 사실 이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장면도 물론 영화로 만든다면 빛을 발할 장면이리라. - 엘레나 프리츠가 장마를 맞은 집에서 갑자기 찾아온 마이크 바비에리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가득한 불안감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평화를 가장하는 엘레나와 마이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총성. 이 장면은 뒤의 숨겨진 이야기를 정확히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삶은 그렇게 가득한 불안감 위에 띄워진 가장된 행복과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그 모든 것에서 불안감을 감지하지만, 그것에서 사실 엘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리카르도나 마이크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 연계 고리 안에서 결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에게 놓여진 그 녹음이 상징하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듣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모든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엘레나가 그 소음을 같이 듣는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을까. 아니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그것의 한 예는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했던 행위가 보여주지 않을까. 즉 그것은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이 (비록 전직조종사라도) 그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서 들으려 애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중 화자 '나'(얌마라)도 마찬가지이다. 얌마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휘말렸고, 그것을 단지 불운한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그리고 아내도 그것을 원했지만), 그는 사건에 숨겨진 부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것이 아마 이 소설의 태도일 것이다. 사실 삶의 많은 것은 우리에게 결코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단지 그 통제력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것. 소설의 이야기는 늘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얌마라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리카르도 라베르데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이며, 마야가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 기원에 있는 것, 즉 리카르도의 할아버지 훌리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부터이다.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연계 고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슬러 올라가 그 고리의 끝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연계 고리의 반대편 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연계 고리의 다른 반대편 끝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들을 통해 그 연계 고리들을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바라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삶에 깊숙히 박혀 있는 공포와 그 공포를 이겨내려는 미약한 몸짓이 지닌 숭고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참 좋은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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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6-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많이많이 늦었네요.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렇게 마지막 리뷰 올리고 정리글 같은 거 쓰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안하는 모양이군요...

2016-06-15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0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8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