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성우, 넥슨, 게임, 웹툰, 메갈, 메갈4, 페미니즘, 일베, 오유, 정의당 등등 여러 키워드가 얽혀있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다만 이제 어떤 것이 간명하게 정리되는,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낼 수 있었던 세계는 진즉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사태는 동일하지만, 동일한 사태를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지지할 수 있는 지점과 지지할 수 없는 지점은 미세하게 갈라지고, 차이가 생겨난다.
그것은 물론 이 일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경험과 성향,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 가지고 있는 정보량 등에 따라서 거의 어떠한 사건이든, 그 사건을 보는 개인의 관점은 수백, 수천가지로 갈라진다. 그리고 바로 그 관점이라는 것이 다시 사건에 영향을 미쳐 사건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거의 모든 사건들에는 늘 그것을 요약하려거나 정리하려는 시도, 혹은 간편하게 전선을 재정비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것은 대체로 어떤 것을 정리하거나, 간명하게 만들려는 이 시도 자체가, 사태를 왜곡시키거나 어떤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건에서도 이 관점들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다. (이것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는 자체가 어쩌면 그 관점들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크지 않은 관점의 차이를 면밀하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바로 그 미세한 차이들이 건설적인 논의로 갈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에서 이 선긋기 시도들은 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선의 이편인가, 선의 저편인가. 당신의 관점을 명확하게 밝혀라.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지지자, 혹은 어떤 반대자라는 낙인을 찍은 후, 선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혐오하는 퍼포먼스에 재빨리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이 메커니즘은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복잡해진, 어떤 것도 사실은 간명하게 정리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별다른 스포는 없으니 읽으셔도 된다.) 영화에서 악의 축(?)인 양복남 용석(김의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석우(공유)에게 공격당하자, 냅다 소리부터 지른다. "이 새끼 감염됐어!" 그리고 그 순간 효과적인 전선이 만들어져 재빨리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외침은 예를 들어 이것과 매우 닮았다. 이 새끼, 빨갱이야! (여기 '빨갱이'에 다른 적당한 것을 넣어도 효과만점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 혹은 '종북'만한 게 없다.) 그렇게 선을 긋는 것. 좀비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 <부산행>은 내게는 어떤 정치적인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차의 수많은 객차들과 각 객차들에 갇혀 있는 좀비들. (예전에 '촛불 좀비'라는 말을 여기서 떠올려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리고 좁은 창문을 통해 저 너머 좀비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편의 정상인들. 그러나 과연 이편이 정상이고, 저편이 좀비인 걸까. 그런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