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쉬운 책과 어려운 책이 있다.

취향에 따라서 보는 데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 싶지는 않다. 쉬운 책은 나쁘고 어려운 책은 좋다 라는 이분법도 아니다. 쉬운 책을 보며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고, 재미로 읽는 것도 좋다. 내 수준에 비해 어려운 책을 무리하게 보다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독서의 흥미를 잃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니까.


그러나 내게 독서는 ‘재미’나 ‘스트레스 해소’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내게 독서는 ‘도전’이다. 다소 거창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나태한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도전이요, 내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몸부림치는 도전이요, 이를 악물고 덤벼 기어이 쓰러뜨리고 싶은 목표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허구헌 날 들여다본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 책들을 비싼 돈 주고 스트레스 받으며 쳐다보는 나를 주변 사람들은 딱하게 바라본다.

그래도 난 좋다. 어려운 책의 표지를 볼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게 되며 마치 올림픽 게임에 참여하는 국가대표 선수마냥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휘몰아친다. 저 놈을 내가 기어이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는 내 두 눈에 쌍불을 켜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부족한 지식수준과 약한 의지는 금방 장벽에 부딪치고 만다. 금방 정복될 거였으면 어려운 책도 아니리... 한 방에 떨어지고 두 방에 나가자빠져도 결코 포기하진 않으리.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나폴레옹의 사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불가능은 없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가끔은 있기에 긴 호흡으로 돌아 선다. 비록 지금은 내가 후퇴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전진하리라..다짐하며 책장에 꽂아 놓는다. 꽂을 땐 거꾸로 꽂아 놓는다. 먼 훗날 다시 싸울 땐 바로 꽂아 놓으리라 다짐하면서.

오늘도 또 한 권을 거꾸로 꽂아 놓았다. 난 챔피언 체질은 아닌 것 같다. 백전삼십승정도니 말이다. 그래도 삼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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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IS란 국제테러단체에 대한 뉴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우리나라 청년이 제 발로 찾아간 뒤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인질을 참수하고 심지어 철장에 가둬놓고 화형 시키는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명분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처분할 수는 없다. 특히, 참수한 머리를 어린이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들고 서있는 인터넷 사진 한 장은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라 충격에 말문이 막힐 정도다.


그네들은 스스로를 알라신의 성전(聖戰)을 치르는 자랑스러운 구국의 ‘전사(戰士)’로 일컫지만 우리는 잔인한 ‘테러’를 일삼는 ‘테러리스트’라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지하드(성전)를 수행하는 지하디스트인가 아니면 테러리즘의 화신에 불과한가?


먼저 테러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일반적으로『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개인이나 대중 또는 정부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적 행위. 또는 그러한 정치적 사상이나 주의』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대로면 우리나라의 독립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테러가 된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모든 독립투사들도 당연히 다 테러리스트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과 알카에다나 IS가 인질들을 살해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안중근 의사의 목표는 조선합병을 지휘한 이토오 히로부미라는 정치인 1명이었지 일본 국민들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적대국 일본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당시 독립군이나 독립투사들 역시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특정인이나 무장병력, 경찰을 목표로 했지 민간인인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설사 과정 중에 일부 희생된 민간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고의가 아니었으며 이토록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청산리 전투같은 독립투쟁의 보복으로 행해진 일본군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차라리 바보스러울 정도로 명분에 경도되어 있었고 오히려 투쟁에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도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살아 있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일본국민에게 보복을 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는가?


그에 반해 IS같은 조직은 정치적 리더가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테러 같은 폭력으로 아무 죄가 없는 수백명의 일반인을 희생시켰고, IS는 기자 같은 민간인을 참수하고, 비록 군인이지만 명령을 받고 움직일 수 밖에 없는 ‘하수인’을 잔혹하게 화형 시켰다.


그들의 명분은 ‘외세의 배격’이니 일제강점기 우리의 독립운동과 비슷할 것이다. 소수의 세력으로 다수의 강력한 적을 상대하기에는 게릴라전이나 테러 같은 방법밖에 없음을 잘 알지만 그들의 방법은 부득이한 경우를 넘어섰다. 무장병력이 비무장 상태의, 심지어 전쟁 중이라도 공격해서는 안 될 기자와 같은 일반인을 적국의 국민이라고 해서 살해하는 것은 백번 양보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자국민의 인권과 안전에 민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이는 결국 국제여론을 악화시켜 그들의 입지를 점점 좁아지게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미국에 비교하여 약자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들이 살해한 민간인들 역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미국의 국민일 뿐 또 다른 약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진정 정당한 독립투사라면 지금부터라도 민간인 살해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토록 주창하는 위대하고 거룩한 ‘알라신의 성전’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들의 주적(主敵)은 이 더러운 전쟁을 국익이라는 명분 하에 계획하고 명령한 백악관의 지도층, 펜타곤의 고위장성들, 네오콘의 더러운 무기상들이지 이름 없는 국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성은 개들에게 던져줘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종교경찰청사에 붙여져 있는 구호다. 한편에선 근대문명을, 또  다른 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서슴지 않았던 이율배반적인 서양 근대이성의 오만과 모순을 신랄하게 조소하는 뜻이리라.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한다면 진정한 이성(理性)은 서양의 이성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성이다. 서양의 이성을 조롱하는 그들의 이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함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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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전사의 탄생 - 분쟁으로 보는 중동 현대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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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IS란 단체에 대한 국제뉴스가 자주 나온다. 우리에게 생소했던 이 단체는 우리나라 한 청년이 제 발로 찾아 들어간 뒤로 유명해졌다. 또 참수와 화형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테러로 미국을 자극하여 전쟁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에게 중동은 먼 지역이다. 70년대 중동개발 붐으로 우리나라 근로자의 외화벌이로 잠시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있던 때를 제외하곤 그저 TV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상관없는 곳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탈레반, 알카에다 같은 단체들이며, 이스라엘 대 중동전쟁, 팔레스타인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같은 크고 작은 전쟁, 911테러로 대표되는 자살테러,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인물들의 연원이 모두 중동이라는 지역에서 비롯됐다면 지금처럼 뉴스거리로만 지나치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우리가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무관심속의 먼 세계,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참극들이 그들만의 문제일까? 그동안 우리가 화면으로 바라본 중동은 실재 그대로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동은 걸프전 당시 스포츠게임처럼 중계됐던 미국 CNN의 칙칙한 화면,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AK-47 소총을 치켜든 사람들, 요새 가끔씩 인터넷에 떠도는 끔찍한 인질참수 동영상들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미국의 시각이지 우리의 시각이 아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그네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진실은 바뀔 수 있다.

 

이슬람권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배경에는 대부분 사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척박한 땅과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인구 성장이 있다. 석유는 강대국의 착취를 끌어들였을 뿐, 그 열매는 일반 국민들에게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자원과 인구의 불균형은 분쟁의 에너지가 되어 청년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건설적으로 해소할 곳이 막힌 그들의 젊은 에너지는 전쟁만이 유일한 분출구가 되었다.

 

또한, 근대화를 이끄는 세속주의 군사정권과 이슬람 교리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종교권력 간 갈등, 수니파와 시아파 같은 종교 및 부족 간 뿌리 깊은 지역 갈등, 석유이권과 맞물린 미소 냉전이념 갈등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는 당연히 전 세계 패권을 쥐락펴락하는 미국이다. 각종 비밀공작으로 정권의 전복마저 서슴지 않는 CIA같은 정보기관들의 악행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첫 번째 걸림돌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거의 무제한으로 지원을 했다.

무기는 기본이고 군사 및 테러훈련까지 지원해 소련과 싸우도록 했다. 당시 소련 헬기를 무력화하기 위해 지급했던 수천 개의 대공 스팅어 미사일을 지금도 회수하지 못했고 그 때 살인기계로 키워졌던 무자헤딘(지하디스트, 의용군)들은 전수받은 제조법으로 만든 폭탄을 나중에 미국에 되돌려 준다.

 

미국 뿐만 아니다. 중동의 분쟁을 부추기는 주변 국가들도 문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개입하여 온갖 공작을 펼치는 사우디와 파키스탄은 같은 이슬람권임에도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종범(從犯)이다. 사우디는 막대한 오일달러를 기반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했고, 파키스탄은 공작 및 군사기지 제공, 군사훈련 등을 지원했다. 어쩌면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들의 등장은 이 모든 것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극단적인 이슬람원리주의라는 종교적 배경, 무력투쟁의 반복으로 길러진 호전성 , 오일달러로 인한 경제적 지원과 정규훈련을 통한 군사적 지원으로 다져진 전투력, 미국의 대규모 공습에도 견딜 수 있으며, 능숙한 게릴라전으로 다수의 정규군과 대적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산악지대의 지형적 조건 등은 소수의 힘으로 다수의 적을 장기간 상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 중동사태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 미국도 중동도 쉽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소련이 아프가티스탄 전쟁을 무려 7년이 넘도록 진행하다 결국, 소련붕괴의 단초가 된 것도 그렇고 미국 역시 중동에 발이 묶여 최근 이라크사태에서처럼 지난하고도 지루한 소모전을 겪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처럼 해결을 어렵게 하는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중동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당연히 강대국들의 중동개입 포기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사회주의 불럭과 경계를 나누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과 석유 이권이 존재하는 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 , 강대국이 물러간다 해도 그들이 과거에 뿌려 놓은 갈등으로 인한 아랍권 국가 간 분쟁, 부족 간 반목, 종교적 파벌투쟁으로 파인 골이 어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장기간 외세 침략과 내전의 결과이겠지만, 아랍인들의 종교적 호전성도 문제다. ‘지하드로 일컬어지는 성전(聖戰)을 무슬림의 교리로 확립하고, 이를 어기면 동족까지도 무참하게 학살했다. 자살테러를 불사하는 강력한 투쟁의식은 자위권의 발로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양날의 칼이 되고 있으며 특히, 참수(斬首)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죽음이 무서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스펜서의 말이 무색하게도 이 종교는 수많은 무슬림들을 죽음의 성지로 보내는 데 이용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 하나가 있다. 서로 물로 물리는 싸움 속에 결국, 죽어나간 건 이름 없는 백성들이란 것이다. 그들은 왜 죽는 지도 모르고 역사 속에 사라져 갔다. 라덴이 외쳤던 교리와 신념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에 태어난 걸 알라신에게 따져야 될까?

 

빛나는 인류의 문명을 아득한 원시시대로 회귀시켜버리고 있는 중동의 역사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한 편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이 잔인한 전쟁을 끝내지 않고 인류의 평화, 지구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걸프전 당시 첨단기술로 무장한 미국 폭격기는 오차범위 제로에 도전하는 정밀타격기술을 자랑하며 수 만발의 포탄을 이라크에 퍼부었고, CNN의 더럽고 추악한 화면은 죽은 자식을 부등켜안고 절규하는 부모와, 죽어가는 부모 곁에서 울고 있을 아이들의 모습을 깨끗이 제거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도덕이나 양심의 부담을 갖지 않고 위대한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될 장면을 감상할 수 있도록 친절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 당시 난 그 CNN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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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게임이 싫다. 정말 싫다. 싫은 정도가 아니고 증오한다.

이유는 아이들이 게임에 환장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게임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어렸을 적엔 뿅뿅오락실에 열심히 다녔던 적이 있다. ‘갤러그로 대표되는 오락실의 역사에 동참하여 오락실에 빠졌던 동생을 찾아다니다, 같이 빠져 부모님한테 혼나곤 했던 추억이 있다.

, 재수시절엔 저녁밥을 먹고 잠시 휴식 겸 들렀던 오락실에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결국 왕을 깨기 위한 처절한 싸움에 미쳐 10시까지 앉아 있곤 했다. 공부를 망치고 집에 가는 길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후회,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에 미칠 것 같았지만 다음날 또 나도 몰래 발길이 가지는 오락실은 김유신이 기생 천관에게 가는 말의 목을 베듯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의 의지를 비웃는 마의 소굴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락실은 분명 오늘의 게임 환경과 많이 다르다. 오락실은 공간적 한계가 분명했다. 아무리 미쳐도 집에는 와야 했고, 오락실에 앉아 있는 시간과 공부방에 앉아 있는 시간의 차이는 존재했기에 오락실로 가는 길만 막으면 되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스마트폰의 발명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어이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집이든 학교든 화장실이든 통하지 않는 데가 없으니 눈만 뜨고 있으면 24시간 내내 할 수 있다. 물론, 스마트폰만 없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카톡으로 소통하는 요새 아이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물건이니, 생사를 건 싸움을 하지 않고서는 스마트폰을 뺏기가 여의치 않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 자식에게 컴퓨터와 스마트폰 대신 책을 쥐어 줬다고 했다. 참 얄미운 사람이다. 그는 아이들을 게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며 이 땅의 부모들을 힘들게 한 대가로 어마어마한 갑부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식만큼은 그 폐해를 피하게 하려는 평범한 부모의 모습을 보였다.

 

게임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날마다 지근거리에서 보고 있는 아빠의 입장에서 게임에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밉다. 물론, 모든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게임과 스마트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던 중 발명된 것 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필요에 의해 생산된 것도 있지만 거꾸로 팔기 위해 필요를 만든 것도 많다. 스마트폰은 분명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컴퓨터의 보급과 전자산업의 발달이 만들어 낸 사생아일 뿐이다. 아무도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 세상에 생겨났고, 있으니 샀고 샀으니 쓸 뿐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에 세상이 맞출 뿐, 애초에 필요한 물건은 아닌 것이다.

 

게임도 휴식을 위한 오락의 하나로서 그 존재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것으로서는 아니다. 나는 공부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할 시간에 공부하란 소리가 아니다. 게임할 시간에 차라리 나가서 놀면 좋겠다. 컴컴한 골방에 갇혀 스마트폰의 현란한 화면을 쳐다보며 신들린 듯 손가락을 움직이는 아이들의 퀭하니 빛나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치솟는다. 게임과 무언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무조건 게임이란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게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 땅의 어른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아이들이 게임 속 가상공간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는데도 멍청히 쳐다만 보고 있다. 게임관련 산업이 중요한가? 아이들이 중요한가? 아이들의 게임을 법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가? 미성년자는 게임을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가?

안타까운 일이다. 한 개인이 거대한 게임의 세계와 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와 전국민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청소년 유해업소 단속이나 요새 아이들의 성지식에 한참 뒤떨어진 19금 영화 선정 같은 쓸데없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정작 게임 때문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허비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들의 미래엔 관심이 없다. 그러다 말거라나.....

너무 힘들다. 나 혼자 싸우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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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의 깊이가 다를 뿐 살다보면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번번이 취직은 실패하고 시간은 흘러가고 나를 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하게 보였던 그 시절, 컴컴한 터널 한가운데 나만 홀로 버려져 이쪽이 출구일까, 저쪽이 출구일까 방황하던 아득한 시간들. 계속되는 미래의 불안속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약에 의존해야 잠을 청할 수 있었던 내게 김창완의 <무지개>와 항우울제 <푸로작>, 그리고 이책은 절벽에 매달려 발버둥치던 나의 손을 잡아 준 친구들이었다.

 

여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 박사가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 갇혔다가 풀려나기까지 직접 겪었던 고통의 시간과 그 결과, 체득한 인간정신에 대한 고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람은 타고난 성격, 환경과 지적수준에 따라 차마 인간이라 칭하기 힘든 짐승 같은 수준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수정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까지 천차만별이다. 한 인간을 그 밑바탕까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극한의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생명을 위협받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드러나는 모습이야말로 온갖 허위로 가득 찬 껍데기를 오롯이 벗은 존재 자체의 모습일 것이다.

 

프랭클 박사는 말한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있다.>

 

고통스런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고통을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내 자유라고. 수용소의 죄수로서 이름이 삭제되고 오직 번호로만 존재하는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도 스스로 나를 고귀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존중한다면 운명의 장난에 휘말리더라도 인간정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론 무서운 말이다. 본능을 뒤흔드는 생존의 위기를 접했을 때 과연 당당히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극소수라고 하더라도 아니, 단 한명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기꺼이 다른 이에게 양보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나온다. 마음속으로 살고 싶다는 본능을 숭고한 이성으로 억누르고 차디찬 죽음의 길로 대신 뛰어 드는 사람들이야 말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몇 안 되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며 울부짖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구차한 생을 포기해버리는 쉬운 방법으로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오히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것이라면 문제는 의외로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박사는 힘주어 말한다. 고통에 견디며 자신을 지탱하는 것, 자아를 잃지 않는 것이 답이지 회피하기 위해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길이며 명백한 오답이라고.

   

프랭클 박사는 단순히 자기긍정의 심리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유지 본능을 뛰어 넘는 그 무엇, ‘자아성취말이다. 자아성취가 꼭 어떤 성과일 필요는 없다. 자아성취는 내가 그리는 인간상에 고난에 찬 의지와 스스로의 노력으로 도달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 노력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인간의 마지막 지점이다.

 

허약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다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난 영웅이 되고 싶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아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이 되고 싶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나만의 품위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보자.>

 

왜 살아야 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매순간 주어진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내 삶의 자유를 내가 직접 선택하며 미래에 대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는 당당한 삶을 사는 이. 내가 되고 싶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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