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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 수집하기
폴 클리브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2년 9월
평점 :
원제 - Collecting Cooper
작가 - 폴 클리브
앞표지를 보면,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 놓인 유리병들이 심상치 않다. 사람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들어 있기도 하고, 잘린 손가락이 보이기도 한다. 뒤표지 역시 평범하지 않다. 떡하니 맨 위에 쓰여 있는 문구. ‘감금된 범죄학 교수 VS 연쇄살인범 수집자 VS 범죄자를 죽여 버린 전직 경찰’
그렇다, 이 책은 범죄 소설이고 주요 등장인물이 셋이나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주인공 급이 세 명이나 된다는 점에서였다.
범죄학 교수인 쿠퍼, 그를 납치 감금한 에이드리언 그리고 4개월 만에 출소한 전직 경찰 테이트. 극의 화자가 많으면 읽으면서 헷갈릴 수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책은 테이트는 ‘나’라는 화자로 등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 내지는 ‘그녀’라고 나온다. 잘못하면 시점에 화자가 헷갈리면서 내용 파악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630쪽이나 되는 분량에 서술자가 왔다 갔다 하면 읽기 힘들 텐데…….’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가 ‘헐!’하고 놀라고 말았다. 두 번째로 놀란 점인데, 주인공 세 명이 번갈아 나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전혀 느슨하지 않고 헷갈리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어쩌면 각자 처한 상황을 긴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지키려는 쿠퍼와 그를 자신의 살인 파트너로 만들고 싶은 에이드리언 그리고 사라진 소녀를 찾아야 하는 테이트.
각자 생각하는 바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은 점점 꼬여가고 복잡해진다. 거기에 중간에 다른 인물들까지 나오면서,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킨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럽다거나 뭔가 난잡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가끔 글을 읽다가 느끼는 ‘이런 부분은 불필요한 것 같은데…….’라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세 번째로 놀란 점은 그 모든 것들이 교묘하게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이 느슨해지지 않고, 어지럽지도 않은 것이다.
얼핏 보기에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모든 사실과 인물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문양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는 ‘으아~’하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사라진 소녀 엠마, 여성 연쇄 살인마 멜리사X, 그로브의 무법자 ‘쌍둥이’ 등등 나오는 인물이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동시에 일어나고 밝혀지는 사건사고들도 적잖았다. 특히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는데, 멜리사X와의 연결 고리가 밝혀지는 부분에서는 ‘헐……. 대박’하고 중얼거렸다. 진짜 그 부분은 충격이었다. 이게 이렇게 연결될 수 있구나, 이놈이 나쁜 놈이네. 진짜 못된 놈이다.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치밀하고 꼼꼼한 구성이 이 책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밀가루, 호박, 양파, 후추, 소금, 마늘, 파, 달걀 등등의 다른 재료가 섞여서 수제비라는 멋진 요리를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할까?
그리고 또 하나 꼽자면, 담담하게 모든 것을 서술하는 걸 고르겠다.
직접 눈으로 보면 끔찍해서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를 상황이지만, 글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다못해 인물들의 격앙된 감정이나 흥분 내지는 놀라움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늘 있는 일인 것처럼 적어놓는다.
쿠퍼가 범죄 연구가이기 때문에, 그와 에이드리언의 대화에서는 어떤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자라면 살인자가 되는지 간간히 나온다. 뭐, 이건 범죄 사례집을 보면 다 나오는 얘기이긴 하다. 물론 모든 사례가 다 100% 이론과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가정이 아이들의 인격 형성에 제일 큰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의 에이드리언 같은 경우에는, 비뚤어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의 환경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왕따를 당하고, 그것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애완동물을 죽이고 시설에 수용되어 폭행을 당하고……. 그런데 그런 상황도 그냥 옆집에 놀러갔다 오는 것 같은 분위기로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범죄자와 처절하게 싸우는 격투 장면도 비슷하게 차분했다. 특히 고양이가 목매달려 지붕에 매달리거나, 죽은 여인의 시체가 걸려있는 건 분명히 놀랄 일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차분하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그게 더 무서웠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간접 증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범죄가 일어난다는 뜻이리라.
하긴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인 크라이스트처치는 연쇄 살인마가 여러 명 활개 치는 곳이니까. 그 뿐인가, 단순 강도도 있고 도둑도 있고……. 내가 몰라서 그렇지, 서울도 저곳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규모가 좀 작을 뿐.
그래서 크라이스트처치는 오늘도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도 카페에는 크로스워드 퍼즐 풀기에 여념이 없는 노인이 앉아 있고, 커피 맛은 어제와 똑같다. 주인이 원두를 바꾸지 않은 이상, 내일도 아마 맛은 똑같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 어느 곳에서는 사람이 죽어가고,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분주히 달릴 것이다. 내가 당하지만 않으면, 방화도 살인도 단순 구경거리에 불과할 것이고.
그게 크라이스트처치, 아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