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에 대한 스포 있음)
연휴 기간 2편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두 영화 모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보았지만, 한 편은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시 보았고, 한 편은 TV에서 하길래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극장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2편의 영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한편으로 송강호라는 출중한 배우가 두 영화 모두 극의 중심에서 거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두 명의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실존 인물들, 그 인물들은 송강호라는 육신을 입고, 거의 다시 스크린에서 걸어나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두 영화가 '상당히 닮았다'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송강호라는 배우의 절대적인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가장 크게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가 끝난 후 남아있는 어떤 묘한 '석연치 않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스크린 안의 두 인물, 그러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과 <변호인>의 송우석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두 영화는 초반부, 코믹한 터치로 두 인물의 소박한 속물성, 혹은 속물성 속에 드러나는 인간미 같은 것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가벼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그들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움직이게 하는 동력 같은 것들이 들어있으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에게 그것이 가족, 특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변호인>의 송우석에게 그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끝까지 무엇인가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다. 중반부의 큰 사건, 즉 <택시운전사>에서는 광주에서의 일들, <변호인>에서는 '부림 사건'이 그 인물들을 크게 변화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이나 의지와 같은 것들이다.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은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딸과 전화통화를 하며, <변호인>의 송우석은 계속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불어 넣는다.
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들에서 살짝 비껴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두 영화의 애초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말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인물을 빌려왔다면, <변호인>은 송우석(노무현)을 말하기 위해 '부림 사건'이라는 사건을 빌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 사건에서 두 인물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건에 비껴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사복은 택시 운전사, 그것도 광주 택시 운전사가 아닌 서울 택시 운전사이고, 송우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선 단골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즉 어쩌면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라 한 걸음 비껴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엇인가, 그러니까 마음이나 의지 같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약한 질문이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그들이 지켜낼 수 있었던 무엇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지켜낼 수 없었던 무엇인가는 선명해진다.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과 독일 기자를 끝까지 도와주는 광주 택시 운전사 태술(유해진)이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김사복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적었을까, 아니면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고문받는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의 위치에 서 있었다면 그의 의지는 산산이 부서졌을까, 아닐까.
영화는 물론 고약한 질문을 할 틈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조용히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 부여하고 있는 그 역할로서의 자세. 그렇다. 여기 두 영화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택시기사나 변호사가 아닌,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단순히 직업명 그 이상의 무엇을 이 제목은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각각의 영화가 키포인트로 내세우는 장면, 혹은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가면서 딸에게 하는 대사, 손님을 두고왔다,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송우석이 국가는 국민이라고 재판정에서 일갈하는 장면. 즉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 장면들은 이들에게 표면적으로는 직업인의 윤리에 가까운 것이다. 김사복은 광주에서 서울로 손님을 데려다주어야 하는 택시운전사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만 하며, 송우석은 변호인으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의뢰인이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국민이 아닌, 단지 쿠데타권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갈한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송우석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김사복에게는 더 가혹한 것 같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간 것은 단지 택시운전사의 직업윤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직업윤리 이외의 어떤 것, 이라고만 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않다. 그렇다면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김사복은 왜 광주로 돌아갔을까. (사실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송우석에게도 물어볼 필요는 있다. 그는 왜 진우를 변호하기로 결심했을까. 사무장의 말대로 앞에 놓인 편한 삶을 스스로 걷어차면서 말이다.) 독일기자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는 죄책감? 사람들, 특히 대학생 재식(류준열)을 버려두고 나왔다는 부채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재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돌아간 직후이다.) 어떻게든 바깥에 제대로된 소식을 알려야한다는 사명감? 아니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총체? 이 중 어떤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화 속에서 묘하게 눙쳐지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김사복이 운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제3한강교'를 따라부르다가 울면서 핸들을 꺾는다. 혹은 송우석이 부르르 떨면서 국가권력의 하수인에게 소리친다. 국가는 국민입니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각각 기억에 남을 한 장면, 혹은 송강호의 두 개의 명연기. 아니 나는 냉소적으로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송강호가 복잡한 얼굴로 울 때, 나도 곧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고, 송강호가 그렇게 법정에서 소리칠 때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사실 모든 영화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 송강호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어떤 석연치않음이 여기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지만,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눙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예를 들어 김사복이 기어코 핸들을 꺾는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왜 핸들을 꺾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잡한 답이 아니라, 그가 그 순간 핸들을 꺾어 돌아갔다는 (허구적) 사실, 송강호가 그 순간 보여준 명연기이다.
그 명연기를 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복잡한, 사실은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혹은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없는 복잡한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말할 수 있는 다른 케이스. (뭐 여러가지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영화 <택시운전사>와 같은 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말하고 있지만, 광주 그 이상을 궁극적으로는 말하고자 하며,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겹겹이 쌓인 물음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혹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숭고해질 수 있는가, 혹은 이렇게 숭고해질수도, 잔인해질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한 인간과 잔인한 인간은 분리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가,라는 등의 질문들. 그것은 분명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해보고 답을 찾아보려는 그 자세는 중요하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는 그 인간을 어쩌면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택시운전사>는, 혹은 영화 <변호인>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틈을 주지 않는다. 겨우 질문을 했다하더라도, 답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영화는 조용히 작은 승리로 나아간다. 그 작은 승리, 혹은 불완전한 승리는 묘하게도 직업인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 택시운전사는 결국 손님을 태우고 나와 정해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변호인은 완전한 무죄는 아니지만, 불완전한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에게 개인적인 에필로그까지 기꺼이 부여해준다. 그것은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발전된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 따뜻한 택시운전사로 살고 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에게 변호사 취급도 못받던 송우석이 변호사 99명의 변호를 받는 모습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작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작은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그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과 인물들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인간 존재 일반에 대한 어떤 물음들을 할 틈은 영화는 끝내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은 급격하게 주인공 개인적인 차원으로 재빨리 자리매김되며, 관객의 빈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뿐이다.
그것이 최근의 영화들, 특히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취하는 전략은 아닐까. 사건보다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 그 인물을 관객들로 하여금 재빨리 동일시하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불완전한 승리', 혹은 '작은 승리'를 부여하는 것. (물론 관객은 승리를 더 좋아하므로, 영화의 결말은 매우 불완전할지언정 어떻게든 승리의 구조가 된다. 어떤 것을 승리의 지점으로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뿐.) 그리고 우리는 인물의 편에 서서 그 '불완전한 승리'에 안도하면서 오로지 그 불완전한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혹은 설령 패배했을지라도 스크린 속에서 장렬하게 부활한 그들을 기억하겠노라고, 기억해서 언젠가는 '완전한 승리'를 얻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몇가지는 장담해도 좋다. 영화가 당신에게 주인공의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줄 때 영화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특히 송강호 같은 배우가 스크린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면 말이다.) 그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주려고 엄청나게 애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현실에서는 애쓰는 누군가, 스크린 안에 숨겨진 누군가는 없다는 것. 그 때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
덧.
영화관에서 나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분명히 좋게 보았다. 그것을 감흥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데 두 번째 볼 때에는 그런 감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 급격한 감흥과 급격한 무감함은 무엇으로 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