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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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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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1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 하다가 한 마디를 붙여놓는다. 그러니 사실 이 이야기는 (하루키의 많은 이야기가 사실 그러했듯이) 김난도 식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나 성찰보다는 늘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견디는 법이나 휩쓸리지 않는 법을 얘기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무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 다른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선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 때 나는 하루키의 많은 책들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 당시의 많은 책들은 분노하는 법을 가르쳐줬지, 자신을 스스로 위무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색채가 없는...>은 하루키의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여전히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지만, 적극적으로 비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예전의 작은 위무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해두자.

걸리는 부분 중에 하나는 예를 들어 책 안의 강조점과 같은 부분들이다. 하루키의 소설 혹은 에세이들에는 늘 강조점(글씨체가 바뀌는 것 같은)들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떤 글이든 중간에 색을 바꾼다거나 글자체를 바꾼다거나 하는 강조가 들어간 글들을 잘 읽지를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강조는 결국 읽는이가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hining 2013-08-2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하다 (저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이번 리뷰는 본문보다 덧과 댓이 조금 더 좋네요.

맥거핀 2013-08-23 17: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hining님 요새 많이 바쁘신가봐요. 서재에도 뜸하시고...바빠도 건강 잘 챙기세요. 저는 요즘 여름감기로 애를 먹고 있어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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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파과'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破果, 그러니까 으깨지거나 뭉그러진 과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게 되는 서효인의 <저글링>에 나오는 짧은 글귀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미련을 더 이상 두지 않는 과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년의 여성 킬러는 냉장고 안에 언젠가 넣어두었던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의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버리기 위해 조각을 모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음을 내뱉는다. 으깨진 과일 같은 것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신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으깨진 과일일 것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뭉크러진, 한 때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처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아니,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별명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조각, 복숭아 조각,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달라붙어 잘 떼어내지 않는 복숭아 조각.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손톱 조(爪)에 뿔 각(角)인 조각, 다시 말해서 각이 진 손톱, 혹은 날카로운 손톱.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유능한 킬러였으며, 맡은 바 임무를 무리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솜씨좋은 재주를 가진 방역업자였다. 그녀에게 손톱은 치장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이전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손톱 조'라는 한자의 생김새는 조금 재미있는 데가 있다. 손톱 조(爪)자 밑에 삐침을 하나 붙이면, 오이 과(瓜)자가 된다.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손톱 조(爪)'란 '오이 과(瓜)'가 깨어진, 혹은 파괴된 것이다. 즉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를 통해서 연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파과(破瓜)'다. 이 파과(破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관된 여러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일단 파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한다는 것으로 오이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 2개가 되어 그 두 개를 합한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동시에 파과라는 말은 여자의 처녀막의 상실, 즉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됨, 혹은 월경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16세, 혹은 사춘기, 청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파과란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깨지며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시기다. 그 파괴되는 무엇인가를 단순히 처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순수함이나 그간 자신의 주위에서 애써 유지되던 세계, 헤르만 헤세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조각 역시 그런 나이에 그녀 주위의 세계가 부서져 나갔다. 당숙의 집에서 나름의 세계를 더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균열점들은 알을 조각냈고, 그녀는 모든 것이 깨지려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본능을 발휘하여 방역업자로서 거듭났다. 즉 그녀는 이중의 파과(破瓜)를 맞았다. 의미로서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파과를 맞이하였고, 글자로서도 오이 과(瓜)가 깨어진 손톱 조(爪), 조각(爪角)이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조각이 났다. 조각난 삶을 겨우 지탱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류의 존재였다. 류는 세상과 그녀를 연결하는 접착제, 끈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갈 곳 없이 내버려진 그녀를 지탱시키는 심리적인 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였고, 그녀가 류의 지시를 받아 방역업을 해나간다는 업무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어쩌면 류와 뭔가 불안한 무엇일지라도, 행복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깨진 세계는 또다시 쉽게 깨질 수 있는 법.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겨지는 류의 말들과, '무용'이라는 늙은 개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깨진 조각이 다시 무엇인가를 붙여나가는 이야기이다. 무엇으로 무엇을 붙여나가는 것인가. 뭐 강박사라고 해도 좋고, 해니라고 해도 좋고, 투우라고 해도 좋고, 손톱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종장에 등장한 어느 네일샵의 이름모를 어린 막내 여직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 노년의 여성 방역업자는 자신의 손톱 위에 무엇인가를 덧씌운다.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다른 색과 무정형 도안이 불꽃놀이처럼, 혹은 과일 열매처럼 퍼져 나가는 인조 손톱. 그리고 네일샵의 원장은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막내 여직원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지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렇게 조각은 무엇인가를 붙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조 손톱이라고 해도 좋고, 막내 여직원과의 이상해보이는 공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붙여나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에 그녀가 네일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서 나왔거나, '서장'에서 벌어진 현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하철에서의 어떤 소동들, 그러니까 나이든 남자와 젋은 여인이 자리를 두고 시비를 붙고, 50대 여인은 중재에 실패하며, 젊은 임부의 낭패한 얼굴과 눈물을 덤덤히 견뎌낸 조각이 방역업에 결국 성공하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붙지 않을 것만 조각이 점점 무엇인가를 붙여나간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여성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당숙 집에 얹혀 살던 소녀에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친척언니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으며, 류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 역시 류의 아내 조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는다. 강박사가 붙고, 강박사의 부모와 해니가 붙고, 길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이 붙고, 결국에는 투우도 붙는다(이를 가족을 잃은 자들의 이상스런 연대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가족(류)을 잃은 조각과 아내 혹은 엄마를 잃은 강박사와 해니,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투우). 그러니 그녀가 네일샵의 막내 여직원과 이상한 연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관계에 있어서) 무용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방역업에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무용'하다. 그녀가 키우던 늙은 개의 이름처럼 말이다. '무용'이라는 개는 그녀의 어떤 단면이다. 예를 들어 개 '무용'은 '현관에 정좌하여 돌아온 주인을 향해 꼬리를 예의 바르게 흔들기는 하지만 뛰어올라 몸에 달라붙으려고 하거나 코를 비벼대지 않'으며, '무념무상의 도를 실천하며 달관의 몸짓으로 주인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 '무용'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은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용(無用)'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쓸모없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파과(破瓜)함으로써 조각(爪角)이 되었고, 그 조각들은 결국 파과(破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붙여나감으로써 다시 그녀는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새로운 파과(破瓜), 또는 합과(合瓜)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번째 파과는 그녀를 다시 조각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손톱 위에 인조 손톱을 붙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대로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일 것이다.

 

 

덧.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종장'이다. 아마도 이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게도 영화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수습이나 될 수 있을까 싶던 이야기(사실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 마지막들이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고령화가족>이나 소설 <파과>나.)에 붙는 너무 희망적이라 도리어 믿고 싶어지는 에필로그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이 너무 말들이 안된다고 머리에서 말해주는데, 마음에서는 이상하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 참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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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8-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 맥거핀님 소설 리뷰다아.. ^^ 얼마전에 뒹굴거리다가 <고령화 가족> 영화로 보는데 예전에 봐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소설보다 더 단조롭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느껴졌어요. 하찮은 시나리오에 거물급 배우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듯한 기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소한 작품에 나오는 이름있는 배우들이 고맙게 느껴졌어요. 저 '파과'의 의미를 해석하는 이벤트가 어디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읽어보려다 말았습니다..

잘자요, 일찍일찍 자요, 맥주 마시지 말고요!

맥거핀 2013-08-10 16:38   좋아요 0 | URL
<고령화가족>을 만든 송해성 감독의 영화는 사실 다 구려요. <파이란> 같은 것도 말이죠. 근데 이상하게 그 영화들을 까지를 못하겠어요. 이 영화들에는 뭐랄까, 어떤 따듯한 정서랄까, 인간에 대한 예의랄까 같은 게 스며들어 있어서 그래도, 괜찮잖아?라고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어요.

사실 <고령화가족>도 좋은 원작에 좋은 배우들 데려다놓고 만든 것 치고는 상당히 말아먹은 영화고, 마무리도 참 이상했지만, 저는 나름 좋았어요. 그래도 감독이 인물들에 대해 애정이 있구나 싶어서요.

아..이벤트 있었죠. 녹즙기 주는 이벤트였는데, 저는 왠 녹즙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았습니다. (파괴된 과일이니 갈아서라도 먹어라, 뭐 그런 걸지도..) 녹즙기보다는 맥주가 좋습니다. 맥주 주는 이벤트였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썼을텐데.

아이리시스 2013-08-12 12:43   좋아요 0 | URL
이건 좀 아줌마 잔소리 같지만.. 술에 영혼을 팔면 안됩니다. 술 안마신다고 반드시 건강하다는 법도 없지만, 술을 거뜬히 감내하려면 그만큼 몸에 좋은 걸로 해독작용도 시켜야 해요. 요즘은 음식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거 믿고 있어요. 여러번 겪었고. 저는 건강염려증 환자는 아니지만 오래 전에 큰아버지 돌아가신 가족력도 있고 아빠도 워낙 술을 좋아하셨고 사업차 많이 드셨고, 두려운 순간이 많았어요. 제가 아빠딸이면 완전 술꾼일텐데 엄마체질을 더 많이 닮아서 몸에도 잘 안받아요. 그래서 저도 제가 못마시는 줄 알았는데 웬만한 여자들 평균만큼은 거뜬히 먹더라고요. 놀러가서 술술 하는 친구들은 제가 못 먹는 줄 알지만 전 그냥 못 먹는다고 해요. 시집도 안갔고 태어날 애기도 걱정되고 원래 튼튼체질이 아니라서 둔해질 머리도 염려스럽고.. 어느새 건강염려증 환자.

그래서 모두 정도껏인게 좋아요. 녹즙기, 맞다, 녹즙기. 그건 웬만해선 집에 있는 거라서 관심 덜하겠네요. 녹즙기가 문제가 아니라 갈고 분리하고 씻고 말리고 그게 더 짜증.

아이리시스 2013-08-12 12:48   좋아요 0 | URL
근데 이런 얘기 왜 했지. 맥거핀님 술꾼인지 아닌지 저는 모르잖아요. 으히히. 갑자기 술론이 나와버렸어요. 아, 책 말이죠, 신용카드 요즘은 인터넷서점들 무이자 할부 카드 없더라고요, 거의. 맨날 3개월 해놓고 한 달에 한 세 번 사버리면, 아니 왜 할부는 했냐고요ㅋㅋㅋ

맥거핀 2013-08-13 22:51   좋아요 0 | URL
으하하..저 술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술꾼이라고 불릴 급은 아니고, 그냥 잡스러운 정도입니다. '술꾼'이라고 하면 왠지 좀 아티스트 같은 느낌이 있잖아요? (아..나만 그런가..근데 술꾼도 급수가 있어요. 조지훈 선생의 주도 18단계인가 뭔가 있는데, 그 구분에 의하면 저는 한 2,3급 정도?)

으히히..기껏 걱정해주셨는데, 한다는 소리가 무슨 2급이니 어쩌니 하니까 한심스럽지요? 하긴 뭐 술이 몸에 안 좋은 건 다 알죠. 되도록 안마시는 방향으로 가기는 해야죠. 아이리시스님은 술이 몸에 안 받는다니 복받은 겁니다. 그냥 안받으니까, 안먹어요, 이게 젤 좋아요. 그러니 그냥 좋은거임.

신용카드는 그러니까 일시불로 질러야함..괜히 책 값 같은 거 3개월 할부로 끊어봤자, 3개월 후에 카드값은 나가고 있는데, 책은 안 읽고 그대로인걸 보면 속 터진다니까요. 최근에는 책은 되도록 가지고 있는 책 중고로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사거나 적립금 받은 걸로 사거나, 아니면 되도록 중고로 사자고 생각하고 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요. 대학 때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말자'고 원칙을 세웠는데, 그 때 '단 반드시 읽을 것'이라는 원칙을 같이 세웠어야 했어요.

술값을 줄이면 책을 그만큼 많이 살 수 있겠죠? @.@


아이리시스 2013-08-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정원이다 ㅎㅎ

맥거핀님하고는 이런 게 어울림.







맥거핀 2013-08-17 16:40   좋아요 0 | URL
아니..저것은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저 보기보다 감성적인 사람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어느덧 맥주에 눈이 돌아간 나를 발견하게 됨..)

사진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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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이란 것은 참 이상한 것이, 하고 있을 때는 매번 책을 고르고, 안되는 머리로 서평을 짜낸다는 것이 꽤나 힘겨운 일처럼 느껴지는데, 막상 끝내고 다음 기수의 활동을 보면 매번 부러움에 빠진다는 사실이고, 늘 아..왜 나에게는 저런 책이 오지 않은걸까, 저런 책이었으면 조금 더 의욕적으로 썼을 수 있었을텐데,라고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늘 궁금해지는데, 정말로 다음 기수에는 책이 좋아지는 걸까, 아니면 그건 단지 시기심어린 나의 착각에 불과한 걸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어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기심이라는 답이 싫어서 정말 책이 좋아지는 것이라고 편하게 믿어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책을 골라내지 못한 내 책임도 최소 1%는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마선생님의 말씀이 맞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사는 것은 아니며, 오늘은 오늘의 행복을 찾아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한다는 것. 그것은 초딩들도 아는 거고, <여왕의 교실>을 보며 옛일이 생각나 없는 눈물콧물 찾아내 흘린 나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책을 고를 수 있는 행복'이라는 오늘의 행복을 찾아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조금 더 나은 최선을 보였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책 내용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이렇게 새벽 2시가 넘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쓰는 부실한 추천 페이퍼가 그나마 최선이다. 적어도 마감기한인 8월 5일까지는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지금 나는, 첫 추천 페이퍼부터 이래서 죄송하지만 다음부터는 서점에서 책도 좀 만져보고 성실히 올리겠습니다, 라는 변명을 길게 늘여서 변명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중이다.  

 

 

 

 

자연과 인간 / 가라타니 고진 / 비

 

변명에는 꼼수가 세트인 법이다. 책을 제대로 들춰보지도 않고 책을 추천하는 꼼수 중의 하나는 믿을 만한 저자의 책을 고르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라면 감히 '믿을 만한 저자'라고 불러도 괜찮겠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 천정환, 소영현, 임태훈 외 엮음 / 푸른역사

 

아니면 믿을 만한 출판사의 책을 고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푸른역사'의 책들을 좋아한다.

 

  

 

폭격 / 김태우 / 창비

미완의 파시즘 / 가타야마 모리히데 / 가람기획

 

그것도 아니면, 믿을 만한 분의 추천을 참고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로쟈님이 추천하신 책이거나 네오님이 첫등으로 올려놓으신 책이니 믿을만 하겠지.

 

 

패션:철학 / 라르스 스벤젠 / 도서출판 Mid

 

그래도 마지막 한 권은 '실용적으로' 필요한 책을 골라보자. 어떻게 그렇게 매번 TPO를 각각 모두 빗나가는 패션테러를 감행하느냐고 묻는 어떤 이들에게 이것이 나름 철학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개드립을 치고 싶어서 골라봤다. 물론 그래봤자 거울이나 한 번 더 보고 오라느니, '패완얼'이라느니 하는 타박을 들을 테지만.   

 

 

...

<여왕의 교실>의 마지막 장면들을 보고 떠오른 어떤 옛추억들에 대한 글들을 쓰다가 이상하게도 눈물이 찔끔찔끔 나와 다 지워버렸다. 언젠가 쓸 기회가 있겠지. 아.. 어쩌면 너무 졸려서 나온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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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8-0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비..비..비가 뭐예요? :)

그거 알아요? 내가 말을 안했으니 모를거야.. 말하면 부정타서 더 안올까봐.. 윗지방 사람들이 그렇게 비가 지긋지긋하다고 했죠? 저는 비가 뭔지 까..까..까먹었어요. 한번도 안왔어. 5일이면 장마 끝이라면서요? 저는 장마는 7월 시작과 동시에 끝난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한번도 안올 수가 있죠? 수재로 사람들이 다치거나 상처입지 않은 건 참 고마운 일인데..그런데..

아..마지막회 못봤어요. 어제 한 드라마들.. 이거 신간평가단 맥거핀님 봤지롱. 새삼 추카한다고 말하기가 너무 간질간질했지만 그래도 추카해요. 잘 해보도록 해요. 그러다가 좋은 책 있으면 제가 달라고 징징대면 보내주도록 해요. 저는 알라딘신간평가단의 어마어마한 벽을 뛰어넘을 그런 리뷰어도 아니지만 요즘 너무 책도 많이 샀고 또.. 안쓴 리뷰도 많고..(응?) 별로 쓸 말도 없고.. 쓰기도 싫고.. 읽기도 싫고..

우리가 어릴 때 말예요, 마선생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좀 다르게 자랐을까요? 미리 겪고 미리 다 알고 미리 느끼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고 내 인생도 충분히 빛나게 그렇게 모든 시간을 찬란하게 보냈을까요? 아..그저께(마지막회 전날) 마지막부분에서도 울컥했는데, 저는 울지는 않았어. 학창시절에 힘든 일이 별로 없;; (철이 없어서요)

맥거핀 2013-08-06 17:27   좋아요 0 | URL
며칠 동안 비가 안온다고 좋아했는데, 오늘 또 서울에 폭풍이 왔어요. 요즘에는 비가 한 번 오면 무서울지경..아까 막 비가 쏟아지는 것 보며, 서울에 헬게이트가 열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동네에는 그렇게 비가 안왔나요? 제가 며칠 전 일이 있어서 지방에 갔다왔는데 거기는 비가 꽤 오던에..(거기는 전라도 쪽)

<여왕의 교실> 다운 받아 놓고 틈날 때, 자기 전에 조금씩 복습하고 있어요. 저는 이 드라마가 왜 그렇게 좋은지요. 드라마 자체로도 좋고, 정말 옛날 일들이 생각나게 있어요. 마선생님을 만났다고 해도 이보다 크게 나은 인간이 되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요즘에 책 잘 안봐서 신간평가단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막상 또 하려니까 좀 걱정이 되기는 하네요. 제가 잘 끝낼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응원하는 거 봐서 뭔가를 줄지 말지 결정을...(가 아니라, 나중에 보고 싶은 책 있으면 얘기해요. 아님 혹시 예전에 제가 여기에 리뷰를 썼던 책이라도..^^)

2013-08-0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서평단 또 하시는군요! 취향이 이쪽이신가 봅니다. 제일 어려워 보이는데 늘 이쪽 하시는 거 보면...ㅋ

맥거핀 2013-08-06 17:28   좋아요 0 | URL
아..섬님 오랜만입니다. (얼마 전에 들렀더니 서재가 너무 깨끗해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근데 진짜 농담 아니고 다른 쪽 분야는 쓸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그나마 뭐라도 끄적거릴 수 있는 게 이쪽...ㅋ

yamoo 2013-08-0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맥거핀님의 서평단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납니다. 저도 한 때 그랬거든요~ 마감시일을 지켜야 하는 글쓰기는 정말 싫더라구요..그래서 전 더이상 책받고 리뷰쓰기 참여를 안한다는..



패션:철학은 예상보다 건질 게 별로 없습니다. 책을 실제 보면 다량 실망하실 거 같다는^^ 제가 책 보고 출간 이벤트 갔다 왔거든욤~~ㅎ

맥거핀 2013-08-06 17:32   좋아요 0 | URL
yamoo님도 오랜만입니다. 저는 마감기일이 있어야만 뭐를 하는 인간이라...심지어는 영화도 마감할 때쯤 보려고 아껴두는 중..(설국열차 ㅋ)

아..그런가요? 출간 이벤트 그런 것도 하는군요. 또 뭐 알아듣지도 못하는 패션 용어만 가득한 그런 책인가...뭐 근데 이제와서 책을 바꿀 수도 없고 그냥 밀어붙여 보겠습니다. 사실 어차피 안될 것 같기도..

가연 2013-08-2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다시 같이 서평단 하게 되었군요, 아하하..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맥거핀 2013-08-28 19:30   좋아요 0 | URL
네..가연님도 알라딘에서 뜸하시기는 한데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보니 예전에 서평단 같이 하셨던 낯익은 닉네임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저는 가연님을 비롯한 그 분들의 좋은 글에 묻어가면 되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2013

 


(스포일러)

 


1.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더 테러'가 아니라, 아무래도 '라이브'인 것 같다. 영화에서 거대한 규모의 '테러'를 보여주는 것은 이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 되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 영화에서 선택한 방법론은 '라이브'이다. 이 '라이브'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볼 때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영화의 내용상, 이것이 테러를 방송국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 테러를, 이 이야기를 관객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들이 조금 있는데, 이것이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라이브를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미드 <24>는 드라마 전체를 'Real Time'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는데, 이 때 한정된 시간을 보충해주는 것은 동시 화면, 혹은 화면 분할이다. 즉 이 드라마에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는 것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할 화면이다. 그런데 이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한정된 시간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공간마저도 한정시켜 버린다. 즉 카메라는 윤영화 앵커(하정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부스만을 비추고, 모든 사건들은 그 공간을 거쳐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은 모든 사건을 윤영화의 눈을 통해서 본다.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라디오 부스의 창을 통해서, 혹은 거기에 설치된 TV화면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는 영화의 끝까지 이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장면들을 보여줄 법도 하지만, 끝끝내 그 라디오 부스 안에서 머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한편으로 연극과 같아지는 부분이 있다.)

이를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영화라는 것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과거의 사건을 보거나,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볼 때, 그것은 일종의 관객을 향한 속임수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그 순간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객도 그 속임수에 대해서 화를 낼 이유란 없다. 우리는 영화관에 속으러 가며, 기꺼이 그 속임수를 즐기기 위해서 가기 때문이다. 도리어 어떤 속임수도 없다면, 우리는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종의 영화가 가지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영화의 장점'이라는 것을 시원하게 내던져 버린다. 물론 이는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그럼으로써 감독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도박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계속 윤영화와 같이 이 라디오 부스에 갇혀있다. 즉 관객은 그가 알게 되는 것만을 알며, 그가 모르는 것은 영원히 계속 모른다. 그런데 관객에게 장소와 시간을 한정시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정보를 제한시킨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TV속 앵커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왜냐하면 사건의 초기 정보는 제한적이고, 우리는 계속 다음 정보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의 심리가 이 영화에도 작용을 한다.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며 이 끝나지 않는 뉴스('NEW'S)를 계속 들여다본다. 이것은 또한 부차적인 효과를 낳는데, 관객을 윤영화에게 쉽게 동화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윤영화 앵커가 되어 매순간 판단을 해야하는 위치에 놓인다. 테러범도 잡고, 사람들도 구하고, 자신의 위치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도박이 성공을 거두게 하는 것은 이어지는 사건의 치밀한 구성이다. 아무리 예능이나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라이브와 핸드헬드를 관객들에게 연습시켰다고 해도, 단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면, 이는 사실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고 흥미를 잃게 만들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을 실시간으로 찍어 영화로 보여준다면 일부 시간 많고 호기심 많은 심리학자들의 흥미를 끌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어지는 사건들을 밀도 있게 구성하여 관객을 기어코 계속 영화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즉 관객은 각각 나름의 윤영화 앵커가 되어 이 테러에, 혹은 테러의 중계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간에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에서 이 영화가 스릴, 혹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영화라는 것의 장점'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영화가 쉽게 내던져 버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인물은 별안간 등장하고, 별안간 사라진다. 즉 이 인물들에게는 그 앞의 이야기(전사)도 없고, 그 이후의 이야기(후사)도 없다. 주인공 윤영화 앵커부터 방송국 국장(이경영), 테러 대책반장(전혜진) 등등의 주요 인물들 및 모든 인물들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거기에 이미 존재하거나, 나타나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할 일들을 마치고는 또 아무런 설명이나 뒷 이야기 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실시간과 한정된 장소를 표방하고 있다면 당연한 부분이고, 아마도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스릴 있게 테러를 보면 되었지, 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라며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가 순간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가지는 인상만으로도 스릴을 구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인물들의 전사나 후사 혹은 다른 디테일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영화에 속도감을 부여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누군가를 알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테러범이 테러를 벌인 이유는 영화의 시작부에 이미 관객들에게 반복하여 주입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하나,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애도를 보내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 부품처럼 처리되어 버려진 인간들, 그들을 단지 버려진 부품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으로서, 인생사를 가진 고유한 인간으로서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하나의 기계 톱니바퀴처럼 다룬다. 인물들은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적당한 임무를 수행하고, 또 적당하게 떠나버리고, 영화는 잘짜여진 톱니를 가지고 스무스하게 굴러간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 혹은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극적인 언론에 대한 부분이다. 사건을 혹은 자살을, 혹은 누군가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는 이 (실제의) 일부 언론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의 도덕적인 붕괴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예를 들어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사건의 어떤 자극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 부풀리며, 정작 사건의 중요한 부분들이나,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보는 이들에게 먹히기 때문이며, 일단 닥치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뉴스를, 혹은 자신들의 보도 프로그램을 감각적인 자극에 빠져있든,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에 빠져있든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이며, 단지 높은 시청률 혹은 구독률 수치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의 전략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도 썼지만 이 영화를 관객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관객을 주인공에 이입시키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이어지는 사건들에 있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고, 강도는 점점 강해지며, 테러의 규모는 확대되고, 자극적인 죽음은 점점 눈앞에서 전시된다. 이것이 결국 영화를 끝까지 보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언론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자극적인 뉴스를 볼 때와 동일한 무엇인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방송국 국장은 78%의 시청률을 찍은 후 웃음을 지으며 퇴장한다. 그때 그 웃음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78%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방송국 국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방송을 본 시청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혹여 이 영화가 780만을 찍게 된다면 감독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미 이 영화를 본 나는 왠지 그 웃음이 좀 껄끄러울 것 같다.

 

 
3.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건 뉴스를 보는 것이고,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이잖아요. 누군가의 진짜 죽음을 실시간 뉴스로 보는 것과 누군가의 가짜 죽음을 영화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겠어요? 물론 그것은 맞는 얘기다. 그건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즐기러 때로 영화관에 가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죽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맞는 얘기다. 단 그것은 영화가 명백히 판타지를 표방하고, 그것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칠 때만이 그렇다. 정해진 틀 안에서 이미 약속한 규약을 가지고 게임을 해 나가는 것이 영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속임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신체분리마술에 속임수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기어코 현실이 되려고 애쓴다. 현실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속임수를 지우는 것이다. 주인공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보게 할 것, 그가 알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게 할 것, 그가 흐릿한 화면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면 관객들도 흐릿한 화면으로 보게 할 것, 그가 죽는다면 영화도 끝날 것, 어떠한 위안이나 위무도 없이. 그러니까 여기에서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라이브로 봐야 하나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답은 이렇다. 그것이 극도의 스릴을 주니까. 너는 그 순간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니까. 그러나 영화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관객에게 스릴을 주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을 쓰면 된다. 그것은 그에게 칼을 쥐어주고 실제의 누군가를 죽이게 하거나, 혹은 그의 반대로 관객의 등 뒤에서 칼을 손에 쥔 누군가가 쫓아오게 만들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관객의 앞에 누군가를 불러 놓고 그를 '라이브'로 죽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고, 나는 기분나쁜 농담을 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된 형태는 있다(그것을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은 스너프 필름이다(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내가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극도의 스릴이라는 끝에는 스너프 필름이라는 지옥에서 온 망령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과연 스너프 필름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는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이 도처에 널려 있다. 미국의 경우 범죄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전 한 종편 방송이 자살 소동을 생중계함으로써 위대한 첫발을 내디뎠다. 이런 것들이 과연 스너프 필름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스너프 필름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가 스너프 필름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그런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테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내용을 그 비판하고자 하는 형식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나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비판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깝다. 사회에 만연한 모순의 화법들, 예를 들어 남의 신상을 까발리는 해커 그룹이 본인들은 '어나니머스(anonymous)'라는 이름을 쓰거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을 퍼붓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걸러 내면서 정신병적인 차별 논리를 사용할 때 나는 사실은 조금 당황스럽다.

4. (영화의 결말에 대한 부분이 집중되어 있으니 보지 않으신 분은 패스하시길.)
물론 그런 모순의 화법은 이것만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부분 즉 인물을 단지 하나의 닳아지면 버리면 되는 톱니바퀴로 보지 말자고 하면서, 기계부품처럼 다루는 것도 해당되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였던 윤영화 앵커와 테러범은 마지막에 이르러 감정적인 연대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조금은 수상쩍다. 그 연대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윤영화를 테러범의 위치에까지 끌어내려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윤영화는 사회적인 지위도 잃고, 가족마저 잃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족을 잃은 테러범과 동일한 위치가 되어 감정적 연대에 성공한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끊어진 마포대교에서 겨우 걸쳐져 있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주위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끌어내고 물에 빠진 가장의 모습과 같다. 전쟁터와 같은 사회 속에서 결국 최종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 뿐이며. 그것 마저도 약자들의 연대 없이는 최소한의 성공도 이루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대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결국 실패한다는 것. 테러범은 기어이 추락했고 그들은 여전히 깨진 TV속에서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윤영화가 홀로 남아 빈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것을 테러의 완수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의 되돌이표이다. 사실 처음에 우리는 이미 이 영화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한다. 테러는 어쨌든 끝날 것이고, 테러범은 잡히거나 죽을 것이다(그리고 잡혀서도 결국에는 사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왜 이런 뻔한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는지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가족을 잃은 윤영화에 의해 마저 수행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우리는 비슷한 결론을 예상할 수 있다. 윤영화는 죽을 것이고, 혹여 운좋게 살아남아도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테러범이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를 또하나의 윤영화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로 대체한 것이다. 작업은 조금 지연되겠지만, 공정에는 그다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이 그러므로 일종의 체념이자 자살로 보인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 남은 마포대교가 결국 무너지고 그렇게 애써 구해낸 아이들도 결국 물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여기에서 다른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는 하필이면 마포대교에 폭탄을 설치한다는 것일까? 그가 대통령의 사과를 받으려하면서 마포대교의 시민들과 윤영화를 인질로 잡는 것에 담겨진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문제가 남는다. 물론 우리는 이 체념이자 자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거기에 담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분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말한다. 내가 여기서 죽을테니, 당신은 나의 죽음을 널리 알려달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가질 파급력의 강도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를 구하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달려가서 우리는 그를 구해야만 하고, 이것이 영화라면 그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일종의 명령에 가깝다. 

5.
그런 영화적인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과 비슷하다. 마술의 어떤 속임수를 낱낱이 알게 되면 처음에는 즐겁겠지만, 결국에는 모든 마술이 시시해진다. 그저 적당히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단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몰라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신체를 칼로 자르는 것이 속임수임을 아예 모른다면 그는 공포에 질려 이 마술을 아예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현실을 다루지만, 그 현실은 영화적인 현실이다. 이것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지면 개연성이 없다고 하거나, 아무리 영화지만 지나치게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영화는 현실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어떤 영화들이 너무 현실에 비척비척 가까이 갈 때 무서워진다. 보지 않아야 되는 것, 예를 들어 실제로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게 될 것 같아서다.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는 것이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웁니까, 그렇습니까? 줄곧 나쁘다고 말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화를 즐기게 만들다가 끝내 그 주인공을 체념시키는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열어서 안되는 것을 점점 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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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8-0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신기하게도 하정우는 신작을 보기도 전에 또 신작이 나와요. 그래서 알았는데 저는 영화를 아주 사랑하는 편은 아닌가봐요. 요즘은 그냥 귀찮지만요. 미..미안합니다. 이런 댓글이라서..

맥거핀 2013-08-06 17:35   좋아요 0 | URL
본문에는 안썼지만 하정우 연기가 전체적으로 꽤 괜찮기는 해요. 사실 이 영화에 맞는 다른 배우를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는 생각도 들구요. 굳이 따지면 이병헌 정도..? 근데 이병헌도 앵커 캐릭터로는 좀 그래서..

그런 댓글?도 좋아요. 아이리시스님 아니면 댓글 달아줄 사람이 없다니까..
 
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1972년 2월 28일, 각종 테러와 범죄, 파괴활동방지법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연합적군의 최후의 생존자 5명 전원은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10일 동안 산장의 여주인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상은 드러난 듯이 보였으며, 이들에게는 긴 수형생활만이 남은 듯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숨겨진 나머지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은 경찰은 물론 전 일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사마 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균나이 23.3세의 일단의 젊은이들은 산속의 비밀 기지로 들어갔고, 그 숨겨진 공간에서 두 달 동안 총 31명의 연합적군 멤버 중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연쇄살인마라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죽음의 바이러스라도 퍼졌던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팩션이나, 김전일 소년의 사건기록부에나 등장할 법한 이 사건은 언론 및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아사마 산장에서의 진압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이는 최고 89.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건의 양상이 밝혀진 직후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퍼트리샤 스태인호프의 책 <적군파>는 이 사건을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 및 증언, 그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그간 쏟아져나온 각종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건의 미스테리 및 어떤 기이한 부분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가진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하나는 이것이 단지 그 사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나 르포 작가가 아니고,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요소, 그 사건의 어떤 구조적인 형태, 그 사건과 사회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사건 그 자체 못지 않게 그러한 부분들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적군이 벌인 이 아사마 산장에서의 농성과 내부 '숙청'은 좁게는 당대의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 및 폭력적 사회변혁 운동, 그리고 해외에서 벌인 요도호 그룹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일본적군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등의 거대한 테러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넓게는 일본의 현대사 전체와 일본인들의 어떤 정신적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요도호 그룹 및 일본적군, 그리고 연합적군, 적군파는 모두 일본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분파들이며- 이를 통칭하여 '적군파'라고도 한다 -, 그들은 각각 엄밀히 구분되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인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통합된 조직이며, 한편으로 저자는 이 통합의 과정이 상당부분 이 '숙청'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본격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연합적군의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책의 시작은 이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3개월 후에 일어난 오카모토 고조를 위시한 일본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과 오카모토 고조의 인터뷰이며,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합적군의 근원에 있는 적군파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책의 초반에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들의 어떤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내부논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연합적군의 '숙청'이라는 사건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덕은 책의 저자 퍼트리샤 스태인호프가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1972년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로부터 약 40여년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의 각계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소설 및 영화, 만화 등이 나왔다(와카마쓰 고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이나 야마모토 나오키의 만화 <레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사건의 주범격인 사카구치 히로시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아직도 옥중에서 혹은 외부에서 살아 있으며, 이들은 사건 후 '자기 비판'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을 꾸준히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 바, 이는 그 사건이 전후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넓게 보면 모두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스태인호프 교수는 다르다. 그는 미국인이며 이 사건들과 전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녀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인으로서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나, 미국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솔직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나,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압과정에서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의 차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행에 미친 영향도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건의 진행에서 일본 특유의 어떤 부분들이 미친 영향이나 혹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독자는 한국인이며, 이 사건에 있어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덕은 사건을 벌인 그들을 '위험한 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숙청'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나왔다. 그것은 예를 들어 조직 내의 권력다툼으로 희생자들이 나왔다, 혹은 배신자(스파이, 프락치)를 처단한 것이다 등등의 분석이 그것이다. 혹은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특성에서 사건의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여성지도자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어떤 히스테리컬한 면,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것은 사건을 맡았던 판사가 그녀를 '마귀 할멈'이나, '마녀'라고 부르면서 재판을 통해 그녀를 공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나 이들의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학자인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 이채롭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오랜 시간 각종 기록 및 관련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벌인 사건이 어떤 특수한 개인적 성향이나 권력다툼이나 배신자의 문제와 같은 특수한 사례가 아닌 어떤 조직 내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12명이나 숨지는 이렇게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한 이유는 그 사건에 내재한 언뜻 사소해보이는 분기점들, 혹은 어떤 조건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중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내부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산주의화 총괄'에 어떤 내부적인 기준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막다른 출구에 내몰려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이유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양상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조건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폭력에 의한 세계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은 괴물이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소해보였던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들 중의 대다수 역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라고 규정하면 해답은 간단해진다.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그러한 해답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며, 한 번 조건이 만들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전되어 전혀 원치 않은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조직들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작게 보면 가족과 교우관계에서 넓게 보면 국가까지 우리는 어떻게보면 폐쇄적인 조직에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주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 보아 전 국가적인 사건에까지 이어진다. 이 '희생양'이 돌고도는 것, 이것은 크기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반복되며, 이것에는 연합적군에게 내부논리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내부의 논리가 있다. (이 부분을 놓고 이들의 사건을 일종의 '이지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사실 '이지메'와 크게 연관은 없다.)

물론 저자는(그리고 나는) 이들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쉬운 결론으로 끝내는 것은 쉬운 반복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의 뿌리, 그리고 사건 당시의 이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헤집는 것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 그래서 이들의 사건 이후의 '자기 비판' 혹은 '전향'을 주의깊게 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기비판' 역시 이들의 내부논리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며 외부에서 보는 '반성'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의 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어떤 태도에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길을 뒤늦게 돌아보며 안타까움과 동정과 경이로움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같은 어떤 복잡한 심상에 젖는다. 이들의 시작은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연합적군의 지도부),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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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2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이 쓴 책에 대한 글은 처음 읽는 것 같아요.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실까요?
감탄 또 감탄을 하며 읽었습니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3-07-29 18:1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저도 영화를 보고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인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점이 많은 사건이예요.

제가 저 당시에 저 그룹의 일원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기회되시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아이리시스 2013-07-28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 좋다, 근데 이제 다 읽었어요? 몇 달 읽은 거예요, 하긴 그 몇 달 동안 저는 책을 사지도 않았;; 이건 언젠가 볼 거예요. 갑자기 김전일 보고싶네요. 방금 뎅구르르 하면서 <결혼의 여신> 보면서 남상미 빨강원피스에 계속 감탄하다가 너무 거실에서 시끄러운 것 같아서 이제 자려고요. ㅠ.ㅠ 예뻐져야 해요. 자고나면 예뻐질 거예요. 빨강원피스 너무 입고 싶어요! (왜 끝이 이렇게..)

잘자요, 맥거핀님. 안녕.

맥거핀 2013-07-29 18:17   좋아요 0 | URL
사실 초반에 좀 읽다가 한동안 묵혀놨었어요. 무슨 된장도 아니고, 책을 이렇게 묵혀두면 안되는데 말이죠. 아무튼 최근에 다시 꺼내들었다가 하룻밤 사이에 나머지 부분을 다 읽었습니다. 뒤로 갈수록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진진하더군요.

으흐흐..남상미, 에전에 무슨 남상미가 여자경찰관으로 나온 드라마있었는데, 그 때 반해가지고 저도 한동안 꽤 좋아했습니다. 혹시 그 원피스..남상미가 입었기 때문에 이뻤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

는 아니고, 알라딘에서 이쁘기로 소문났던데요. 아이리시스님.^^ 빨강원피스 입으면 더 예쁠겁니다.

그리고 나는 휴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서재에 글 쓰는 게 자체휴가..;

아이리시스 2013-08-02 13:28   좋아요 0 | URL
그 드라마 달콤한 스파이. 뭐 퀴즈 한번 맞춰봤어요. 히히히. 당연히 남상미가 입었기 때문에 예뻤;; (일단 순순히 인정하고) 사실 뭘 입어도 다 예뻤어요. 제가 빨강원피스에 로망이 커서.. 분명 원피스 같았는데 드레스가 되는 걸 보고 '역시 나는 못 따라가겠어'라고 생각했죠. 네, 제가 졌어요.

제가 예쁘다는 소문은 제가 낸 겁니다 :)

맥거핀 2013-08-06 17:40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달콤한 스파이> 사실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잠깐 일하던 데가 그 드라마 촬영한 경찰서 주변이라서 나중에 일부러 거기도 가봤다는..(대학로 근처). 솔직히 좀 더 말하면, 그 이후에 남상미가 여자 형사로 나오는 영화도 있었는데 영화가 상당히 구렸음에도 두번이나 봤어요. (이 영화는 알려나요?)

나도 같이 소문내줄께요. 이 댓글을 보시는 다른 분들..아이리시스님 예쁩니다.^^ 비도 안온다니 아랫동네 정말 덥겠네요. 더위 잘 이겨내시고 잘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