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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베이비 (악마의 씨)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우 외 출연 / 필림21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원제 - Rosemary's Baby
감독 - 로만 폴란스키
출연 - 미아 패로우, 존 카사베츠, 루스 고든, 시드니 블랙메어
원작 - 아이라 레빈의 ‘로즈마리의 아기 Rosemary's Baby’
예전에는 ‘악마의 씨’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어서, 무척이나 헷갈리게 했던 영화이다. 오래 전에 ‘악마의 씨, Demon Seed’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서, 두 개가 혼동되었다. 한글 제목은 둘 다 똑같이 ‘악마의 씨’였으니 말이다. 다만 전자는 악마 숭배와 연관이 있는 영화였고, 후자는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의 폭주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영화 다 ‘아이라 레빈’과 ‘딘 R 쿤츠’라는 탁월한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아기를 낳는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로즈마리는 남편과 함께 맨해튼의 아파트에 입주한다. 그녀는 전업주부이고, 남편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이다. 그곳에 사는 다소 과잉 간섭을 하는 노부부를 비롯해 아파트 주민들과 친분을 쌓아가는 로즈마리. 그러다가 그녀가 세탁실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여성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다른 사람이 맡았던 주요 배역이 남편에게 돌아오고, 남편은 노부부의 말이라면 거의 맹신하다시피 한다.
이상한 괴물에게 강간을 당하는 악몽을 꾸고 며칠 후,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노부부와 남편의 강요로 그들이 소개한 산부인과에 가게 되고, 그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를 걱정하던 지인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로즈마리는 그가 남긴 책에서 섬뜩한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노부부가 악마를 숭배하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아, 예전에는 그냥 지루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다시 보니까 이건 뭐 그냥 후덜덜했다. 연출도 그렇고 배우의 연기도 그렇고 분위기까지. 몽땅 다 그냥 닥치고 찬양해야할 것 같았다.
이건 어쩌면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결론을 알고 보니까 배우들의 대사나 행동이 무의미해보이지 않았다. 음, 이걸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 영화는 나름 유명해서 상당수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써보겠다.
로즈마리가 임신한 이후, 남편은 그녀를 예전처럼 잘 만지지 않는다. 뽀뽀를 할 때도 예전처럼 입에다 해주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녀와 눈을 잘 마주치지도 않고. 일종의 죄책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세를 위해 부인을 팔아버린 죄책감. 영화를 보면서 욕만 나왔다. 이런 나쁜 놈! 찢어죽일 놈!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패고 이십대 더 때려줄 놈! 하아, 몇 년 동안 할 욕이 두 시간을 약간 넘는 상영 시간에 다 나올 정도였다. 그 남자 욕은 밤이 새도 모자를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하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겠다.
이 영화의 연출이 섬세하다는 걸 느낀 것은, 로즈마리가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서 비밀통로로 이어진 방에 왔을 때이다. 거기서 남편은 은근슬쩍 그녀의 눈을 피해 자리를 이동한다. 당연하다. 아기가 죽었다고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근데 그게 화면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구도에서도 그런 연기를 하고 있었다. 감독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정성이 느껴졌다.
게다가 로즈마리가 임신 후 점점 말라가는 과정 역시 잘 다루고 있다. 물론 머리와 화장빨인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괜찮아보였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변해서 짙은 다크서클에 퀭하니 쑥 들어간 눈에다가 홀쭉한 볼이 되고, 그러면서 그녀의 예민함과 불안감이 증가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까지 불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다른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나 행동 하나 놓칠 게 없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너무 감명을 받아서 오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나 뻔히 아는 진행을 하면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한다면, 그건 진짜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힌트를 한 치의 오차가 없이, 관객들이 감독의 의도에 맞게 생각하도록 배치를 했다면, 그건 칭찬을 넘어서 극찬을 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간섭이 심한 주책바가지 노부부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힌트가 모이면서 그들의 집착이 공포로 다가오는 과정은 소름끼쳤다. 나중에는 그 노부인의 수다스런 입을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 난 원래 경로사상이 투철한 사람이었는데, 동네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인사 잘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인데.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무서운 것이다. 실체를 모르는 막연함에서 점점 구체화되는 공포가, 겉으로 보기엔 너무도 평범한데 실상은 너무도 다른 가족과 이웃이, 안전하다 믿었지만 배신과 음모의 장소가 되어버린 집이라는 공간이, 이 세상은 불신과 악이 지배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잔잔하지만 오싹하기만 하다.
꼭 악마주의가 아니라고 해도 사이비 종교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재하며, 가족이라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이웃끼리 다툼이 살인으로 번지는 일도 종종 올라오고,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말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각박하고 무서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