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노라면 문득 독서에도 단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격적으로 책이라는 것을 읽어 보자 라는 결심을 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첫 번째 단계-불규칙적이고 느슨한 독서
막 읽는다. 서점에서 그냥 재미있어 보이는 것, 그럴싸해 보이는 것, 요새 유행인 주제를 다룬 것, 서점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등등.
이 단계에선 아무 생각이 없다. 막연히 독서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읽다 보니 부담감이나 의무감도 없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니 기준도 없다. 그냥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몇 권 읽다가 싫증나면 안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면 다시 들춘다. 이 단계가 어느 정도 지속되다 보면 곧 슬럼프에 빠진다. 주먹구구식으로 읽다 보니 책에 대한 의욕이 수그러들기 쉽고 바쁜 일상사 때문에 잠시 책을 놓다 보면 다시 잡기 힘든 경우가 많다. 여기서 포기하면 책하고 다시 멀어진다. 그렇지만 운이 좋아 이 게으름을 이기고 나가다 보면 곧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든다.
두 번째 단계-미명에서 광명으로
첫 번째 단계를 무사히 넘어 독서가 하나의 생활패턴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책을 선별하는 안목도 나름 생기기에 교양도서목록, ○○대 100선 목록, 오늘의 추천도서나 베스트셀러 목록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양서를 보고자 마음을 먹기 시작하나, 아직 내공이 부족한 관계로 간혹 엉터리를 만나 실망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좋은 책을 만나 좋아하기도 한다. 방향만 잘 잡으면 생각보다 푹 빠진다. 독서를 밥보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화창한 봄날 꽃구경이나 가을 단풍 구경, 주말 야구경기 대신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서 좋은 글귀 한 줄 읽다가 인생의 의미를 한 번 곱씹는 것이 생각 보다 지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막연히 느끼기 시작 한다.
세 번째 단계-또 다른 세상
선별독서다. 이젠 아무거나 읽진 않는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산처럼 쌓여 있는 책들을 보노라면 아무렇게나 읽어선 답이 나오질 않는 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시간과 금전은 유한하고 읽어야 될 책(읽고 싶은 책과 애매하다)을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독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세워야 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제 별로 읽기 시작한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만을 골라 읽는다든지, 특정 작가의 책만을 읽는다든지 한다. 상식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의 독서로의 초입(初入)단계다. 닥치는 대로 읽는 것에 비해 속도는 많이 줄어든다.
네 번째 단계-진리의 길은 가시밭길
어느덧 중급 수준에 접어들었다. 어느 정도 독서량이 쌓이다 보니 가끔 오만한 생각을 한다. 소위 글줄께나 읽었다는 식자(識者)층으로 본인을 여기고 우쭐한 마음에 자신의 지적 소양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단순히 지적 수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위험한 경우다. 그러다 일격을 당한다. 나보다 훨씬 상위의 고수를 접할 기회가 생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행운을 잡은 것이다. 다시 한 번 힘찬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니까.
그러나 세상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 눈은 높아져 어지간한 책은 잘 보지 않는다. 두껍고 어려운 책을 선택한다. 단순한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선택한 책은 내 수준에 너무 어렵다. 한글이 다 똑 같은 한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좌절과 함께 겸손을 배운다. 주로 고전(古典)에 터진다. 다소 쉬운 책도 있지만 한 페이지 내내 무슨 말인지 모르고 글자를 그림으로 보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이나 위편삼절(韋編三絶),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看書痴) 같은 독서광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귀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나도 이해가 될 때까지 읽어 보자.” 이를 악물고 눈을 까뒤집고 읽어 보지만 독서 자체가 재미가 아닌 고행이 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글을 계속 읽어 보라. 세상에 그런 고문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음독을 해보기도 하고, 한 페이지만 수십 번 읽어 보기도 한다. 하루에 한 권씩 읽어 제치던 호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수십 권을 읽을 시간에 단 한권에 잡혀 있을 때의 초조감이라니.....
다섯 번째 단계-다시 처음으로
모든 걸 내려놓는다. 독서에 재미가 빠지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내 수준에 맞게 다시 읽는다. 독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책을 통한 지식 못지않게 독서의 의미나 방법 등에 관심을 갖는다. 독서 자체로 하나의 공부가 될 수 있다. 혼자만의 독서도 좋지만 친구나 동지가 있으면 더욱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로 교류하고 토론하고 공유하며 격려와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독서 방법에 연연하기 보단 한 줄의 글이 갖는 무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함을 안다.
많이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건 아는 만큼 행동해야 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무겁게 생각한다. 결국, 배운 만큼 실천해야 되며 독서는 그에 따른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또 읽고, 살며 시간의 마법을 배운다. 굴곡 없는 꾸준한 독서가 결국 최선임을 알게 되고 시간과 비례하여 쌓이는 내공을 어느 순간 느끼지만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 길은 끝이 없으며 언젠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순간에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최종 목적지라는 걸 그냥 담담히 받아들인다..............
※ 그냥 내 맘대로 어쭙잖게 늘어놓았다. 얼마나 읽었다고 단계니 수준이니 하는 게 멋쩍지만 그래도 쓰다 보니 독서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정리되는 것 같아 기분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