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면에서 바라본 평면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모든 사물은 평면이 아닌 입체다. 평면도는 사실감이 없다.

사각형만 그리다가 육면체를 그리는 건 차원을 넘어가는 문제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간다. 4개의 꼭지점이 8개로 늘어난다.

 

잘 그리던 그림이 갑자기 무너진다

같은 사물을 한 면이 아닌 여러 면이 보이게

그리는 것 뿐인데 갑자기 구도 잡는 것부터 어려워진다.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집도 흔들린다.

눈으로는 반듯한 건물이 어설프게 설치한 텐트처럼 찌그러진다.

 

다시 나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로 돌아가고 만다.

막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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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運命)이란 무엇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이란 내가 사는 세상이고 환경이고 바깥이고

()이란 나 자신이며 내부며 능력과 쓰임새의 크기와 범위이다.

 

기본적으로 운명이란 타고난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세상도 내 부모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도, 내 외모도 성격도 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운이란 흐름이고 움직임이며 세력의 강약이며 리듬이며

나를 포함한 세상이 가는 길이기에 접근하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명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질이며 성정이기에

운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운은 유동적이면서 고정적이고 정해진 길이지만 

다른 길의 가능성이 열려 있고

명은 고정적이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화가 가능하다.

결국 운명이란 정()과 미정(未定)의 가능성을 다 품고 있다.


힘의 크기로 명은 무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운을 따를 수밖에 없다.

명은 운을 거부할 수 있지만 작은 명이 큰 운을 움직이려면

그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결과에 대한 희생과 책임이 있다.

명에게 운이란 목줄을 채운 호랑이와 같은 것이다.

 

호랑이는 결코 길들일 수 없는 맹수기에

먹이를 주고 잘 달래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지만

잘못하면 목줄을 끊고 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운은 명을 쉽게 누를 수 있는 반면에 명은 운을 함부로 하기 어렵다.

 

운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 댐으로 가두거나

역류시키려 한다면 혼란이 올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대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시간을 두고 조금씩 방향을 트는 것이다.

방향을 조금만 틀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각도는 점점 커질 것이고

결국 긴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 운에 맡긴다는 의미를 오해하면 안 된다.

운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한 후에야 운에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즉 진인사이후대천명(盡人事以後待天命)의 자세이다.

진인사 즉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명을 다한 것이고 

대천명 즉 하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운에 그 노력의 결과를 맡긴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이다. 한 점 후회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모아

남김없이 불태워야 진이 되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때라야 하늘의 뜻을 기다릴 자격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노력이 아직 남았다면 더 노력해야지 운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운을 대하는 자세다.

운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라는 말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 운을 기다리는 것은

로또를 사고 당첨을 기대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 횡재수는 불길할 수 있다. 노력이라는 대가를 먼저 결제하지 않고

덜컥 얻는 결과는 카드로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결국 고지서가 나중에 날아온다. 고지서에는 지불 하지 않은 노력 대신에

여러 가지 불운이 적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횡재는

일단 경계하고 조심히 다뤄야 한다.

 

운과 명은 우주의 법칙이 인간에 적용된 질서다.

과거엔 운을 알기 위해 음양과 오행을 통한 천문, 주역 등을 연구하였고

명을 알기 위해 유학, 명리를 공부하였다.

지금은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으로 운을 알아내려 하고

경제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으로 인간의 명을 분석하고 응용한다.

 

현대는 운이든 명이든 모든 걸 과학에 기댄 인간의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시대다. 그러나 인간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거대한 우주 앞에서는 티끌같은 존재다.

 

천명(天命)을 받들고 천운(天運)을 따르는 것은

글자만큼 대단하지도 고루하지도 않다.

천명과 천운은 성경, 코란, 불경에도 있고 수많은 인류의 지혜에 다 있다.

 

하늘의 명이 별것은 아닐 것이다

바른 마음으로 스스로 사랑하고 탓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사는 자세일 것이고 천운을 따른다는 것은

자연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과한 욕심을 가지지 않으며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법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바른 자세로 명을 받들고 자연의 법대로 가는 운을 겸손하게 따르는 사람을

하늘도 분명히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하늘이 좋아하는 길이 천운의 순리고 조화고 질서이며

그 길을 따라가는 자가 천명을 다하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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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7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고 보니 이젠 주역이 더 큰 관심으로 다가오네요.

책을베고자는남자 2024-03-2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자가 위편삼절까지 하면서 공부했다는데 과연 주역이 그정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습관적으로 AI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거 나중에 기계가 다 해주겠군" 하면서 말이다.

삼성폰이 통역서비스 어플을 자랑할 때도

앞으로는 영어 회화 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연히 지인이 보내 준

국회에서 제작한 달력 속 AI가 그렸다는 국회 주변 풍경을 본 순간

 

또 뇌리를 스친다.

뭐 사람이 그린 것과 무엇이 다르지?....

기계와 사람이 그린 게 구분이 되지 않은 세상인데

블록체인을 이용한 저작권 등록을 해야 하나...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이 아무리 잘 그렸다 해도

결국 기능적인 부분은 기계가 그린 것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기계가 그린 그림이 더 완벽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실수를 기계는 하지 않으니까.

 

유명한 화가라면 작품에 부여하는 의도나 예술성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아마추어가 그린 것은 그야말로 내세울 특이한 게 하나도 없겠다 싶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글을 쓰는 게 이젠 뉴스거리도 아닌 세상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를 기계는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뚝딱 만들어 버린다과정에 의미가 있다고 자위하기엔 참 허망한 일이다.

훗날 나같이 평범한 인간들은 AI의 그늘에 가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AI에게 없는 게 창의성이라고 하는데 평범한 사람들도 대부분 별로 없는게 창의성이다.  

나같이 어정쩡한 사람들로서는 앞으로 인간끼리 경쟁하다 느끼는 열등감과 소외를 AI에게도 느껴야 하는 슬픈 세상이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친 생각일까? 기계에 느끼는 이 감정은 뭐지?

 

이젠 오은영의 AI 상담소“ 김창옥의 AI와 잘 지내는 법 토크 콘서트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AI 스트레스 증후군 전문 상담사를 찾아가야 할 날이 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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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스케치는 주로 펜으로 그린다.

색을 입히는 것은 그리는 이의 자유다.

진하게 넣어 수채화 느낌이 나게 할 수도 있고

가볍게 넣어 스케치의 느낌을 더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펜으로만 그리는 게

어반스케치의 느낌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 같다.

펜이 가지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

단색의 펜 선이 주는 거칠지만 생생한 터치야말로

 

여행하면서 즉석에서 그려보는 현장감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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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인간은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오직 나의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다.

타인의 허락을 거부하려면 나의 명령이 그 만큼의 명분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명령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권위와 구속력을 갖고 있는가?


나의 명령은 오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나를 지배할 수 있는 권위는  이성이다.

여기서 이성이라 함은 합리적인 사고로서의 도구나 수단적 의미를 넘어서며

오직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과 그 외를 구분 짓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오직 목적 자체인 존재로 격상한다.

어떠한 수단이나 도구에 복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본질적인 존재.

이성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세계를 보는 눈이자

판단하는 기준인 것이다.


이런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자유로운 인간이란 누구도 아닌 오직 만이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이성이 내린 명령에만 복종하는 인간이다.

 

이성이 내린 명령이란 자율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법칙,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이다.

 

철학적 이성은 물리와 경험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개념의 세계다.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이성이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저 공허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런 이성을 논하는 것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관념을 기준으로

인간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성을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진화론에 입각한

생물학적 존재로서 그저 뇌과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극에 반응하고 환경에 대응하는 고등 생물로서

계속 진행되는 뇌의 구조와 역할의 연구 결과에 따라

그 정의를 계속 바꾸어야 하는 유동적이고 기계적인 존재가

인간의 정의라면 과학적이라고 박수를 쳐야 할까?

 

철학적인 정의가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스스로 오직 생각만으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불과 몇십 년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대다.

미래는 굳이 생각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인공지능과 완전한 자동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존재가 아닌 필요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소수의 생산적인 인간이 운영하는 기계에 의해 운영되는 세계에서

다수의 무용한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먼 과거의 철학을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 AI보다 고루한 관념의 철학자 칸트가,

유물론적 냉정한 뇌과학의 진실보다 관념론적 철학에 의지한 인간의 정의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래서 칸트는 미래에 역주행하는 인기를 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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