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 - 아웃케이스 없음 폭력의 역사 1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비고 몰텐슨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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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A History of Violence, 2005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 비고 모르텐슨, 마리아 벨로, 에드 해리스, 윌리엄 허트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봤을 때는 유명 범죄학자인 콜린 윌슨이 썼을 것 같은 책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이다.


  어여쁜 부인과 착한 아들 그리고 깜찍한 딸내미와 조용히 살아가는 남자 톰. 그는 마을에서도 평판이 좋은, 식당 사장이다. 평범하고 화목하게 지내던 어느 날, 그의 가게에 도망 중이던 살인범이 들어온다. 그들은 종업원과 손님을 인질로 잡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참지 못한 톰은 그 둘을 무찌르고, 마을의 영웅이 된다. 함부로 나서기 힘든 상황에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구한 그. 아들과 부인은 그런 그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사건 기사를 본 그의 예전 동료들이 나타나고 그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만다. 사실 동료라고도 할 수 없다. 과거의 그에게 원한을 가진,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폭력의 역사. 그것은 대물림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착하고 순해빠졌던 아들은 아버지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에 총을 들고, 남편을 믿었던 아내는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과 실망감에 그를 멀리 한다. 그리고 톰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중얼거리며, 또다시 계속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만다.


  하지만 한번 풀린 봉인을 다시 제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낳고, 원한은 복수를 낳는다. 그는 선량한 식당 주인인 톰과 잔인한 킬러였던 과거의 모습에서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다. 어중간하다고 표현했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놈들에게는 가차 없이 냉정하고 잔인한 태도를 취한다. 게다가 가끔 가족들 앞에서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맞고 자란 아이가 크면 때리는 어른이 된다고 한다. 톰의 아들은 한 번도 맞고 크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것을 보면서 톰의 부인은 자기 아들이 아빠와 같은 삶을 살까봐 두려워하고, 톰 또한 그런 아들의 모습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과연 그의 아들과 딸은 예전처럼 착하고 순진하게 클 수 있을까? 그 부부 역시 전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있을까?


  대답은 ‘NO’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 초반에 톰과 다른 가족들은 식탁에 모여 환하게 웃으면서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장면은 보기만 해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많은 것이 변했다. 어딘지 차가워 보이는 집안 분위기에 식탁에 둘러 앉아 눈도 마주치지 않는 가족의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어린 딸만이 눈을 크게 뜨고 왜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가 전과 달라졌는지 의아해하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폭력조직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조직원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걸까 아니면 한 번 조직원은 죽어도 조직원이라는 걸까?


  영화는 상당히 찜찜한 기분을 주면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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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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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厭魅の如き憑くもの, 2006년

  작가 - 미쓰다 신조



  전에 '산마처럼 비웃는 것'을 먼저 읽었다. 시리즈물은 처음 나온 것부터 봐야하는데, 어째서인지 그걸 먼저 접하게 되었다. 하여간 그 책이 꽤 괜찮아서 '도조 겐야' 시리즈를 모아놓기만 했는데, 이번에 그 첫 권을 드디어 읽었다.


  도조 겐야는 이 책의 주인공인 민속학자이자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탐정이다. 방랑 환상소설가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방랑 환상 소설가 탐정이라고 하나 더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를 보면서 떠오른 사람은 '긴다이치 코스케'이다. 이곳저곳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고, 그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살인 사건 그것도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게다가 독신이고 어쩐지 어수룩한 느낌도 주는 것 등등 비슷한 점이 많다. 생각해보니 서양에서도 뒤팽이 나온 다음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주는 파일로 밴스나 셜록 홈즈, 엘러리 퀸 등이 등장했었다. 아, 그런 거구나.


  주인공의 직업이 무속 신앙 내지는 민속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라, 글의 분위기가 좀 오싹하다. 아무래도 민간 무속 신앙이라 하면 귀신과 연관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전에 읽은 '산마처럼 불길한 것'도 그랬지만, 이 책은 날씨가 추워서인지 아니면 책의 분위기 때문인지 오싹했다. 역시 겨울에 읽는 호러 미스터리 책은 표지만 잡아도 몸이 덜덜 떨린다. 오늘 기온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본 일본 귀신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 공감각적인 효과가 더 좋다. 아, 오늘은 엄마랑 자야겠다.


  외딴 마을에 있는 두 가문은 사이가 좋지 않다.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똑같지만, 세대를 거듭해 내려오며 흑과 백의 기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정된 두 집안의 신령 때문이다. 외지인을 적대시하고, 무녀를 꺼려하면서 동시에 경외하는 마을 사람들. 이런 가운데 예전부터 가끔씩 발생하는 아이들의 실종 사건과 신령을 받아들이는 의식 도중에 죽은 여자아이, 미쳐버리거나 병약한 역대 무녀들,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생령과 빙의, 밀실에 가까운 상황에서 허수아비차림으로 발견된 시체들, 그리고 이상한 기운을 느끼는 어린 무녀. 이 모든 것들이 겹치면서 기괴하고 묘한 느낌을 준다.


  나도 모르게 뒤에 뭔가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난 용감하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겠어! 이건 절대로 뭔가 보이면 더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야! 이건 그냥 소설일 뿐이라고!


  책은 사건 관련자가 적은 여러 가지 기록물을 시간대별로 차례로 보여준다. 그래서 누구의 기록인지 주의 깊게 봐야한다. 안 그러면 다 '나'로 서술되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게다가 대대로 쌍둥이가 태어나 무녀가 되는 집안의 여자 이름이 다 '사기리'여서, 지금 언급하는 사기리가 어떤 사기리인지 구별을 해야 한다. 책에서는 이름 옆에 점을 붙여 그 개수로 구별을 했다. 점이 여섯 개면 대를 이을 손녀 사기리, 네 개면 그녀의 엄마, 세 개면 의식 중에 미쳐버린 그녀의 이모, 그리고 점이 한 개면 최고연장자이자 현역 무녀인 할머니 사기리, 이런 식이다. 처음 접했을 때는 당황했는데, 읽다보면 익숙해진다.


  거기다 무수히 많은 한자의 나열들! 아, 난 한자에 약하지만 일본어엔 더더욱 약하다. 중간에 마을과 가문의 이름을 어원으로 풀이하는 대목에서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이건 뭐란 말인가! 또한 참고하라고 실내 지도가 첨부되었는데, 좀 더 설명을 붙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들었다. 적어도 어느 방에서 사건이 발생했는지 별표라도 해줬으면 이해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사건의 해결은 음. 마을의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주지는 못했지만, 연쇄 살인에 대한 것은 풀어주었다. 하긴 민간 무속 신앙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100% 풀 수는 없을 것이다. 미스터리로 남겨둬야 할 부분은 남겨두는 것도 미덕이니까.


  혼란스럽고 아쉬운 부분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책의 흐름이나 분위기는 내 마음에 들었다. 이제 이 시리즈의 남은 두 권도 빨리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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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부제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원제 - All things shining : reading the Western

  저자 -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어떻게 뭐라고 써야할지 멍한 상태였다. 날씨때문일까? 아니면 책을 다 읽고도 받아들여진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모르겠다. 마음 속 구석에 처박힌 비뚤어진 심성을 드러내면, '그래요, 아는 거 많아서 좋겠네요.'라는 툴툴거림이 지금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부러움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사건에서 중심을 잡아내고, 그것에 연관된 작품을 떠올리고, 거기에 연결되는 철학 사조나 역사를 연상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그 철학 사조나 역사가 시간별로 차근차근 정리되어있다면,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 사이사이에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그건 놀랄 일이다. 처음엔 '이렇게 연결시킬 수 있구나!'라고 감탄하고, 뒤이어 그 능력을 부러워한다.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부제에서 잘 드러나 있다. 요즘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특히 서양 역사나 고전을 현대에 접목시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까 차례차례 연결이 되어있었다.


  1장 '선택의 짐'에서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제일 많이 하는 것, 선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자신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질문에서 저자들은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데카르트와 니체까지 연결되면서 신의 유무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러면서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에서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라는 요절한 작가의 얘기를 꺼낸다.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다루다가 루터와 소설 '백경 Moby Dick'으로 연결된다.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펄프픽션 Pulp Fiction, 1994'으로 이어진다.


  4장 '유일신의 등장'은 이제 그리스 로마 신들이 물러가고 기독교가 그 자리를 차지한 때를 이야기한다. 너무도 상반된 두 시대이기에 기존의 신화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예수는 어떤 입장이었는지에 대해 다룬다.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은 단테의 '신곡 神曲 La Divina Comedia'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칸트와 데카르트를 등장시켜 실존과 허무주의에 대해 얘기한다.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에서는 소설 '백경 Moby Dick'이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들은 이 소설에 대해 낱낱이 해부하고 분석한다.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에서는 루 게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 최고의 순간에 병으로 죽어가야 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던 사나이. 그와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하면서, 저자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논한다.


  선택에 관한 문제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으로 맺어지는 책 전반적인 흐름이 놀라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연결이 어색하다거나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왜 이 이야기가 나올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뒤로 가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소설 ‘백경’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줄 몰랐다. 어쩐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팍팍 느껴졌다. 안 읽으면 안 될 것 같다. 6장에서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리와 대사를 분석하는데, 와 진짜 저런 식으로 비평받으면 작가의 멘탈이 가을에 곡식 추수하듯이 탈탈 털릴 것 같았다. 어쩌면 멜빌이 이미 죽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책을 다 읽었는데 기억나는 건 단 두 가지이다. ‘백경’과 ‘펄프 픽션’. 언젠가 이 두 개를 꼭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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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고래 모비딕은 참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느껴요.
두껍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다 읽으실 수도 있어요~

바다별 2013-12-17 16:1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프랑크푸르트행 승객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3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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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Passenger to Frankfurt: An Extravaganza, 1970

  작가 - 애거서 크리스티



  작가 나이 80세가 되던 해에, 80번째로 내놓은 소설이라고 한다. 국제적인 음모에 맞서 싸우는 영국 외교관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파이 첩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용 연결이 많이 생략된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티 특유의 로맨스가 이어지는 바람에, 내용이 겉도는 것 같았다. 언제나 사건 해결 막바지에 모험을 같이 했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게 그녀 소설의 정석이지만, 이번은 너무 뜬금없다는 느낌이었다. 중후반까지 다른 소설에서 가끔 보이는 밀당도 나오지 않았는데, 막판에 갑자기 청첩장을 돌린다. 음,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적을 필요는 없지만, 이건 너무 많이 뛰어넘었다.


  스태퍼드 나이는 독특한 패션 감각과 남과 다른 유머 감각을 가진, 나름 유능한 외교관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에게 한 여인이 접근한다.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그에게 여권과 옷을 빌려달라는 제안을 한다. 호기심을 느낀 그는 그 일을 수락한다. 그리고 영국에 돌아온 그는 돌아온 여권과 옷을 보면서, 그녀에게 흥미를 가진다. 여인의 정체를 밝히려는 그의 앞에 정부의 비밀 조직이 나타나 일을 제의한다. 전 세계적으로 세를 넓히면서 체제 전복을 꾀하는 무리가 있는데, 그 수뇌부를 파헤쳐달라는 것이다. 그는 공항에서 만난 여인, 메리 앤과 함께 그 조직의 심장을 향해 나아간다.


  설정은 참으로 멋졌다. 뛰어난 연설능력을 가진, 전형적인 아리안 족의 특징을 보여주는 청년을 앞으로 내세워 젊은이들을 미혹시키는 집단이라니. 심지어 그를 히틀러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그 뒤에는 세계적인 부호와 유명한 무기상, 대규모 마약조직, 생화학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과학자 그리고 베일에 싸인 여자 스파이 한 명, 총 5명의 사람이 있었다. 돈과 마약, 과학, 무기, 그리고 정부 비밀 정보를 이용해서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청년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고 정부 요인을 암살하는 등 혼란을 일으킨다.


  그런 거대 조직을 파헤치는 내용이긴 한데,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 정보기관이 그렇게 애써 찾으려는 비밀이 어이없게도 옛날에 꽤나 유명한 귀족가의 노부인에게 5분도 안되어 발각 나는 건 너무했다. 차라리 스태퍼드를 보내는 게 아니라, 그의 대고모를 보내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그녀가 차를 마시면서 얻어낸 정보가 그가 목숨을 걸고 잠입해 알아낸 것보다 더 많았으니까.


  거기에 아무리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하지만, 한 나라의 외교관이 자신의 여권이나 신분증을 그렇게 아무한테나 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걸로 무슨 일을 할 줄 어떻게 알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그녀의 말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 단순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미모에 혹한 걸까?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라는 책임감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지만, 음. 우리나라에도 그런 공무원들이 많으니……. 여권을 처음 보는 여인에게 주는 놈이나, 국가 안보에 힘써야하는 조직원들에게 국내 사이트에 댓글 달라고 하는 놈이나 거기서 거기지. 포털이나 유머 사이트에 댓글 다는 게 국가 안보에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또한 그들을 소탕하는 과정도 참으로 밋밋했다. 어차피 스태퍼드의 시선만으로 서술되는 소설이 아닌데, 굳이 그렇게 조용하게 진행을 해야 하는 걸까 의아했다. 명색이 첩보물인데, 너무 조용했다. 보고와 회의로 거의 모든 상황이 서술되다니, 이건 좀 너무했다. 총격장면이 하나 있기는 한데,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쓴 첩보물이 더 긴장감이 있고 재미있었다. 어쩐지 뒷심이 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가 이 작품을 쓴 나이 대를 생각하면, ‘그 나이에 이런 스케일을!’ 이라면서 감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떠나보면, 많이 아쉬웠다.


  어이없는 착각으로 40번째 책을 먼저 읽는 바람에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이것으로 2013년도 크리스티 전집 중 40권 읽기 목표를 이뤘다. 이제 남은 40권은 2014년의 몫이다. 한 살 더 먹는 건 싫지만, 그녀의 소설을 빨리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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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교전
미이케 다카시 감독, 이토 히데아키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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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悪の教典, 2012

  감독 - 미이케 다카시

  출연 - 이토 히데아키, 니카이도 후미, 소메타니 쇼타, 하야시 켄토



  기시 유스케에 미이케 다카시라니! 이 미친 조합은 뭐란 말인가! 당연히 봐야 하는 영화였다. 미이케 다카시라면 기시 유스케가 그려낸 음울하고 비정상적인 인물을 제대로 표현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두툼한 두 권 분량의 소설을 두 시간에 담아내긴 무리였을까? 한꺼번에 등장인물이 쏟아져 나오는 초반은 극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고등학교 교사인 하스미는 다른 교사들에게서도 학생들에게서도 신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다른 교사들이 하기 꺼려하는 궂은일도 마다않고, 학생들의 상담도 잘 들어주고 해결도 해준다. 그래서 학생들이 '하스미!'라고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하지만 그에게도 비밀은 있었으니, 바로 여학생과 관계를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과 감정적인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이지메라든지 집단 컨닝, 교사의 학생 희롱, 가정 폭력 등을 보여주면서 다른 학생과 교사들의 사연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는 아니고, 짧은 장면 전환으로 대충 그런 분위기라고 추측할 수만 있었다. 거기다 하스미의 과거가 잠깐씩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하스미의 과거와 현재, 환상과 실재를 오간다. 그래서 몰입이 힘들었나보다. 하지만 초반에 그냥 지나가는 장면도 꼼꼼히 봐야한다. 나중에 다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반을 넘어가면서, 하스미의 살인극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아를 처리한다. 느릿하니 이제 연주가 시작된다고 알리는 것 같다. Adagio, 아주 느리고 침착하게


  뒤이어 그는 아주 대범하게 그를 의심하는 다른 교사를 죽인다. 이때는 조금 속도를 내었다. 정확하고 빠르게 그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Moderato, 보통 빠르게


  이제 그의 살인에는 가속이 붙었다. 살해한 교사와 함께 자신을 의심하던 학생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축제 준비를 하려고 학교에 남아있는 다른 아이들까지 그의 희생양이 된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고, 시체를 숨기려면 전장에 숨기라는 말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Allegro, 빠르게


  이후 영화는 아이들을 웃으면서 죽이는 하스미와 그의 행동에 놀라움과 배신 그리고 분노를 느끼며 반항하는 아이들의 대결로 이어진다. 거기에 하스미는 미리 범인으로 몰아세울 다른 교사에 대한 증거조작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냉정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마치 클라이맥스를 향해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어 빠르고 힘차게 연주하는 음악처럼, 그의 행동에는 후회도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었다. ‘역시 미이케 다카시!’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Presto, 매우 빠르게 또는 Prestissimo


  그에게 어쩌면 눈앞의 아이들은 자기가 가르치던 제자가 아니라, 사냥할 토끼나 여우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하긴 자기는 여학생과 관계 맺는 것이 당연하고, 다른 교사가 그러면 약점으로 이용해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보다.


  급박하게 흐르던 음악이 절정에서 끊어진다. 마치 줄에 몸을 묶고 높이 올라갔다가 툭하고 추락하는 것처럼. 그게 하야미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체육 교사 얼굴이 낯이 익다했더니만, 일본 드라마 ‘용사 요시히코’ 시리즈와 ‘백야행’에서 찌질하기 그지없는 주인공으로 나왔던 배우였다. 여기서도 비슷한 이미지로 나온다. 그리고 하스미가 매번 흥얼거리는 노래, 나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곡이다. 하지만 이제 어디 가서 이 노래 좋다고 추천하지 못하겠다. 사이코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반박 들어올까 봐.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 애인님이 기시 유스케 작품을 모으고 있는데, 빌려서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내가 가져야……그러면 설마 마구 화를 내면서 ‘실망이야’라면서 ‘우리 그만 헤어져’ 이러는 건 아니겠지?


 * 하스미가 흥얼거리는 노래 제목이 ' Mack The Knife 칼잡이 맥'이라는 뜻이다. 그걸 응용해서 리뷰 제목을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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