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감정의 표현이 아닌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시를 읽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소설처럼 슥 한 번 본다고 해서 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는 곱씹어야 하고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그것은 나름의 즐거움일 수 있겠으나, 시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문이 따로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이런 목적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하다. 친절하게 여러 예가 나와 있어 이해를 돕는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를, 일종의 시 안목을 높여주는 책.



왜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하는가? 아니, 다른 질문으로. 왜 우리는 시를 읽지 않는가?



소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분량의 시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기에. 시시콜콜한 사담이나 장식적이고 현학적인 말을 구구절절하게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 (물론 그것에 흥미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적 깨달음. 시에는 새롭고 구체적인 깨달음이 들어있다. 시인이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인이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 그 무엇. 우리는 원한다. 그리고 나는 원한다. 지껄이는 말이 아니라, 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싶은 것을 여과없이 내뱉는 것은, 즉 어떠한 투과없이 그대로 감정을 배설하는 것은 시적이지 않다. 시적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은 정신적 힘. 자신의 의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 우리는 넋두리가 아니라, 시를 듣고 싶다. 내가 인식하지는 못했으나 시인이 인식한 그것. 내가 그리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5-07-2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정말 오랜만이군요..
까마득한 옛날에 두 번 세 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지금은 제 서재를 떠난 지 또 오래되었군요.^^

방랑 2015-07-24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읽었어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읽고 싶어요
비 오는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모든 오만은 편견에서 나온다. : 끝나지 않은 오만, 그리고 편견.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순탄하지 않지만 결국은 이루어지는 사랑 이야기. 제인-빙리 커플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엘리자베스-다아시 커플. 제인-빙리 커플의 문제가 썸만 타다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지 않는 것이라면, 엘리자베스-다아시 커플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썸에 있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대한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는 위컴이 막내와 결혼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다아시의 행동이었다. 물론 그러한 다아시의 행동은 결정적으로 그의 재력에서 나온다. 엘리자베스는 친구인 샬럿의 결혼에 경악했다. 아니, 너 제정신이야? 사랑하지도 않는데 돈 때문에 결혼을 하다니. 그건 미친 짓이라구, 제발 정신차려. 나는 네가 현명한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야. 그 남자는 절대 널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을 엘리자베스는 꾹꾹 참았다. 물론 엘리자베스의 행동과 태도에는 그것이 드러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택에 대해서 속물적이라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배경과 가치관을 무시하고 오로지 나의 기준에서. 이러한 모든 오만은 편견에서 나온다. 엘리자베스의 이러한 오만과 편견은 다아시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친구인 샬럿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과연 엘리자베스의 선택은 순수하게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다아시와 애정을 확인한 후 언니인 제인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부터 그분을 사랑하게 된 거니?˝ ˝아주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 나도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펨벌리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영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가 아닌가 해.˝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초호화 영지를 보고 나서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요즘으로 따지자면, 나는 오빠의 벤츠를 보고 나서 사랑이 시작되었어, 혹은 오빠의 청담동 저택을 보고 사랑이 시작되었어,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친구인 샬럿의 선택을 비난했던 엘리자베스,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다아시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오만과 편견은 줄어들었지만, 샬럿 그리고 타인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오만과 편견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엘리자베스의 선택을 비난하는 나의 오만과 편견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나의 오만과 편견이 들키지 않도록 그리고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생각해보자. 뒹굴던 인간은 언제 잠에서 깨어나는가? 번쩍 정신을 깨어 일어나야 할 때는 좋지 않을 때이다. 무언가 나를 괴롭히거나 불만족스럽게 여겨질 때, 몸을 일으켜야 한다. 생각을 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거나.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젓가락만큼 자란 들국화는/ 내 코를 끌어 당겨 죽음의 냄새를 뿜어댔지만/ 나는 그리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게 삶이 아니므로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꽃에도 무관심하다. 우린 무관심하게 산다. 왜냐하면 삶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생활은 살아 있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죽음은 먼 이야기이며 나와는 관계가 없다.



나비는 어찌 그리 고운 무늬를 자랑하는가 무슨 낙으로 남자는 여자를 끌어 안고 / 엉거주춤 죽음을 만드는가 우리는 살아 있다 정다운 무덤에서 종소리, /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후회, 후회, 후회의 종소리가 그칠 때까지(다시, 정든 유곽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나비의 날갯짓을 보고, 나비의 날개 무늬를 보고, 죽음을 느끼면서. 살아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후회를 한다. 후회는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07-1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한자가 많은지요? 그런 평이 있어서요. 전 한자를 하나도 모릅니다 ㅠㅠ

방랑 2015-07-18 07:14   좋아요 0 | URL
한자가 많습니다. 저도 한자를 몰라서 찾아가며 읽었어요ㅠㅠ
 

까라마조프 식이 될 거야 : 인간에 대한 고찰


아버지와 큰아들, 둘째아들, 막내아들로 이어지는 까라마조프 가의 이야기. 단순하게 줄거리로만 보자면 아버지와 큰아들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고, 서로를 증오했다. 둘째아들은 냉소적인 인물, 막내아들은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다. 큰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공공연하게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결국 그것은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아버지는 죽게 되고 큰아들은 결국 친부살인범으로 몰리게 되는 내용. 방대한 페이지에 혹시 이 소설은 삼대를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의외로 소설 속에서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는다. 약 1340페이지 가량의 긴 여정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치정극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있다. 종교와 인간에 대해서 그 어떤 철학서보다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책.




상-중-하로 이어지는 장편 소설중에서 우선 상권의 이야기를 해본다.


상권의 주된 이야기는 아버지와 큰아들이 한 여자를 가지고 싸우는 내용. 큰아들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으나 그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가게 된다. 아버지와 큰아들은 돈과 여자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다. 큰아들에게 주어야 할 유산, 그리고 빼앗기고 싶지 않은 한 여자. 상권을 이끌어 나가는 갈등 자체는 막장드라마의 소재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있다.



상권에서 나온 몇 가지 물음은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인간에 대한 개별적 증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국가가 지상에서 배척되고 종교가 국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면?
-인간은 누가 살 가치가 있고 없는지 결정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자신의 명예와 살아갈 희망 중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지상의 빵과 자유는 양립될 수 있을까?



중권은 의외로 줄거리가 단순하게 전개된다.


앞에서는 조시마 장로의 죽음, 뒤에서는 드미뜨리(첫째아들)의 친부살해 의혹. 조시마 장로의 죽음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애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룬다.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조시마 장로는 그의 시신이 부패되고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드미뜨리(첫째아들, 미쨔)는 친부살해 의혹을 받는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것이 그의 죄라면 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한 여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던 드미뜨리. 자살을 생각하려고 했었던 그의 여러 행적들은 친부살해 의혹에 불리하게 작용할 뿐이다. 알료샤(셋째아들)와 어린 아이인 꼴랴의 대화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그러나 민중에 대한 시선들은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도 볼 수 있었던 대목이다.


중권에서 나올 수 있는 물음은
-인간을 제외한 만물은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어졌을까?
-인간의 이성은 개성이 있는 고립된 것인가 혹은 인류의 보편적 전체에 있는가?
-스스로 뉘우쳤다면 꼭 벌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을까?
-자유는 개인을 향하는가 혹은 인류를 향하는가?
-성인에게 증표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결말은 까라마조프의 저열한 힘, 까라마조프 식이 된다. 하권에서는 드미뜨리의 재판 과정이 이어진다. 각각의 변론과 함께. 물론 소설에서 드미뜨리의 최후는 나오지 않는다. 하권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악마와 대화하는 이반(둘째 아들)의 독백도 주목할 만하다.


하권에서 나올 수 있는 물음은
-인간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가?
-하느님(종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을까?
-암묵적으로 살인을 동의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까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할까?
-진리와 양심은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07-1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서 하루키를 비록한 많은 큰 작가들이 까라마조프를 그렇게도 인용하고 거론했군요 ^^ ㅎㅎ
무수한 밑줄 긋기가 예상됩니다 :)
태엽 감는 새를 다 읽고 나면 밤의 독서의 바로 다음 순서가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방랑 2015-07-17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리 읽고 싶었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네요. 단순한 줄거리지만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은 책이에요. 방대하지만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 봅니다.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모든 아Q를 위하여



아Q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혁명에 휩쓸리게 되고, 그 죄로 죽게 된다. 성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 그의 가문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모욕을 당하면 더 약한 자를 찾아 분풀이를 하는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아Q.



그의 억울한 죽음을 정전으로 쓰는 까닭은 혁명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리기 위해서일까. 모르는 채로 사는 것, 맹목적인 형태로 사는 것이 아Q의 죄라면 죄인 것이고 대중의 죄라면 죄인 것이다.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이 바로 루쉰이 목격했던 중국 사회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또한 루쉰의 다른 단편들에서는 중국의 구시대적 관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변발이나 인육을 먹는 행위. 변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서는 중국 중심의 사고 방식(중화사상)이 어떻게 무너져 가고 있는지도 함께 알 수 있다.



오랜기간에 이어져왔던 전통이라는 이름을 없애버리기는 쉽지 않다. 근대화, 혹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또는 요구되었던 것들. 물론 그것들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응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다. 물론 악습은 없어져야 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