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없던 세상 - 당신이 만날 미래의 業
이민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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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은 눈이 휙 휙 돌아가도록 급변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따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버텨야 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요동치고 있다. 인터넷시대에 겨우 적응하자마자 스마트폰시대는 도래하고 말았다.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난 장난감 취급했다. 아이들이나 갖고 놀 물건으로 생각했다. 다 큰 어른들이 그 조그만 물건을 쥐락펴락하며 시선을 쳐 박고 있는 모습이 보편화된 일상이 될 줄 몰랐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카톡으로 이야기하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뉴스를 보고, 게임과 금융거래를 하며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소통하는 실시간 정보 공유의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인류가 천지창조 후 문명이란 것을 세운 이래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이 물건이 단순히 편리한 기계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 것이 갖고 있는 변화의 힘 때문이다. 휴대폰에 인터넷을 단 단순한 기계로만 알았던 스마트폰은 거대한 흐름이 되어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꿔 버린 것이다.

 

2007년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아이폰’이외에도 진보든 퇴보든, 일부가 아닌 전 지구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신기술이 2가지 더 있으니,

바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과 헨리 포드의 포디즘이다.

 

제임스와트의 증기기관은 모든 도구의 동력화를 야기하며 현대산업사회의 포문을 열었다. 헨리포드는 테일러의 표준화, 분업화와 컨베이어 시스템을 묶은‘포디즘’이라는 생산방식을 만들어 공장 대량생산의 선구자가 되었다.

 

불과 100여년 전인 19C 말까지 인간은 지금과 같은 개념의‘직업과 직장’이 없었다. 자신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을 할 뿐이었다. 그것도 소수의 상인, 장인을 빼고 나면 대부분 농민이었다. 자영농이냐 소작농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러나, 20C가 되고 헨리포드가 포디즘으로 무장한 공장을 세우면서 최초로 대규모 고용이 발생했고 자동차에 연관된 철강, 석유, 금융 산업이 동반 성장하면서 현재와 같은‘고용사회’가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월급쟁이 생활이 사실은 불과 100여년의 역사 밖에 안 되는 것이니,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찰나의 순간인 것이다.

 

미국은 20세기 내내 고용사회의 안정된 풍요로움을 누렸다. 독과점의 대기업은 국가의 조력을 받으며 성장했고, 노동자는‘정년퇴직’을 보장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다. 회사와 노동자의 꿈같은 생활은 21C 말부터 삐걱대기 시작했으니, 새로운 사회의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시대의 막을 내린 것은 다음 3가지다.

 

첫 번째, 신기술의 발명

두 번째, 개도국의 약진

세 번째, 월마트 같은 대형할인유통회사의 출현

 

자동화나 무인화의 동의어인 신기술은 당연히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게 만들었고, 한국, 일본과 같은 신생 개도국의 값싼 물건은 당연히 원가절감의 요인이 되었으며, 대형할인유통회사의 제조업 장악은 마찬가지로 원가절감의 유혹을 일으켰다.

결국, 회사는 오랜 동지적 관계를 깨고 경영합리화란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수많은 노동자는 거리로 내몰렸다.

 

우리나라 역시 똑 같은 전철을 밟았으니, 기간만 짧을 뿐이다. 해방이후 박정희에 의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신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똑 같은 이유로 똑 같은 결과가 이어졌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처럼 고용불안에 시달린 이유가 단지 IMF외환위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인 것이다. 이미 그전부터 우리 역시 그러한 길을 갈 준비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고용사회의 종말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 지점에서 멈추고 만다. 전반부의 세계 분석이 신선했기에 나름 후반부의 대책에 잔뜩 기대를 했는데 특별한 것이 없어 실망했다.

 

스티브 잡스 같은 CEO들의 특별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온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출중한 인물들은 고용사회가 유지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어떻게 타야 되는 가다. 사실 나는 그다지 상관없다. 어차피 고용사회의 단물을 빨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문제는 내 자식들의 생계다.

 

용두사미로 끝나 버린 책을 덮고 미래의 사회를 떠올려 보지만 저자의 말처럼 너무 오랫동안 고용사회의 그늘에서 안온한 삶을 살아온지라 뼛속 깊이 새겨진 샐러리맨의 껍질을 벗을 길이 없다. 공부하고 직장에 들어가 결혼하고 퇴직금이나 연금 계산하고.......

 

이런 저런 미래 예측서들을 보노라면 분명 내가 죽기 전에 산업자본주의의 종말을 보게 될 것 같은데 우리 애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 된다. 취직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를 훨씬 뛰어 넘는 중요한 기류가 우리 주위를 세차게 흐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

 

새롭고도 두려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에는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역사가 말하듯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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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0-22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디스토피아는 안 되길 막연하게 기도합니다.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10-22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릴적부터 가끔식 들었던 말이 생각나네요. ˝좋은 시절 다 갔다.˝ 그래도 살다 보면 또 좋은 시절이 오곤했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랄뿐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 - 개정판 사이언스 클래식 20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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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놈의 과학자가 철학자처럼 어렵게 쓰냐. 인간의 본성을 생물학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그의 뜻은 알겠지만 너무 재미가 없어 못읽겠다. 과학자는 과학자답게 써야 한다. 인문학은 인문학자에게 넘기고. 에이 재미없어. 윌슨박사님 땡! 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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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 2020-01-2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 너무 귀여워요 흐 ㅠㅠㅠ

BeachBoys 2020-02-0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보다 조금 어렵게 쓰긴하죠 ㅎㅎ

fapril 2020-12-05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평 좋아요.불쾌하거나 무례하지않은.....

임수진 2020-12-15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빵터졌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뭐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세이건 & 호킹 : 우주의 대변인 지식인마을 8
강태길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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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나의 태생에 관한 의문.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알고 싶었다. 거창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에 대한 내 의문은 어느 정도 풀렸다. 우주는 소위 ‘빅뱅’이란 대폭발로 생겼고, 인간은 원시 유기물에서 진화를 거듭한 끝에 현재의 고등생물이 되었다는 ‘진화론’이다.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 전부다. 살면서 그 외에 내가 추가로 알게 된 것은 거의 없다. 생명의 기원은 ‘다윈’에게 물어 보기 시작했으나 우주의 기원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 책을 들었다. 과학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학창 시절 과학 과목에 대한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곤 했는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과학교양서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어려운 과학이론을 쉽게 설명하다 보면 깊이에 대한 한계를 가지기 쉽다. 이 책 또한 그렇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전부다. 우주에 대한 보다 심오한 지식을 기대 했기에 다소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 책에서 내가 얻은 건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저자는 이 책에 많은 것을 담으려고 욕심을 부리진 않는다. 우주에 대한 지식 자체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갈래로 나누어진 현대 과학이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저자는 칼 세이건 박사와 스티븐 호킹 박사를 연구 업적과 별개로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 선 사람들로 높은 평가를 내린다. 근대 과학혁명이 시작 되면서 과학기술은 세분화, 전문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다른 말로 과학이 전문가들만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업으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기에 ‘그들만의 리그’가 돼버린 과학은 ‘그들’ 외의 사람들을 소외시켰고, 일반 대중과 유리된 과학의 발전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지금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중국의 공자, 맹자 같은 현인들이라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가 목숨을 걸고 알고자 했던 지식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뉴턴의 고전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보어의 양자역학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알람에 눈을 뜨면 전기밥솥이 한 밥에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과 재료로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요리 해 먹고,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며 컴퓨터와 전화기로 일을 하고 퇴근 후 TV를 본 후 잠을 잔다. 아프면 병원에 가 X-Ray, CT, MRI를 찍고, 여행을 갈 땐 비행기, 기차를 탄다.

 

그러나 전기밥솥, 냉장고, TV, 자동차, 컴퓨터의 원리와 내부구조를 알고 있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 단지 작동 방법만 알 뿐이다. 이는 중요하지만 흔히 간과하는 문제다.

“원리를 몰라도 운용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예측된 결과를 얻기만 하면 된다.”

결과를 얻기 위해 제작 이유, 원리, 구조를 몰라도 상관없다는 우리들의 생각은 오늘날 과학의 맹신 또는 불신을 일으켰고, 각종 사이비과학과 유사과학이 판을 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중이 과학을 알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당연히 과학자들이 쥐고 있다. 과학을 알기 위해 수학, 물리학 같은 학문을 공부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들이 손을 내밀어 줘야 한다. 과학자는 어려운 이론을 쉽게 풀어 쓴 대중과학서를 낼 의무가 있고 우리 또한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이 빠진 첨단과학은 그야말로 인류를 멸망으로 빠트릴 흉기가 될 수 있다. 과학엔 눈이 없다. 양심도 없다. 과학이 제 멋대로 발전하는 것을 제어할 사람은 과학자겠지만, 과학자 역시 과학에 소외된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과거의 역사에서 발견한다.

 

건설기술로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결국 폭탄으로 전용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폭사시켰다.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야 할 원자력의 가장 큰 업적은 핵무기로의 변신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첨단기술이 전쟁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연구되고 있다. 그 중심엔 뛰어난 과학자 집단이 있으며 그 뒤엔 국가가 있고, 국가를 자본주의가 조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철학이 부재한 과학에 따스한 인간의 숨결을 넣고자 애를 쓰는 소수의 과학지성들의 노력에 박수를 치며 기꺼이 동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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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 보어 : 확률의 과학 양자역학 지식인마을 5
이현경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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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이과생이 아닌 경우 재미가 없을 것 같음. 이해 불가로 읽다가 접었음. 아무리 쉽게 써도 기본이 안되면 이해에 한계가 있음. 학교 다닐 때는 보기도 싫던 과학이 가방끈 놓은 지 엄청난 세월이 지난 이제서야 왜 관심이 가는지......그렇다고 다시 교과서를 공부할 수도 없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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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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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굴드의 목적

굴드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진화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풀기 위해서다. 그는 당초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진화의 개념이 선의의 오해와 악의의 왜곡으로 잘못 받아들여지거나 변질되어 생물학적 범위뿐 만 아니라 사회학적 이론으로 차용되고 인용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보기에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2. ‘종의 기원에는 진화가 없다.

진화는 원래 사회진화론자로 불리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사용한 용어다. 당초 다윈은 종의 기원초판에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스펜서가 쓴 용어가 대중적으로 많이 통용되었기에 나중에 마지못해 따랐을 뿐이다.

 

스펜서는 진화외에도 적자생존까지 차용하며 생물학 이론 자체보다는 그 이론을 사회개혁에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고 개체들의 생존 경쟁을 통해 생명이 진화하듯이 개인의 경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의 이론은 20세기 초반에 우생학으로 응용되어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지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라마르크를 비롯한 19세기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진보를 진화의 핵심으로 보았고, 생물학적인 변화를 진보와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진화(evolution)가 다윈이 말한 <변이를 동반한 상속(혈통), descent with modification)이란 말을 대신하게 된다.

 

3.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인 풀하우스(Full House)의 의미는 포커게임의 제일 좋은 패를 말한다,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설에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명체들이 내놓는 최선의 선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우리를 소중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시스템, 즉 자연 생태계를 말하기도 한다.

 

굴드는 우리가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분리시켜 우월감을 느끼는 전통적인 관념을 버리고 인간을 생명의 거대한 역사 속에 나타난 우연한 존재로서 다른 생물들과 하나로 보는 더 흥미로운 관점을 택해야 함을 제안하고 있다.

 

굴드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추락시킨 4가지 혁명을 말한다.

첫 번째 혁명으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이 지동설을 주장하며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추방했고,

두 번째 혁명으로 다윈은 인간을 <동물의 후손>으로 격하시켰으며,

세 번째 혁명으로 프로이트는 인간만이 가진 <이성>으로 겨우 위안을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의식>이라는 본능을 선물하였으며,

네 번째 혁명으로 45억년의 지구 역사를 알아냄으로서 지구의 나이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성경의 천지창조설을 단숨에 날려 버린 것이다.

 

지구의 나이를 1로 봤을 때 2.5, 1년으로 본다면 1~2분에 불과한 인류의 짧은 나이가 이 세계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실망이었겠는가?

인류가 이룬 영광과 성취가 아무리 눈부시더라도 인류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적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의 씨앗이 다시 뿌려져 생명의 나무가 비슷한 조건에서 자라난다면 다시는 일어자니 않을 사건임을 의미하는 진화론의 발견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며 누렸던 최고의 자부심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인간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만든 혁명이었으며, 인류가 이룩한 어떠한 지식과 학문보다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친 이 이론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친 건 아니다. 소수의 현명한 과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했고 그중 천지창조의 후손들은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이 불경스러운 이론을 가만히 앉아서 인정할 수 없었기에 절치부심 일대 반격을 개시한다.

 

그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선택은 진화론을 무시하고 성서 그대로 계속 믿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종교라는 초월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다윈과 그 추종자들이 내놓는 다양한 과학적 증거들에 의해 쉽게 논박되곤 한다. 애초에 과학과 종교는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어리석은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 했던 창조과학(創造科學)이란 유사 과학의 성행도 한 예라 하겠다. 일부 개신교도와 과학자들이문자 그대로의 성경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지구의 역사를 불과 6~7천년으로 축소하고, 노아의 홍수를 중요한 진화의 변환점으로 주장하며, 교과서에 창조론을 싣고자 했던 노력들은 사이비과학을 검증할 능력이 없는 호사가들에게 늘 흥미를 안겨주는 소재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진화론이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가 확실한 국가 통치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소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쉽게 공격당할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깊숙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들 반()진화론자들의 목표는 이론적으로 공격하기 힘든 현명한 과학자 집단이 아니고 일반 대중이다. 진화론을 공격하는 이론의 타당성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힘든 일반인의 무지와 정서를 기반으로 왜곡과 선동을 일삼는 저 신권주의자들의 거짓된 과학은 단순히 과학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 지구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주도권 싸움이자 헤게모니 쟁탈전인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허약한 첫 번째 전략 대신 보다 현실적이고 교묘하며 사회체제 속으로 쉽게 침투하는데 효과적인 변질된 다윈주의라는 신무기를 내세운다.

 

이것은 진화에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 진행되는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진보)이 있으며, 그 힘이 생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의 결과(인간)를 낳았다는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 , 생명의 역사를 진보(進步)로 정의하려는 것이다.

 

인류가 지구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존재라는 지질학의 놀랍고 끔찍한 발견을 가능한 한 듣기 좋게 왜곡하는 방법은 진화의 방향을 인간을 향해 예정된 진보라고 해명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는 짧은 역사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의 몇 십억 년이 인류 정신의 진화라는 절정에 이르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이었음을 보여준다면 결국 인류의 기원은 이 세상의 시작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었다. 심지어 역사는 진보다.” 라는 슬로건과 일맥상통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일차적인 생물학으로서 진화론을 넘어서는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가치부여는 단선적인 시간의 역사를 따라 열등에서 우등으로, 미개에서 발전으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진격하는 오만한 인간의 행보를 옹호하고 합리화시켜주는 중요한 기제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137억년의 우주역사 중 46억년의 지구역사의 마지막 1초에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점령하고 말아 먹은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면책권을 부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우등한 생물이 열등한 생물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도태시켜버린다는 진화론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늘 접하고 친숙한 강자의 논리가 아닌가? 자본주의 경쟁의 논리이기도 하고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법칙이기도 하고 말이다.

 

생물학계나 사회에서 다윈의 이론을 곡해하기까지 어느 정도 다윈에게도 원인이 있다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은 식민지 개척을 위한 세계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었으니 다윈이나 스펜서의 제국주의 옹호 이론은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어 주었다. 귀족으로 안락한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다윈은 자신의 진보적 사상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충돌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기에 혁명적 지식인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실제로 혁명을 주도할 수는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4. 다윈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가치를 전복하기 위해 굴드는 자연의 본성은 결코 경쟁이 아니며 다양성과 선택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결코 일정한 패턴과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불규칙적이고 무작위적이다. 시스템 전체 또는 변이들로 가득 찬 <풀하우스>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현실이며 평균이나 최대값들(평균은 추상적이며 최대값은 대표적일 수 없다)은 전체의 움직임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를 일으키거나 편파적인 견해를 제공한다.

 

더 고등한 생물도 없고 더 열등한 생물도 없으며 차이와 다양이 생태계의 본질이라는 것이니, 키 큰 사람이 우수하고 작은 사람은 열등한 것이 아니고 다만 키가 크거나 작다는 변이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요새 유행하는 장애는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르다. 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다양한 것이다와 동의어인 것이다. 생존경쟁에 뒤져 도태될 수밖에 없는 장애를 열등한 것이 아니고 단지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과 신체적으로 다른 차이와 다양성으로 본다는 것은 다윈 정신의 진정한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인간과 같은 복잡한 생물의 진화를 단지 우연한 일로 결론내리기엔 왠지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의식’ ‘이성을 생물학적 진화의 부차적인 산물일 뿐이라는 굴드의 주장이 사실 여부를 떠나서 허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의 읽고 쓰는 능력은 진화의 과정 중 뇌 구조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발생한 팁이라는 것을 반박하기가 힘든 것을.

 

문명의 발달이 꼭 자연 선택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진화의 과정 중 우연한 선물로 얻게 된 대용량의 뇌로 인해 인간은 우월한 문명을 이룩했으나, 지구 생태계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지구 역사의 대부분인 30억년 이상 존재해온 박테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산소가 없어도, 지하 수십 미터 속에서도, 펄펄 끊는 물에서도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너끈히 생존할 수 있는 그네들의 생명유지장치에 비하면 진화의 정점에 달했다고 자랑해마지 않는 인간의 몸이란 것이 얼마나 취약한가?

 

핵전쟁이 벌어지면 영장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포유류는 멸종된다고 한다. 그러나 박테리아나 우리가 하등동물로 비웃는 미개한 생물들은 생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진화한 것일까? 단순히 숙주에 기생해서 살기 위해 복잡한 모든 신체기관들을 심플하게 퇴화시켜버린 기생충인가? 몇 종류의 세균에 의해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인간인가?

 

진정한 지구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가 진보했다고, 모든 생물의 꼭대기에 서있다고 과연 우쭐댈 상황인가?

수백만 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불과 수백 종에 불과한 포유류의 지존자리를 서슴없이 꿰차고 앉아 있은 오만한 인류만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구의 온도가 몇 도만 변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취약한 구조의 인간이라면 결국 멸종할 수밖에 없다. 수십억년동안 성공적으로 살아온 박테리아는 앞으로도 지구 자체가 남아 있는 한 번식에 성공할 것이다.

 

웃기자 말자.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결코 아니다. 장구한 지구의 역사에 거의 찰나라고 할 만큼의 짧은 시간동안 잠시 거쳐 갔다 곧 흔적 없이 사라질 별 볼일 없는 생물 중 한 종에 불과한 것이다. 진보니 적자생존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준이 아닌 것이다.

인간들이여 겸손할 지어다.

 

다윈 혁명은 인류의 오만함이 뿌리째 뽑혀 생명이란 예측 불가능하고 방향이 없다는 진화론의 명백한 의미가 이해될 때, 그리고 다윈적 지질학 연구를 진지하게 고려하여 호모 사피엔스는 거대하고 풍성한 생명의 나무에 엊그제 돋아난 작은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나무가 다시 씨앗으로 뿌려진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숙지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인류는 아직 다윈 혁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의 지푸라기를 놓지 않는 것이다. 진화론의 세계에서 인류의 오만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진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굴드가 던진 의미심장한 다음 말을 되뇌어 보자.

말과 함께 전통적으로 진보의 사다리로 묘사되고 있는 종이 있다. 그 종 역시 과거엔 지금보다 풍성했던 계통수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종이 무엇인가 알고 싶으면 거울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그리고 현재의 일시적 지배력을 행여나 인류의 근본적인 우월성 또는 미래의 영원한 생존 가능성과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충고하고 싶다.”

 

후기 : 워낙 자연과학하고는 담을 쌓아온 관계라 굴드같이 뛰어난 학자가 아주 친절하게 안내한 대중과학서라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감히 진위를 논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기에 어설픈 반박 또한 불가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통 글이 논리적으로 써지지 않는다. 써야할 말을 많은데 이해의 부족으로 빠져 아쉽다. 어렵게 읽은 노력에 비해 이해한 것이 미진하지만 그래도 딴은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두고두고 곱씹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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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진화는 진보가 아니죠. 다윈주의로 되돌아가라는 back to basic에 공감합니다. 근데 왜 사람들은 진화론에 많은 흥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요즘 진화론 책 읽다보니...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08-1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을 진화의 최상층에 놓고 싶은 거겠지요. 원시미생물에서 가장 고도화된 복잡성을 지닌 고등생물로의 진화가 주는 드라마틱한 과정이 단순히 경이롭기도 하고 과학적으로 논리 전개도 쉽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