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L인가

 

 

 

 

 

 

 

 

 

 

 

 

 

 

 

 

 

벌써 20전이 되었습니다. 한여름 우울 속에서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었던 일이. 그 책에서 강렬히 남았던 몇몇 인상 중 하나는 한열이 조카가 잃어버릴 뻔했던 고동색 샌들 한 짝입니다. 길에 버려진 많은 것들 중 신발은 유독 사람을 애잔하게 합니다. 머리끈이나 볼펜을 발견할 때와는 분명 다른 기분입니다. 맨발로 돌아가진 않았을 텐데 길에서 꼭 필요한 신발이 이젠 쓸모없음을 나타내는 걸 보는 당혹 때문입니다. 낡은 신발이면 서글픔으로 갈무리 되지만 멀쩡한 신발을 볼 때엔 사고를 떠올리게 되고, 아이 신발을 볼 땐 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을 알기에 사연을 생각하게 되고, 안팎으로 혹시나 다치지 않았을까 상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끈이 떨어져 질질 끌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새벽을 떠올리며, 신발 한 짝이 없이 혹은 신발을 모두 잃은 채 걷는 길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 공감이 아니라 참담함이 밀려옵니다. 살해당해 버려진 사람들은 거의 신발 없이 발견되지요. 그때 신발은 살아 있을 때의 품위가 아니라 인격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짧은 여행의 기록속 저 문장마다 속속들이 녹아 있는 우리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묘, 우리들의 사진, 우리들의 얼굴, 우리들의 땀, 우리들의 눈, 우리들의 눈물, 우리들의 뜨거움, 우리들의 꽃, 우리들의 술병, 우리들의 변기, 우리들의 구더기, 누구나 청년이었던 우리, 우리들의 어머니, 우리들의 딸, 우리들의 아들, 우리들의 손녀딸, 우리들의 뒷모습, 우리들의 가방, 우리들의 교차로, 우리들의 햇빛, 우리들의 첫 만남, 우리가 가지는 모든 감상(感傷)과 계시(啓示)에 대해서.

저는 망월동 공원묘지에 가보지 못 했습니다. 팽목항에도 가보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제 머릿속에 저장되어 영원히 되살아날 토포스(topos)라는 건 잊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 순간 잊지 않으려 하는 것과 나란한 추(錘)입니다. 당신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힘내십시오, 친구. 태풍 속과 촛불 속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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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9-09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시에 같은 책을 보는군요! 반갑게! ^^
글 너무 좋아요! 감성이 다른 면으로 폭발하는 aglama 님 글!
전 망월동 가봤는데, 지금은 무진장 변했겠죠? 그땐 묘지보다 황폐하게 큰 주차장이 더
인상깊었는데...ㅎㅎㅎ 날마다 오는 사람들도 아닌데 누굴위해 저리 큰 주차장이 필요한가,
묘지는 버석버석 드러난 흙들과 함께 마르고 있을 뿐이었는데..그런 생각 했어요.

AgalmA 2016-09-09 01:34   좋아요 1 | URL
저도 기념관 같은 데 가면 황량한 주차장과 기묘하게 넓고 빈 공간들이 더 눈에 띄어요. 그래서 건축에 대해 흥미가 많아요. 장소와 공간성에 대해.
시공간 속을 걷는 우리는 ˝황야의 이리˝같은. 농담을 간식 삼아.

[그장소] 2016-09-09 05:00   좋아요 0 | URL
bgm 은 각자 선곡하기!^^

나와같다면 2016-09-09 0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두 `짧은 여행의 기록` 중 이 장면이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억 깊숙히 있었나봐요
Agalma 님의 책 페이지보고 나도 모르게 `헉!` 신음이..

AgalmA 2016-09-09 01:40   좋아요 2 | URL
반갑네요. 책을 읽으면 이렇게 강렬히 사로잡는 페이지가 있어 읽고 또 읽고 하게 되잖아요? 그런 장면이 담긴 책을 만나면 정말 기쁘죠. 삶을 다시 살펴볼 의지를 갖게 됩니다.

물고기자리 2016-09-09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먹먹해요. 저도 길에서 주인 없는 신발을 보게 되면 맘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게 돼요..

함 내라는 말에 왜 제가 힘이 나는 걸까요. A 님 글을 다시 읽게 되어 새삼 좋다는 생각을 또 했습니다..

AgalmA 2016-09-09 21:42   좋아요 1 | URL
물고기자리님~~~~ 어디 계셨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뜸한 이웃들 둘러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됐어요. 생각이 많으신가 안 좋은 사정이 생기신 건가 갸웃갸웃하며 님 서재에도 자주 들렀어요. 동네 복실이 강아지처럼.

힘 나셨다니 다행. 물고기자리님 글 읽을 때 저도 물고기자리님 글 읽을 수 있어 참 좋구나 하니까 쌤쌤^--^

2016-09-10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09-10 02:34   좋아요 1 | URL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가 신발에 대해 자주 언급하던 묘사들이 생각나네요. 수용소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뺏긴 신발이 수북이 쌓이는 광경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네, 누구에게나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은 버겁고 지난하겠지요. 떨어져 있더라도 같이 바라보며 고민할 수 있는 동지가 있어 위안이 됩니다.
요즘은 무기랄 수도 없는 책이지만 이 마저도 없다면 아찔합니다.

[그장소] 2016-09-10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핫~^^ 디어슬로베니아 ㅡ여행이라니! 노오란 김연수!까지..이렇게 막.막. 감사해도 되나요!^^ Agalma 님 말이 맞는데..나 좋은 일였는뎅~^^그래도 그래도 고마워요!자다깼어요. 어제 그제 밤샜더니 이제 몸이 막 힘들어해요..ㅎㅎㅎ 그래서 쉬어주는 중~꿈 꾸는 중이면 다디단 꿈되시길~!

AgalmA 2016-09-10 02:45   좋아요 1 | URL
디어슬로베니아 어감이 마치 디어슬로우 같아서 좋아요 :)
안 그래도 책 여행 보따리가 많은 사람ㅎ에게 휴식을 줄 책을 고르느라 고심이 심했습니다ㅎㅎ 사은품이 있으니 더 푸짐해 보일 수 있다는 장점도 고려했고요ㅋ
쉬엄쉬엄 즐거운 여행이 되길^^/

덧) 사고 나니 땡스 투 할 이웃이 보여서 아쉽ㅜㅜ 담부턴 책 살 때 잘 살펴야 할 듯!

[그장소] 2016-09-10 02:50   좋아요 1 | URL
아핫~ 누이좋고 매부좋고 ~^^ 땡스투 ㅡ여긴 크게 고마워 안는 눈치죠? 저쪽은 에드온으로 나오는데 비슷한게..그게 올라오면 서로들 고맙다고 인사하던데 ..ㅎㅎ 그게 보기좋더라고요! 같은 듯 한데 사람살이가 조금씩 달라..신기하게요.^^
저도 책 사고 나서 땡스투였네 할때 있어요!^^
제게 그런분들도 계실테니 ㅡ그냥 감사할래요!^^ ㅋ ( 이기적이고 현실적이냐!^^)
디어 슬로우 ㅡ 디어슬로베니아 ㅡ고전적인 춤이 생각나는 단어들~ ^^ 사은품까지 알뜰하게 챙겨줘서 고마워요!^^ 두근두근~~ 여행을 기다리는 빅재미까지!^^

AgalmA 2016-09-10 03:30   좋아요 1 | URL
슬로우~슬로우~착, 착....옛날 드라마에서 바람둥이 춤선생이 그리 가르치던 장면이... 그래서 춤 생각 나신 거 아님까! ㅎㅎ
yes 시스템은 제겐 뭔가 많이 복잡해요; yes의 그런 감사 문화 괜찮은 듯. 이득 심리만 있지 않은 거 같아서.

버스는 이미 지나갔고 땡스투고 뭐고 그장소님 책여행이 순조롭길 바랄 뿐ㅎ;
여유로운 슬로베니아 여행에서 돌아오면 마중 댓글 달러 갈께요ㅋ 슬로베니아라니 부럽😉

[그장소] 2016-09-10 04:27   좋아요 1 | URL
ㅎㅎ글은 오지도 않았는데 ㅡ벌써 올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ㅡ이거 무슨 시였죠? 글이 아닌 ..뭐였더라!^^
저도 익숙하긴 이쪽을 먼저해서 적응도 그렇고 여기것이 편하죠 . 각각 장단점이 있어요 . ^^ 보면 , 첨엔 뭐야 ㅡ했지만 ( 자랑이닷!) 자릴잡고 보니 ㅡ 감사해얄것 투성이~

슬로베니아 엔 춤꾼이 있을까요..없을까요? ㅎㅎ 딱 기대리겠어요 . 제게 어서오길~ 추석 지나야 받게되겠지만 ~~

AgalmA 2016-09-10 04:59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어감 때문에 왈츠 생각이 나기도 하네요. 거기도 당연히 춤꿈, 술꾼 있을 건 다 있겠죠^^

˝글은 오지도 않았는데 ㅡ벌써 올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라...알듯 말듯 그러네요. 저까지 궁금해지네요. 생각나면 알려 주세요~

[그장소] 2016-09-10 0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 ㅡ이었나..!^^

AgalmA 2016-09-10 05:08   좋아요 1 | URL
봄은 내년에 분명 올 테니 주무십시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아니실테니~ 그럴 리가 없지. 그장소님은 강도가 아니잖아. 맞아. 아냐, 마음을 뺏아가는 강도라면.... 생각 널뛰기 좀 그만해. 맞아. 앗, 봄보다 아침이 먼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