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느지막이 투표를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을 갔다. 중고서점은 동선상 늘 종로점을 갔었는데,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신촌점에 더 구미에 맞는 책들이 많이 있는 듯하여 일부러 신촌점까지 찾아갔다. 아무래도 알라딘 중고서점은 지점별로 책의 회전 속도가 다른 모양이다.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몇몇 책은 이미 팔렸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예상 외의 신간들을 꽤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며칠 전에 S님의 서재에서 본 미치오 슈스케의 <광매화> 같은 책이 떡 하니 있다거나 하는 정겨운 풍경을 본다거나 하는 등의. 정겨운 풍경에 이것저것 화답하다보니 어느덧 그리 정겹지 않은 시간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른바 '내려놓음의 시간'.
중고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은 과거의 아주 오랜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1990년대의 어느날 몇몇 레코드점에서 마주해야했던 반갑지 않은 시간들. 나는 그 때 문제집을 산다는 명목으로 흥겹게 삥땅친 만원 짜리 한 장이 생길 때마다 우리동네 사거리에 있던 레코드점, 혹은 큰 마음 먹고 종로나 명동, 때로는 압구정이나 노량진까지 원정을 가곤 했다. 레코드점을 A에서 Z까지 뒤지며 새로나온 신보들의 따끈따끈한 냄새에 황홀하게 취하는 것도 잠시, 주머니에 넣어둔 꼬깃한 만원 짜리 한 장은 늘 내가 이제 '내려놓음의 시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고, 나는 많은 뮤지션들과 원치 않은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제기랄, 왜 그렇게 전설들은 많고, 그 전설들의 숨겨진 명반들은 불쑥불쑥 나타나는지. 나는 그 '내려놓음의 시간'을 만날 때마다 애꿎은 '핫뮤직' 기자에게 욕을 퍼부었고, 용기가 없어 만원짜리 두 장을 삥땅치지 못한 내 소심함을 자책하곤 했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게 명반인지를? 아니. 이 중에 어떤 걸 들고가야 내일 뒷자리 H 녀석의 부러움에 목마른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있을지를.
2.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로 가서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의 두 단편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를 보았다. (네이버 필모에는 각각 <따뜻한 포옹>과 <달팽이: 나의 할머니>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맞는 제목 같지만, 시네마테크 데이터베이스에는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써도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시간이 꽤 남은 상태에서 도착한 터라, 출구조사 결과도 보고, 사온 책들도 들여다보고, 인증샷도 찍어 알라딘 스마트폰 편집기의 능력도 확인해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앉은 어떤 중년여성이 아들과 통화하는 게 귀에 들어온다. 아마도 영화를 혼자보러 나온 엄마가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어린 아들이 밥 챙겨먹을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들에게 국은 어떻게 데워먹고, 반찬은 뭘 꺼내먹고, 라면 끓여먹지 말고 등등을 이야기하는데, 아들의 심드렁한 대답은 들리지 않지만 익히 연상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많이 그래봤으니...)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것이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 오시면 엄마 6시 넘어서 극장 갔다고 해줘, 2시에 극장갔다고 하지 말고, 알았지, 아들? 그러니까 이 엄마는 이곳 아트시네마에서 오늘자 3시 타임 영화인 레나토 카스텔라니 감독의 1961년작 <산적>을 본 다음, 이제 7시 타임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게 무슨 영화광 엄마와 그런 영화광 엄마 때문에 혼자 국을 데워야 하는 아들의 훈훈한 대화, 영화 <레인보우>의 현실 버전이란 말인가.
그래도 영화 보느라 애들 밥 안 챙겨주는 건 괜찮은 거 아닌가요,는 나만의 생각인가.
3.
오늘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이곳 시네마테크 측의 계획된 아이러니일까.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의 두 단편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는 지극히 사적인 영화이고, 일본 사(私)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듯한 작품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태어남과 거의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려졌고, 어머니마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그녀를 자기의 친정어머니, 그러니까 감독의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가버렸다. 그런 가와세 나오미 감독을 불쌍히 여긴 그녀의 외할머니가 그녀를 자신의 호적에 딸로 입적시켰고, 그렇게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홀로 외롭게 카메라를 벗삼아 자라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가 <내 아버지>이고, 그런 자신을 힘들게 키워준 할머니를 그린 영화가 <내 할머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이 영화가 기록하는 시간에 대한 태도와 다른 하나는 카메라 뒤에 숨어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가와세 나오미라는 개인, 이 두 가지. 이 영화들에서 시간은 어떤 이벤트로서 기록되거나 분절되어 기록되지 않는다. 시간은 어떤 사건들로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로서 남아있고, 과거의 작은 소녀는 어느틈에 점점 자라 스물세살의 어른이 된다. 그리고 이제 그 스물세살의 어른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과거를 현재 속에서 복원시킨다. 예를 들어 사진 속에만 남아있는 어떤 풍경은 현재의 촬영된 화면과 겹쳐지며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고, 단지 호적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아버지는 전화상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 우리 앞에 선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편으로 이것은 온전히 극복될 수도 없다. 어떤 영화적 처치에도 그들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온전히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전화속 현재의 아버지, 어머니, 감독 그리고 그와 분리된 과거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결국 영화가 어떤 처치를 해도 영화의 시간은 완성될 수 없고, 사실 영화라는 매체는 그 시간을 결국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는 불완전한 매체다. 예를 들어 그녀의 스물 세 해의 시간을 영화라는 이 제한된 기록도구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그러나 가와세 나오미에게는 16mm 카메라라는 불완전한 매체 밖에는 그것을 기록할 도구가 없었고, 그것은 사실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감독의 아버지 찾기와 그녀의 할머니를 보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매순간 매장면에서 환기한다. 예를 들어 <내 할머니>에서 주인공인 할머니가 그렇게 자주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그녀의 손녀이자 딸인 감독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할머니와 감독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것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매순간 관객들에게 깨닫게 만든다. 카메라 안의 존재가 카메라 밖의 존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카메라 밖의 존재인 관객은 동시에 각자 나름의 카메라 안의 존재를 예기치않게 불러온다. 자신의 할머니, 혹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자신의 다른 누군가. 어떤 영화는 그렇게 끊임없이 스크린 밖의 환영들을 불러온다.
4.
내가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것은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조마조마하게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 오늘 같은 날에, '모두를 위한', '새시대', '새로운 국가', '새로운 미래' 같은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늘 같은 날에, 아주 지극히 내밀한 한 개인의 사적기록을 보게 된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미래, 위대한 시작, 힘찬 첫 발걸음 같은 것을 나는 잘 믿지 않는다. 그건 누군가가 당선되었거나, 누군가가 당선되지 못했거나 하는 등의 문제와 하등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래도 누군가는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고, 할머니와 힘들지만, 또 즐겁게 버티며 살아가고, 그런 할머니를 삼각대가 없어 흔들리는 화면으로 기록하거나,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언젠가 통화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정치에 대한 냉소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미래가 오든 개인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무엇이 있더라도, 그 내부에서 개인들은 또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므로 그분이 이야기하는 '하나되는 국민'은 즐. 하나되는 국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이 영화들에는 어떤 긍정적이면서도 단호한 기운이 숨어들어가 있다. 삶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그 삶 앞에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랄까. 할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카메라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새로운 미래, 위대한 시작, 힘찬 첫 발걸음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쓰라린 패배, 절망스러운 미래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누군가가 이겼다고 해서, 희망찬 내일이 갑자기 시작될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가 이겼다고 해서 절망의 나날들이 갑자기 시작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절망이나 희망같은 것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모든 개인은 각자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그것을 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들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우둔한 걸까. 그리고 결국 시간이란 과거로 흐르는 듯 보여도, 결코 과거로 흐를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영화들은 또한 보여주니까. 결국 시간이라는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에둘러 돌아갈 수는 있지만...(이라고 말한 것은 역사가 서중석 선생이던가.)
5.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나도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하나 올리고 잔다. 사실은 이게 원래 목적. 이런 얘기 쓰려던 게 아니라 그저 투표 인증+오늘 산 책 인증하려던 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