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나온 용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까?


대장장이 매부 조와 누나가 전부였던 어린 소년 핍은 어느 날 미스 해비셤에게 불려간다. 미스 해비셤의 양녀 에스텔러의 경멸어린 시선을 느끼면서 그의 일상은 달라진다. 곁에 있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순식간에 천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미스 해비셤의 집과 대조적인 자신의 집안 풍경들, 예의를 모르는 격식없는 행동들이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핍은 막연하게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이 동경은 마치 그럴듯한 것처럼 포장되어서 자신이 언젠가는 여기 대장간이 아닌, 신사가 되는 삶을 꿈꾸는데 이 희박한 꿈은 정말 어이없게 이루어지고 만다. 그리고 위대하지 않게 그 끝을 맺는다.




물론 마지막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핍은 진정한 반성을 한 것일까? 어쨌든 아프고 나서 일어나보니 빚은 해결이 되어 있었고 자신은 도망치듯이 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또한 결국 핍 자신이 거부했던 그 유산의 혜택을 마지막에서는 본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왜 우리는 상류층이 되기를 원하는가? 잘 먹고 푹 자고 놀고 싶은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지만, 우리가 상류층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때문일 것이다. 이제 얼마 후면 없어지게 될 사법시험에 관한 소식도 이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리는 사법시험 폐지를 반대하면서 개천에서 용나는 것을 차단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왜 굳이 법률가를 뽑는 시험에 개천에서 용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일까? 며칠 전 읽은 기사에 따르면 이는 변호사 수수료와도 무관하지 않으며,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들은 2천만원 이하의 소액(그들 기준에서는) 사건은 담당하지도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는 인구당 변호사 숫자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것에서 기인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 숫자를 늘리는 것이 필요한데 로스쿨은 이에 대응하는 마땅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기사의 내용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 그러기를 바라는 것, 아니 어딘가에는 그럴 수 있으리라고 희망을 가져보는 것. 물론 이 작은 희망은 이제 곧 사법시험 폐지와 함께 사라지게 될까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또 한 가지 교훈은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키운다면 절대로 `프린세스 메이커`처럼 키우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즐겨했던 게임처럼 특정 능력을 높이고 싶다고 그렇게 크는 것이 아니며, 현실에는 치트키도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미스 해비셤의 에스텔러, 프로비스의 핍이 행복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난을 헤치고 미래를 희망하게 하는 그것은, 고향.


일리아스 다음에는 오뒷세이아를 읽을 것. 전쟁의 묘사인 일리아스보다 오뒷세이아는 내용면에서도 훨씬 재미있다. (여기서 제목을 이야기하고 지나가야겠다. 많은 사람들은 오디세이아라고 알고 있고 나도 역시 그랬지만, 천병희 번역의 제목은 다르다.)



일리아스 이후의 펼쳐지는 일들이 오뒷세이아에는 나온다. 오히려 가끔씩 오뒷세우스만이 아니라 일리아스 이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를 묘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저승으로 간 오뒷세우스가 아가멤논, 아킬레우스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아가멤논의 죽음은 그리스 비극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오뒷세우스는 노여워하는 자, 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신의 노여움을 받아 전쟁 후 고향에 쉽게 닿지 못한다. 이십 년이나 방황하는 와중에도 오뒷세우스는 고향에 꼭 가야한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퀴클롭스, 키르케, 세이렌을 만나며 전우들을 잃고 심지어 저승에까지 가야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오뒷세우스를 위한 신의 뜻이기도 했으나 결국 이를 실행했다는 점에서 그는 필멸의 인간이지만 대단한 인물이다.



이윽고 고향에 도착한 오뒷세우스는 바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복수를 어떻게 실행할지 고민하며 차근차근 준비한다. 그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와 함께. 오뒷세우스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 페넬로페의 심정을 떠보기도 하고, 구혼자들에게 활을 쏘아보겠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뭐랄까, 시원한 막장 드라마의 복수만큼 짜릿하다. 물론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집을 시체의 산더미로 만드는 장면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십 년간을 떠돌아다녔던 울분,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고향, 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우스의 뛰어난 지략을 소개한 단순 영웅담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이 어떤 의미인지, 수많은 고난을 헤치고 미래를 희망하게 만드는 그것. 현대인에게 사전적인 고향은 `도시`이겠지만, 우리가 꿈꾸는 고향은 오뒷세우스와 다르지 않다.




p.s 두꺼워서 들고다니면서 읽지 못한다는 단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를 단 며칠만에 읽으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욕심이었으나, 결론적으로 만족감이 든다. 연달아 읽어서 좋았다. 천병희 번역을 고르기 잘했다는 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이 약속한 파멸 : 아킬레우스 vs 헥토르


700페이지를 읽기는 벅차다. 그럼에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용이 재미있는 것도 있겠지만, 번역이 매끄러워 읽기가 수월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리스 원전 번역은 역시 천병희) 영화 <트로이>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사실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파리스, 헬레네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황금사과가 세 여신에게 떨어지면서 벌어진 전쟁. 일리아스는 그 전쟁이 펼쳐지는 과정이다.



문체에서 서사시적 문체의 특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상투적인 표현들, 예를 들어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필멸의 인간들` 등. 그러나 문체보다 오히려 신과 인간에 주목해야 할 수 있는 것이 일리아스의 묘미가 아닐까.



트로이아인과 아카이오이족의 싸움이 아니라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대결은 처음부터 성사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를 보면서 영웅의 면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신들이 선택한 영웅 아킬레우스와 신의 사랑을 받은 헥토르. 물론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는 필멸의 인간일 뿐. 아무리 헥토르가 신의 사랑을 받아도 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킬레우스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영웅이었을지언정, 그의 인격까지 영웅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신의 재물을 빼앗아간 아가멤논에게 화가 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이를 여신인 어머니에게 징징대며 이야기하는 장면은..)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전차에 끌고 다니는 장면은 그를 편애했던 신까지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으니.



아킬레우스를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어떤 사람의 업적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추측이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짜증 한번을 내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선한 영역, 악한 영역은 한 사람에게 공존하고 어느 부분을 많이 가지느냐, 어떻게 이것을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사이코패스는 제외하고. 다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런 업적을 남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셰익스피어, 언어의 상징.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한꺼번에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순서대로 햄릿-오셀로-리어 왕-맥베스를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역시 <햄릿>, <오셀로>이다. 번역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미 가지고 있던 민음사 시리즈로 계속 갈 것인지, 혹은 펭귄시리즈로 새로 구입할 것인지. (왜냐하면 처음에는 민음사의 <햄릿>만 가지고 있었으므로) 혹시 나처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간단하게 적어보자면,



(민음사 <햄릿> 제3막 제1장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펭귄시리즈 <햄릿> 제3막 제1장
사느냐, 죽느냐-그것이 문제구나. 가증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그냥 참는 것이 고귀한 행동일까, 아니면 밀물처럼 밀려드는 역경에 맞서 싸워 이기는 게 더 고귀한 행동일까.)



민음사의 <햄릿>은 원전을 그대로 충실하게 따른다는 의의가 있지만, 부드럽게 읽어넘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개인의 취향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쨌거나 펭귄시리즈로 셰익스피어를 재미있게 읽었다. 극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두려움이나 지루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를 읽고 역시, 셰익스피어다 이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전반적인 줄거리보다도 오히려, 시적인 요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적인 구절. 인생에 있어서 시구, 한 마디만 남겨도 그건 성공한 것이 아닌가.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줄거리로만 본다면 요즘의 막장 드라마나 이런 것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으므로.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 기로에서. 아버지를 위한 복수를 망설이는 자신을 자책하는 순간들. 그의 복수는 오필리어를 지켜주지 못했다.


<오셀로>
데스데모나를 향한 오셀로의 사랑, 그러나 그 틈을 노리는 악마는 바로 질투, 질투는 스스로 잉태되는 괴물이다.


<리어 왕>
딸 코딜리어의 사랑을 믿지 못한 아버지 리어 왕. 아버지-자녀와의 관계는 어딜가나 문제.


<맥베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최후의 주인공은 없다. 모두 바보 천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일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06-2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서를 읽을 때 항상 고민 되는 부분을 이렇게 비교하고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전에 충실하지만 매끄럽지 않은 것, 매끄러우나 역자의 글향이 너무 묻어 있는 것 :) 원문을 그대로 읽지 않는 한 항상 고민이 되네요.
그래서 책 만큼이나 역자 자체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찾기 위해 읽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스타일을 찾기도 해야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방랑 2015-06-2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니 오히려 원전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매끄럽게 되어있는 번역이 중요함을 책을 읽으니 더 다가옵니다.
도움되셨다니 기분 좋은데요~
좋은 주말 되세요.
 

신은 죽었다, 이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책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과연 니체를 읽을 수 있을 것인지 반신반의하며 책을 펼쳤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었을 초반 당시의 심리상태는 계속 책을 읽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으로 가득했다. 책을 읽어서 내 삶이 변화했다거나 내 무언가가 변화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나는 답을 찾지 못했고, 계속 읽을 것인지에 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이 책에서 그 답을 찾았다. 망연자실 길을 잃어버리는 것,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길을 걸어왔던가! 모든 것이 동일할 뿐인데!˝ 허약한 인간의 특성이 나였음을. 그리고 나에게 찾아왔던 달콤한 설교. ˝보람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대들은 욕구하지 마라!˝ 이렇게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보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 검색하고, 옷 뭐 살까 일주일 넘게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지내는 것이 더 행복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 생각이 없이 산다는 것은 노예가 되는 길이 아닌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은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무신론자, 혹은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 좁은 관점이다. 신이 죽어야 한다. 인간이 극복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창조해내지 못하고 의욕없이 타인으로부터 의욕을 당하고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거는 희망이 아니라, 가보지 못한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이다. 그 희망으로부터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며,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존하는 신은 없어져야 한다. 신이 있다면, 인간은 저절로 주어진다는 순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이제 신은 죽었으므로.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 무엇이 선과 악인지는 상대적이며, 그것은 오직 창조하는 자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라투스트라가 전하는 말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시를 읽듯이 본다면 그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신처럼 모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는 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06-11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영원 회귀와 신은 죽었다에서 시작한 부조리 철학, 그리고 그 정수 중 하나인 이방인을 읽었을 때,
읽는 내내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서 화가 났지만, 마지막을 덮고 해설을 찾아 해매고 나니,
신과 같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에 반하고 맞서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장바구니 깊숙히 있단 이 책을 꺼집어 네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랑 2015-06-11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얕은 감상이지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책을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요새처럼 책이 묻힌 시대에 말이죠. 참, 저도 표지 그림이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