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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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L인가.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소개한 소개글을 보면서부터 의문을 가졌다. 왜 '이한열'이 아니라 L일까. 김숨의 소설 <L의 운동화>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우리가 흔히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그러나 또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말이 될 것이다), 대학생 이한열의 남아 있는 한짝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내용이 중심이 된 이야기이다. 사실 언뜻 보면 이 소설에서 굳이 이한열의 이름을 L이라는 이니셜로 처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 사건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터이고, 소설에서도 굳이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배경지식이 거의 없더라도, 소설을 조금 읽다보면 이 소설의 L이 이한열을 지칭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자명하게 알게 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표현으로서 그를 'L'이라고 지칭할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이한열이 아니라, 왜 L인가.

 

소설은 크게 세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사건이다. 1987년 6월 9일 시위 현장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연세대생 이한열. 그의 왼발에 있던 운동화는 사라졌고 - 다시 말해서 집회 현장에서 한 여학생이 주인 잃은 운동화를 주워 집회 사회를 맡은 학생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끝내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날들이 흘러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운동화가 이한열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것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 그의 오른발에 있던 운동화만 남았다. 다른 하나는 복원이라는 것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이다.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왜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그것은 복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복원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이한열의 운동화라면 그 운동화를 새것같이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한열의 발에서 벗겨진 그 상태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후 지금까지의 28년의 시간을 담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공산품의 하나인데, 굳이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어떤 방법을 써야 이 복원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해야 할 질문은 많고, 답을 찾기까지 고려하여야 하는 사항은 많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할 것 같은데, 여기에 다른 한 가지가 흥미롭게 끼어든다. 연관되는 듯, 혹은 연관되지 않은 듯한 다른 여러 사람의 이야기. 대표적인 것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주체인 '나'와 복원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양화 전문 복원가 '그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한 이야기.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치료하는 센터에 다녀오던 날, 버스를 탈 엄두가 안나고, 택시가 잡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까지 데려오던 날의 기억. 두 시간을 꼬박 걸어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아들 운동화의 왼짝과 오른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가, 오른발에 왼짝 운동화가 신겨 있었어요. 운동화 짝이 바뀌어 발 방향이 틀어진 아들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거예요. 그늘 한 점 없는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면서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아들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걸 생각하면...... 세검정 못미처, 아들의 오른발에 신긴 운동화 끈이 풀어져서 새로 묶어 주면서도 운동화 짝이 바뀐 것은 몰랐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운동화 끈이 또 풀릴까 봐 세게 당겨 묶으면서도요."(p.70~71) 아들은 이제 시설에 들어가 있고, 그녀는 가끔 꿈을 꾼다.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 꿈에서 그녀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아들의 왼발에 신기고 있는 운동화가 오른짝이라는 것을 알면서 신기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자신, 그렇게 쪼개져 있는 상태로.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말고도, 복원실 사람들, 혹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 의뢰하는 기념관장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보내온,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신문에 실린 L의 운동화 기사를 보았다는, 86학번이라는 익명의 사내가 보낸 메일도 있다.  

 

삼화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가, 영문으로 타이거(TIGER)라고 쓴 로고가 붙어 있던 그 운동화가 실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L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 p.216~217

 

이 이야기들 속에서 김숨은 묻는다. 그 운동화들,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였던 그 운동화들은 어디로 갔는가, 라고. 단지 L의, 그러니까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M의, J의, L의, K의, 그러니까 수많은 '나'들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그 운동화는 어디로 갔는지 말이다. 물론 김숨은 이때 단지 운동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6학번인 이 익명의 사내가, 하루종일 수없이 누군가를, 때로 자신을 혐오하다가도 체념하게 만드는, 각종 지긋지긋한 일들에 시달렸을 이 사내가 겨우 한숨 돌리는 마음으로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펴들고 그 안에서 우연히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고, 주저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 긴 메일을 쓰게 만들었던, 그가 가졌던 궁극적인 의문이 이 메일에는 들어있다. 그 운동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있었던 그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지금의 M도, J도, L도, K도,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그런 의문.

 

다시 말해서 김숨은, 그녀가 만들어낸 이 허구의 이야기들, 그러나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단지 끄집어냈을 뿐인 이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이 단지 역사적인 이야기로만 읽히기를 바랬던 것 같지는 않다. 즉 김숨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단지 역사적 유품, 혹은 기념물로만 보기를 원치 않아 보인다. 복원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면서, 단지 어떤 역사적인 가치로 그것을 박제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개인들이 그 '무엇인가'를 각자 끄집어내어 복원하기기를 이 소설은 바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간단하지 않다. 그 부서진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은 대체로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복원은 파괴 혹은 손상과 거의 동일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손상시키고 파괴한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 속 '나'가 소설의 중반이 넘도록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기를 주저하는 것, 그리고 그의 운동화에서 유기물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는 것은 아마도 그것에 맞닿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복원을 결국 회피할 수 없다.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인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이한열의 운동화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익명의 L의 운동화이기도 했고, M이나 J, 혹은 K의 운동화,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마음 속 어딘가에 이제 부서진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 복원이 필요한 그것은 무엇이며, 복원이 된 그것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한 형태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L의 운동화가 복원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그것을 본 '그녀'는 말한다. 지금도 꿈을 꾼다고.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리고 그런 자신이 쪼개져 있는 꿈. 그러나 그 꿈은 조금 형태가 달라져 있다. "셋이요.....아들의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를 신기는 나와......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그리고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그렇게 셋이요."(p.264)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나'들이 있지 않을까. 잘못된 무엇인가를 택하는, 혹은 잘못된 무엇인가를 행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나. 여기에 이제 또다른 '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 그 '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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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어떤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대학을 다니면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집회를 나갔던 날의 기억. 집회의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들은 어느덧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학교보다 시내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이상한 흥분감과 기대감, 그리고 불안감이 교차하는 사이, 점차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오늘 백골단이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사수대를 결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경험이 없던 1학년 학생들은 많이 불안해했고, 그 중의 하나였던 나는 아마도 더 불안해했던 것 같다. 내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늘 우리들을 이끌고 다니던 선배 하나가 말했다. "야, 너는 여기 사람들 가방 다 모아서 집에 가있어. 가방 매고 뛸 수는 없잖아. 너는 여기서 집도 가깝고."

 

나는 선배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을까, 아니면 쉽게 머리를 주억거렸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크고 작고 형태도 다양한, 여러 색이 울긋불긋하게 섞여 있던 가방들을 어깨에 매고,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그렇게 나는 지하철 몇 정거장을 거쳐 집으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가방들을 억지로 가지고 집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지하철 보관함에 가져다 두거나, 가까운 카페 같은 곳에 가지고 갔어도 되었을텐데. 나는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바보 같은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나는 집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열패감과 안도감이 교차했을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집에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까.

 

몇 시간이 지난 후 중간에 무리가 산산이 흩어졌는지, 혹은 무엇인가에 쫓겼는지, 아이들은 하나 둘 씩 우리 집 근처로 오거나, 드물게 전화를 해왔다. 오늘은 가지러 갈 수 없으니 나중에 찾아가겠다거나, 내일 학교로 가지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 근처로 왔고, 나는 하릴없이 그 때마다 가방을 들고 그들을 만나러 가야만 했다. 땀에 젖은 아이들의 얼굴은 번들거렸고, 지쳐보이기도 했지만, 별 거 없었다며, 단지 열심히 뛰기만 했다고 웃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입가에는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다른 것이 달려 있는 듯 했다. 같이 시내로 나갈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무엇인가가.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그들이 가방을 들고 나타났던 나에게서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무엇이었을까. 나야말로 쪼개졌으면 좋겠다. 가방을 들고 나타난 나와 가방을 찾으러 나타나는 나로. 그리고 어쩌면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나로. 

 

나는 무엇을 복원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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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발과 가방 … 우리 모두가 가지는 감상(感傷)과 계시(啓示)에 대해서
    from 공음미문 2016-09-08 23:17 
    벌써 20년 전이 되었습니다. 한여름 우울 속에서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었던 일이. 그 책에서 강렬히 남았던 몇몇 인상 중 하나가 ‘잃어버릴 뻔했던 한열이 조카의 고동색 샌들 한 짝’입니다. 길에 버려진 많은 것들 중 신발은 유독 사람을 애잔하게 합니다. 머리끈이나 볼펜을 발견할 때와는 분명 다른 기분입니다. 맨발로 돌아가진 않았을 텐데, 대부분의 버려진 신발은 ‘이젠 쓸모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멀쩡한 신발을 볼 때엔 ‘사고’를 떠올리게
 
 
희선 2016-07-08 0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L이 이한열이라는 걸 알아도 L은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무언가를 되살려야 하는... 저는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아니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느 날 아쉬웠던 일, 어느 날 잘못한 일... 이렇게 말하니 뭔가 생각날듯 말듯하네요 그런 건 아주 가끔 생각나기도 해요 잠깐 생각하고 말기도 합니다 어제도 걷다가 오래전 일을 잠깐 떠올렸네요 왜 그랬지, 하는... 그런 일 나중에는 안 하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르게 할지도...

둘로 나뉜 자신이라고 하니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이 생각나네요(여기 나온 건 아이가 어릴 때 그랬지만, 어린데 그러다니 싶네요 아니 어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건 생각나지 않고 그것만 생각납니다) 둘로 나뉜 자신을 말하는 게 그것만은 아닐 테지만, 여기에는 하나가 더 나오는군요 셋이라니... 꿈속의 꿈, 세번째는 잠자면서 그걸 바라보는 자신...

사람은 좋았던 것보다 안 좋은 걸 더 잘 기억하기도 하네요 살면서 좋았던 일도 있었다는 걸 기억하라는 말도 있고, 잘못한 걸 더 잘 기억해내라 하는 말도 있으니 둘 다 맞는 말이겠죠 어떤 일이냐에 따라 다를 것도 같네요


희선

맥거핀 2016-07-08 14:10   좋아요 2 | URL
인간의 기억이란 대체로 불완전하고, 또 매우 스스로를 속이기 쉬운 것이라서, 대체로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잊어버리고는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기억, 혹은 어떤 거대한 불행과 같은 것들 말이죠. 기억을 억압하는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자꾸 들춰내는 것은 어떤 고통을 동반하기에 그렇겠지요. 작은 사건도 그렇고,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같은 것들도 사람들이 자꾸만 더 이야기하지 마라,하는 것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겠죠.

하지만 어떤 사건은 기억해내는 게 아주 고통스러울 지라도, 기억해야만 하고, 다시 되살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 되살려야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복원가의 질문이고, 그리고 또 우리모두가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긴 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모두들 어딘가 하나쯤은 복원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을 너무 믿지 말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