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혁수
출연 - 석인수, 김윤희, 홍명진, 이계인
처음 봤을 때, 너무 무서워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영화이다. 친구들과 여름에 놀러가서 봤는데, ‘무서워! 놀라 죽을 거 같아!’ 라는 기억이 남는 영화이다. 중간에 귀신이 나올 때 친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방을 뛰쳐나가고, 그 소리에 어른들께서 무슨 일이냐고 놀라서 달려오셨다. 그런데 커서 다시 보니, 음……. 무서운 부분은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었고 호러 영화를 많이 보아서 그런지, 무서운 장면보다는 깔깔대고 웃은 장면이 더 많았다.
어느 양반집에 기괴한 일이 생긴다. 첫날밤만 치르면 아들이 죽어 나가는 것. 이미 위의 두 아들은 죽었고, 남은 것은 막내 하나. 게다가 동네에 소문이 흉흉하게 돌아서, 사돈을 맺으려는 집안도 없어 조만간 가문의 대가 끊길 지경이다. 그러다가 조금 먼 곳에 있는 동네의 가난한 집 딸을 막내며느리로 데리고 오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혼 첫날 밤 막내아들은 귀신에게 홀려 죽고 만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인지 용케 막내며느리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 짧은 첫날밤, 단 한 번의 관계로! 파워 정력왕인 막내아들이다!
사실 이 집안에 저주를 내리는 존재는 시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데리고 놀다가 죽여 버린 여자였다. 임신을 했다고 하자, 도망가자고 해놓고는 죽여 버린 것. 한을 품은 그녀는 막내며느리의 뱃속 아기마저 죽여서 집안의 대를 확실히 끊어놓으려고 노력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제일 생각나는 것은, 귀신인지 흡혈귀인지 그것도 아니면 여우가 둔갑한 것인지 정체성이 모호하기 그지없는 피 빨아 먹는 귀신의 정체이다. 원한을 품은 이 여자의 귀신이 시어머니로 변신해서 들어오는데, 특이하게도 밤만 되면 가축의 피를 빤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하녀도 죽여서 피를 빨고……. 인간이건 동물이건 가리지 않는다.
눈과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눈을 흰자만 보이게 훼까닥 뒤집어서 밤중에 노려보는 그 모습은……. 게다가 바로 밑에서 랜턴을 비쳐주는 센스까지! 그 장면이 제일 무서웠다. 아, 포스터 검색하다가 그 장면 사진도 덩달아 보이는데, 환한 대낮에 봐도 무섭다.
그리고 지렁이 국수! 아, 이건 웩이다! 싫어! 난 다리 많은 것도 싫고 없는 것도 싫다고! 진짜 지렁이를 썼다는 말도 있는데, 그 얘기를 듣자 영화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은 거 같다. 자신과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자신의 순정을 차버렸다는 이유로, 자신을 그냥 노리개로 여겼냐는 그런 증오와 한으로 한 집안을 거의 박살을 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집안의 아들들은 왜 한을 안품은 걸까? 물론 그렇게 하면 영화가 복잡해진다고 스스로 납득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쉬웠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어버린 시어머니는 왜 한을 안 가졌을까? 멀쩡하게 잘 키워놓은 아들을 셋이나 잃고, 자기마저 죽었으니 억울했을 텐데 말이다. 양반은 죽어도 양반이라는 걸까? 그들은 너무도 우아하고 고상해서 한 따위는 품지 않고 그냥 구천을 떠돌 뿐일까?
게다가 모든 일의 원인은 시아버지에게 있는데, 이 아저씨 그냥 뒷전으로 물러나서 방관만 하고 있다. 나름대로 뭔가 한다고 큰소리는 치지만, 힘든 일은 다 하인에게 시킨다. 심지어 귀신과 맞서 싸우는 것 역시 막내며느리의 몫이었다. 원흉은 그 인간인데 말이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두 여자가 맞대결을 펼친다. 한 명은 죽어버린 자신의 아기와 자신을 위해, 다른 한 명은 이제 태어날 자신의 아기와 자신을 위해……. 하지만 자신을 위한다기보다는, 자식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 맞는 말 같다. 한 쪽은 한을 위해, 다른 쪽은 미래를 위해.
광선검 또는 레이저 빔이라는 놀라운 비밀 병기를 가지고 싸우는 두 여자. 귀신 시어머니는 그것을 눈에 달았고, 막내며느리는 가슴에 장착했다. 일본 애니 ‘그레이트 마징가’에 나온 여자 로봇이 생각났다. 가슴 미사일을 능가하는 가슴 레이저빔! 멋지다! 잘 나가다가 막판에 영화가 황당해지긴 한다. 막내 조카가 즐겨 보던 특촬물이나 전대물도 아니고.
그 부분만 빼면, 아주 무서운 영화였다.
PS. 이계인씨가 머슴으로 나온다. 다소 모자라지만, 착하고, 세상을 달관한 철학가 같은 대사를 중얼거린다. 그리고 희극적이지만 슬픔을 숨기고 있으며, 실마리를 주고 때로는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귀신을 속이고자 막내며느리를 머슴 이계인씨의 색싯감으로 데려온다. 그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주인집 막내아들이 귀신 따위는 유명 도사님이 주신 검으로 죽이겠다고 큰소리치자, 결국 원래 계획대로 혼인을 치르기로 한다. 장가간다고 좋아했지만 졸지에 결혼이 취소되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이계인씨. 그 때 대사가 이러했다.
"도련님은 아무도 시집오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이번에 하셔야쥬. 지는 나가면 여자들이 줄을 섰다니까요."
그러나 큰소리치던 도련님은 귀신 잡는다는 칼 한 번 못 휘두르고 죽어버린다. 그리고 이계인씨는 홀로 남은 막내며느리를 은근슬쩍 도와주는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박진영씨의 노래가 떠올랐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이런 마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