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를 보는 남자
임영태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5년 10월
절판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부어 놓고는 밖으로 나가 현관 옆의 반납가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온다. 전부 여덟 개. 나는 담배 한 대를 빼물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누른다. 팍. 모니터가 정전기 현상으로 반짝거리고 나자 우우우웅 먼 들녘의 매운 바람소리 같은 팬 작동 소리에 이어 컴퓨터 하드 디스크가 돌아가고 화면에는 프로그램 로고가 나타난다. 엔터키를 치자 메뉴 화면이 뜬다. 이어서 제법 날렵하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들, 나는 반납 화면으로 전환하여 반납기에서 빼온 테이프 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한다. 1294,725,384,588(오팔팔이군!),603,2605,1751,322.
-12쪽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어제 들어온 신간 테이프 하나를 진열장에서 꺼낸다. 영업 사원이 왔을 때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들여놓은 대만 영화다. 좋은 영화는 가능하면 구입해 놓자는 내 어줍잖은 자존심이 시킨 일이다. 이 영화는 그럴듯한 상도 받았고 비평가들의 평도 좋은 편이지만 그런 건 고객들의 선택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아카데미 상이라면 모를까 칸느영화제 감독상이나 비평가협회 선정 최우수 작품이니 하는 배경들은 오히려 고객들을 '앗 뜨거!'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당신을 졸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 대개의 고객들은 그 안내문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붙여 자켓 헤드에 박힌 광고문이라니, '산해진미와 삶의 휴머니티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휴머니티를 만나자고 비디오 가게에 오는 사람은 없다. -13쪽

게다가 고객들은 대만 영화에는 익숙하지 않다. 감독도 배우도 낯설고, 무슨 화끈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약된 줄거리에서 풍기는 건 딱 청소년 대상 교양 문예물의 인상이니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이(13)테이프 역시 대여 횟수 4회에 그쳤던 지난 번의 [로빙화]처럼 본전 뽑기는 힘들 것만 같다. 대만 영화로는 [결혼 피로연]이 그나마 본전에 접근했을 뿐이다. -13,14쪽

나는 가게 안에 손님이 있으면 영화를 보지 못하는 체질이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같이 앉아서 보는 거라면 상관 없지만 뒤통수에 손님을 놔 두고는 영 집중이 안 되었다. 또 하나, 나는 손님이 테이프를 고르다 말고 영화를 힐끔거리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화가 치민다. 어쩐지 그런 행위는 감상자인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니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든가. 그렇다고 내가 영화를 유별나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다만, 진득히 계속 보는 것도 아니면서 껄렁하게 하면을 기웃거리기나 하는 그런 눈길들이 싫다.-15쪽

청년은 신간 진열대에 달라붙어 열심히 이것저것 테이프를 꺼내보기 시작했다. 화끈한 액션물을 좋아하는 청년이다. 나는 청년이 어느 테이프를 고를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새로 나온 게 별로 없네요?"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이미 하나는 골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월말과 월초에는 테이프가 들어오질 않아요. 며칠 지나면 볼 만한(26) 게 많이 들어올 겁니다." "스티븐 시갈 꺼는 새로 나온 것 없어요?" "그 사람은 영화가 많지 않아요. 죽음의 표적은 보셨나요?" "아휴, 그거야 옛날에 봤지요. 액션은 정말 시갈이 끝내주는데...전에 어느 글에선가 보니까 반담도 시갈이 자기보다는 한 수 위라고 말했더라구요." 청년은 내가 예상한 테이프를 뽑아 뒷면의 줄거리를 읽고 있었다. "한 수 위니 어쩌니 해봐야 영화배우들끼리의 얘기일 뿐이지요." 내가 조금 심드렁하게 받아주자, "아니예요!"-26,27쪽

그 무슨 불경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청년이 얼굴을 돌렸다. "반담은 가라데 유럽 챔피언이었어요. 그리고 시갈은 백악관 경호실의 무술 사범이었구요. 둘 다 실제로도 쟁쟁한 무술 고수들이라구요." 그건 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비디오 잡지를 열심히 들여다본 덕분에 그런 식의 스타들의 뒷배경은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갈이 백악관 무술 사범이었다는 건 내가 알기론 불확실한 정보였다. -27쪽

나는 영업 사원이 들고 온 일곱 개 중에서 네 개를 들여놓았다. 총 갯수로는 다섯 개였다. 우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한 액션물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두 개를 집어들었고, 이연걸 주연의 홍콩 느와르는 하나를 할까 두 개를 할까 망설이다가 일단 하나만 들여놓기로 했고, 자켓 그림에서부터 색정 내음이 농염한 이태리 에로물 하나, 그리고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는 격투기 영화 하나였다. 격투기 영화를 들여놓은 건 조금 찜찜했다. 한때는 그런 비디오가 잘 나갔다고 하던데 요즘엔 격투기에 대한 반응이 시들했다. 내가 근래에 보았던 몇 편도 줄거리가 너무 상투적이었다. 싸구려로 양산해낸 영화는 고객들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일단 자켓에 쓰여진 현란한 광고 카피에 기대보기로 했다. 한데 이 비디오 보급처가 '스타맥스'이고보면 카피도 믿을 건 못 된다. '스타맥스'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체로 광고 카피에 허풍이 심한 편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출시되는 모든 비디오에 '최고의','최대의','숨막히는','완벽한' 등등 온갖 그럴싸한 수식어는 다 동원시킨다. -39쪽

가게를 연 초기에는 대여해 간 테이프 중간에 가끔 엉뚱한 것이 녹(39)화되어 돌아오고는 했다. 테이프에 녹화가 조금 돼 있다고 물어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테이프를 새로 들여놓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대여해 갔던 고객들은 테이프를 반납할 때면 투덜거리고,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내 하소연을 드은 영업 사원은 빙긋이 웃으며 아주 간단한 처방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신간을 구매하자마자 테이프 아래의 탭을 제거해 놓으라는 것이었다. -39,40쪽

근방에 아파트를 끼고 있는 목 좋은 가게에서는 빅히트 영화인 대박 테이프는 여러 개씩 들여놓고는 한다. 하지만 수입이 시원찮은 내 가게로서야 아무리 대박 프로라 해도 두 개 이상 구입한다는 건 무리였다. 가뜩이나 들어오는 손님마다 볼 만한 비디오가 없다고 투덜거리는데, 어차피 반짝하고 나면 구프로가 되어 밀려날 테이프를 한 종류만 여러 개 구입할 수는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고 보면 테이프나 빨리 돌려야만 예약하고 기다리는 고객들에게 불평을 사지 않을 터인데, 1박 2일의 대여 기간을 지키기는커녕 열흘씩 자기 안방에 테이프를 방치해 두는 고객들이 있게 되면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대박 프로를 대여해 간 집부터 시작해서 열세 집 모두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큰 맘 먹고 반나절이나 소비했음에도 테이프 회수는 반타작에 그쳤다. (중략)이사 가버린 집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디오 가게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석 달인데 그동안 떼어 먹힌 테이프가 열 개도 넘었다. 한번은 중간에 이사간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가짜 주소를 적어놓고는 떼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 후로는 가게에 처음 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필히 주-52쪽

민등록증을 확인하였다. 가게를 개업한 초기에는 기껏 비디오 하나 빌려주면서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한다는 게 계면쩍기만 하여 상대가 불러주는 대로만 적어 두었던 것이다. "제가 떼어 먹을 사람같이 보여요?"(52) 가끔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마뜩찮은 표정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휴, 그럴리가 있나요. 그저 형식적인 겁니다."-52,53쪽

가게 안에는 '대여 기간을 넘길 시 하루당 5백원의 벌금을 받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데 나는 아직 한 번도 벌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뿐 아니라 모든 비디오 가게가 벌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다. 천하에 야박한 장사꾼 놈이라고 욕이 들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 나라가 아직은 신용 사회가 못 된다는 증표이다. -53쪽

저녁엔 요 며칠을 통틀어 가장 손님이 많았다. 대목의 계절이 시작된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디오 가게는 여름과 겨울이 성수기이다. 여름엔 학생들의 여름 방학과 직장인들의 휴가가 있고, 겨울엔 겨울 방학과 이런저런 연휴들이 많다. 그리고 기나긴 밤이 있다. "아저씨 이거 재미 있어요?" 퇴근길에 들른 듯 양복에 가방까지 들고 있는 손님이 테이프 하나를 들어 보인다. 그다지 재미 있다고는 할 수 없는 비디오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언제나처럼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건 아직 못 봤는데요." 비디오 가게 주인에게 재미를 물어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65쪽

재미없다고 하면 안 빌려갈 것이 뻔한데, 고루고루 테이프를 회전시켜야 할 입장에서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주 막역한 단골 손님이라면 솔직하게 평해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직 보지 못했다고 비켜가게 되었다. -65쪽

사실 가게를 낸 초기에는 고객을 끌기 위하여 테이프를 제법 많이 구매했었다. 한 달에 오십 개까지 들여 놓기도 했었으니 그야말로 내 생활비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출혈 구매였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들여 놓아도 막상 재미있는 테이프는 별로 없었다. 테이프를 보는 안목이 없어서였다. 시사를 해 보고 구매하는 게 아니고 테이프 자켓의 요약된 줄거리, 일방적인 선전 문구, 몇 개의 광고 화면만을 가지고 즉석에서 판단해야 하는 사정이므로 애초부터 확률이 높은 게임일 수가 없었다. '극장 개봉 화제작'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관객들로부터 검증을 받은 영화이니니만치 어느 정도 믿고 선택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사실 무조건 신뢰하고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79쪽

영화 관객과 비디오 관객은 같지가 않은 것이다. 연인끼리거나 혹은 뜻 맞는 친구와 더불어 모처럼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싶어 찾아가는 게 영화관이라면, 비디오는 방에서 혼자 뒹굴뒹굴 시간 죽이기 위하여 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79쪽

자켓 표면의 한정된 정보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조합하고 섬세하게 유추해 보아야 하는 그 일은 사실 상당한 논리적 분석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게다가 그 과정은 영업사원 앞에서 테이프를 들여다보는 1분여의 짧은 시간에 즉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튼 그렇게 되면, 어느 문구가 과장되어 있고 어느 문구가 영화의 핵심인지, 요약 줄거리에 생략된 내용은 대충 어떤 것인지, 캡춰된 몇 개 화면은 영화의 어느 장면과 맞닿아 있는 것인지가 얼추 그려지게 되고, 그러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전개 속도, 주인공의 이미지와 조연급 인물의 역할까지가 선하게 잡혀온다. -80쪽

사람들은 신간이 들어오면 귀신처럼 집어든다. 어떤 사람은 아예 신간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에 나온 모든 비디오를 다 본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 올 때마다 신간이 적다고 투덜거리는 게 안쓰러워서(정말 안쓰러웠다)내가 모처럼 마음 먹고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비디오 한 편을 추천해 주자 사내는 대뜸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이거 오래 된 거 잖아요?" 마치 쓸모없는 골동품이라도 대하는 태도였다. "영화라는 게 시간 지난다고 삭는 거 아니잖아요?아주 오래된 거라면 지금 취향하고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이건 작년에 출시된 거예요. 재미 있으니까 한 번 믿고 봐 보세요." "에이, 그래도 지난 영화는 어쩐지.. 새로 나오는 것도 얼마든지 많은데 굳이 한물 간 영화 다시 볼 필요는 없잖아요."-81쪽

에로물 일색이다. 방화 진열대에 서는 고객은 대개가 에로물만 찾으니 어쩔 수 없다. 방화 중에도 괜찮은 영화가 많은데 그런 건 영화관에서나 팔린다. [길소뜸],[남부군],[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등 몇 편은 내가 비디오 가게 시작한 이후 아직 한번도 대여란에 입력된 적이 없다. (중략) 에로물이 아니고도 대여가 되려면 영화관을 들썩거리게 만든 영화라야만 한다. [장군의 아들],[결혼 이야기],[서편제],[투캅스]...이 정도면 어지간한 외화쯤 우습게 뛰어 넘는 대박이 되는 것이지만, 그 밖에는(142) [전국구],[시라소니] 등의 호쾌한 액션물이나 되어야 가까스로 본전에 접근한다.-142,143쪽

"처음이냐고 물어보고, 처음일 경우엔 꼭 주민번호를 받아 놔야 돼. 그리고 신프로 빌려가는 사람에게는 대여 기간이 1박2일이라는 걸 환기시켜 주고, 반납 들어온 테이프도 번호는 꼭 적어 나야 돼. 혹시 영업 사원이 테이프 가져오면 일단 다 받아 놔, 비닐은 뜯지 말고, 그리고.."-162쪽

무슨 내용이든 좋다고 했으니 그저 영화 이야기나 할까 합니다. 지금 제 삶의 언저리엔 그것뿐이니까요. 말하고 보니 자신이 꼭 무슨 영화인이라도 되는 것 같군요. 하기야 비디오 가게 주인인들 영화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겠지요. 비디오 협회에서도 그러더군요. 우리는 문화 예술 종사자라고.-200쪽

"비디오 가게지요? 테이프가 기계 속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네요. 어떡해야 되지요?" 나는 이름을 물어보고 나서 그대로 놔 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의 고객 명단으로 무슨 테이프를 빌려갔는가 확인해 보았다. 한창 잘 나가는 테이프였다. 주소를 보았더니 가게에서 멀지 않았다. 마침 한가한 시간이니 가서 테이프를 회수해 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은 드라이버 하나를 챙겨 가게를 나섰다.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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