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정약용과 노키즈존

 노키즈존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공공장소나 식당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않는 부모들이 늘어가고 있어서 결국 아이들을 받지 않는 곳이 생겨난 것이다. 친구 같은 아빠, 친구 같은 엄마가 대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지.엄마나 아빠가 친구가 된다면 아이들의 잘못은 대체 누가 알려줄까? 집에서 혼내지 못해서 학원으로 혹은 학교로 이 역할을 떠넘기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우리 가족이 아닌 ‘남’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제대로 아이들을 혼내줄까?


명시해 두어야 하는 것은 친구는 친구. 부모는 부모. 가족은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사회적 집단인데 여기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면 학교나 회사에서는 어떻게 될지.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정약용을 읽어야 한다. 아버지인 그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것도 멀리 유배를 가서 보내는 편지. 정약용이 말하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지.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라고 할 때, 자신의 부모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친구 같은 부모보다는 존경할 수 있는 부모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스승과 제자가 된다면, 그래서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1. 학자 정약용 : 공부해라, 아들아.

왕에게 사랑을 받아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유배를 가게 되었다. 집안은 폐족이 되었고, 공부할 마음은 당연히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오신다. 그것도 자주!



“공부하고 있니?”

“오늘은 무슨 책 읽었니?”

“내가 지난번에 말한, 그 책 읽었니?”

“폐족이라고 공부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려고!”



위 상황은 정약용의 편지를 받은 아들의 마음을 가정한 것이다. 정약용의 심정은 백번 이해한다. 폐족이 된 상황에서 아들이 책을 손에서 놓을까봐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이쯤되면 정약용을 대치동 엄마에 버금가는 극성 학부모라고 볼 수도 있겠다.그러나 정약용은 아들이 장원급제해서 자신의 한을 풀어주기를 바란 것 같지는 않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의 입장에서 책을 들춰보지 않는 아들이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워 보일까. 정약용은 아들에게 단순한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1) 폐족도 성인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 + 경전 공부에 대하여

너희들 편지에 군데군데 의심이 가고 잘 모르는 곳이 있어도 질문할 데가 없어서 한스럽다고 했는데 과연 그처럼 의심이 나서 견딜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적어서 인편에 부치지 않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이면서 스승과 제자가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2) 독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내리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천번 백번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독서할 때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 아버지 정약용 : 바르게 살아라, 아들아.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바르게 살아라.” 아버지 정약용이 아들을 위해서 하는 말들은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왜 우리 친척 중에는 그 흔한 국회의원이니, 의사니, 경찰이니, 법조인이니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일까? 결국은 신세타령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친척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입장이 아니라 빚보증만 서달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척 중에 내세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자라면서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 더 서글퍼졌지만.

 폐족이 되어 미래가 암담한 아들에게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아버지 정약용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길을 보여줄 뿐이다. “너에게 있어서 옳음을 지켜라.”



(1)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도와주라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오기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삶의 두 가지 큰 기준 + 용기와 노력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이다.



무릇 하나의 하고픈 일이 있다면 그 목표되는 사람으로 한 사람을 정해 놓고 그와 같은 사람의 수준에 오르도록 노력하면 그런 수준에 이를 수 있으니, 이런 것은 모두 용기라는 덕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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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꼭 풀어야 하나요?


선생님의 유서가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왜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는지. 이미 죽은 사람으로 마음 먹고 계속 살아가고 있는 선생님. 그리고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친구 K.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어.

 


사실은 별일 아니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친구 K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 죽었다 하더라도 선생님은 그를 잊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항상 나의 의지대로 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실천하지 못했고, 결국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안타까운 것은 나의 마음을 입으로 혹은 행동이나 글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누군가 알아채주었다면.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듯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얘는 이래서 그런 거야, 라고 말을 해주었더라면.




그러나 나의 행동은 많은 오해를 불러왔으며, 나는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아, 오해야. 라고 해명을 했다. 아니면 그런 오해를 불러오지 않으려 `착하게` 행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행동마저도 번거로워졌다.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사이는, 그런 사이. 어떻게 노력을 해도 그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런 사이. 그래서인지 사람을 만나는 일이 꺼려진다. 만나도 기분이 좋거나 오해가 없는, 아니 오해가 있어도 결국은 풀리는 사람만 보게 된다. 

 

나도 선생님처럼 될까봐 두렵다.   



-나는 적막했어. 이 세상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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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권태의 연속

-그녀는 과연 누구를 사랑했을까?

 

 

엠마는 세 남자를 만난다. 남편인 샤를, 레옹, 로돌프. 그녀에게 사랑은 불타는 무엇이었고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그 무엇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왜!

 

 

왜 삶은 권태의 연속인 것일까?


 

그렇다. 삶은 권태의 연속인 것이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어떻게 삶이 매 순간 짜릿하고 황홀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영화나 연극에서처럼 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지만, 사회에서 역사에서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저 그런 보통의 사람.


 

권태의 끝. 결국 엠마는 스스로 권태를 끝내게 된다. 그녀는 과연 누구를 사랑했을까,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를 너무 사랑했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환상에 집착했으며 그 안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혹은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안정감을 주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권태를 준다.

 

 

지금의 나도 권태에 빠져 있다. 권태에 익숙해지거나, 어쩌면 다른 형태의 권태로 바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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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의 시간

가구를 만져본다 언제 샀더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흠집하나하나 전부 시간의 흔적이다. 박형준의 시는 가구처럼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의 순간을 슬퍼하지도 조바심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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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추억이 저녁무렵 밥냄새처럼 퍼진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이중적인 공간이다. 실제로 태어나고 자란 곳은 도시이거나 도시와 가깝지만 고향, 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그곳은 도시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가 온 후 골목길의 움푹파인 곳에 생긴 웅덩이에 세수를 하거나 뛰어다니며 놀던 그곳은 서울시의 한 곳이라고 해도. 여전히 나에게는 고향이다.


유년의 추억이 가득 담겨있는 공간, 이곳이 고향은 아닐까.


문태준의 시에서는 유년의 추억이 저녁무렵에 밥냄새처럼 퍼진다. 누구나 그리워하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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