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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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굴드의 목적

굴드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진화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풀기 위해서다. 그는 당초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진화의 개념이 선의의 오해와 악의의 왜곡으로 잘못 받아들여지거나 변질되어 생물학적 범위뿐 만 아니라 사회학적 이론으로 차용되고 인용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보기에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2. ‘종의 기원에는 진화가 없다.

진화는 원래 사회진화론자로 불리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사용한 용어다. 당초 다윈은 종의 기원초판에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스펜서가 쓴 용어가 대중적으로 많이 통용되었기에 나중에 마지못해 따랐을 뿐이다.

 

스펜서는 진화외에도 적자생존까지 차용하며 생물학 이론 자체보다는 그 이론을 사회개혁에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고 개체들의 생존 경쟁을 통해 생명이 진화하듯이 개인의 경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의 이론은 20세기 초반에 우생학으로 응용되어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지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라마르크를 비롯한 19세기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진보를 진화의 핵심으로 보았고, 생물학적인 변화를 진보와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진화(evolution)가 다윈이 말한 <변이를 동반한 상속(혈통), descent with modification)이란 말을 대신하게 된다.

 

3.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인 풀하우스(Full House)의 의미는 포커게임의 제일 좋은 패를 말한다,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설에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명체들이 내놓는 최선의 선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우리를 소중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시스템, 즉 자연 생태계를 말하기도 한다.

 

굴드는 우리가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분리시켜 우월감을 느끼는 전통적인 관념을 버리고 인간을 생명의 거대한 역사 속에 나타난 우연한 존재로서 다른 생물들과 하나로 보는 더 흥미로운 관점을 택해야 함을 제안하고 있다.

 

굴드는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추락시킨 4가지 혁명을 말한다.

첫 번째 혁명으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이 지동설을 주장하며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추방했고,

두 번째 혁명으로 다윈은 인간을 <동물의 후손>으로 격하시켰으며,

세 번째 혁명으로 프로이트는 인간만이 가진 <이성>으로 겨우 위안을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의식>이라는 본능을 선물하였으며,

네 번째 혁명으로 45억년의 지구 역사를 알아냄으로서 지구의 나이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성경의 천지창조설을 단숨에 날려 버린 것이다.

 

지구의 나이를 1로 봤을 때 2.5, 1년으로 본다면 1~2분에 불과한 인류의 짧은 나이가 이 세계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실망이었겠는가?

인류가 이룬 영광과 성취가 아무리 눈부시더라도 인류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적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의 씨앗이 다시 뿌려져 생명의 나무가 비슷한 조건에서 자라난다면 다시는 일어자니 않을 사건임을 의미하는 진화론의 발견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며 누렸던 최고의 자부심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인간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만든 혁명이었으며, 인류가 이룩한 어떠한 지식과 학문보다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친 이 이론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친 건 아니다. 소수의 현명한 과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했고 그중 천지창조의 후손들은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이 불경스러운 이론을 가만히 앉아서 인정할 수 없었기에 절치부심 일대 반격을 개시한다.

 

그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선택은 진화론을 무시하고 성서 그대로 계속 믿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종교라는 초월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다윈과 그 추종자들이 내놓는 다양한 과학적 증거들에 의해 쉽게 논박되곤 한다. 애초에 과학과 종교는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어리석은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 했던 창조과학(創造科學)이란 유사 과학의 성행도 한 예라 하겠다. 일부 개신교도와 과학자들이문자 그대로의 성경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지구의 역사를 불과 6~7천년으로 축소하고, 노아의 홍수를 중요한 진화의 변환점으로 주장하며, 교과서에 창조론을 싣고자 했던 노력들은 사이비과학을 검증할 능력이 없는 호사가들에게 늘 흥미를 안겨주는 소재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진화론이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가 확실한 국가 통치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소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쉽게 공격당할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깊숙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들 반()진화론자들의 목표는 이론적으로 공격하기 힘든 현명한 과학자 집단이 아니고 일반 대중이다. 진화론을 공격하는 이론의 타당성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힘든 일반인의 무지와 정서를 기반으로 왜곡과 선동을 일삼는 저 신권주의자들의 거짓된 과학은 단순히 과학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 지구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주도권 싸움이자 헤게모니 쟁탈전인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허약한 첫 번째 전략 대신 보다 현실적이고 교묘하며 사회체제 속으로 쉽게 침투하는데 효과적인 변질된 다윈주의라는 신무기를 내세운다.

 

이것은 진화에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 진행되는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진보)이 있으며, 그 힘이 생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의 결과(인간)를 낳았다는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 , 생명의 역사를 진보(進步)로 정의하려는 것이다.

 

인류가 지구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존재라는 지질학의 놀랍고 끔찍한 발견을 가능한 한 듣기 좋게 왜곡하는 방법은 진화의 방향을 인간을 향해 예정된 진보라고 해명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는 짧은 역사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의 몇 십억 년이 인류 정신의 진화라는 절정에 이르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이었음을 보여준다면 결국 인류의 기원은 이 세상의 시작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었다. 심지어 역사는 진보다.” 라는 슬로건과 일맥상통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일차적인 생물학으로서 진화론을 넘어서는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가치부여는 단선적인 시간의 역사를 따라 열등에서 우등으로, 미개에서 발전으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진격하는 오만한 인간의 행보를 옹호하고 합리화시켜주는 중요한 기제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137억년의 우주역사 중 46억년의 지구역사의 마지막 1초에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점령하고 말아 먹은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면책권을 부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우등한 생물이 열등한 생물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도태시켜버린다는 진화론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늘 접하고 친숙한 강자의 논리가 아닌가? 자본주의 경쟁의 논리이기도 하고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법칙이기도 하고 말이다.

 

생물학계나 사회에서 다윈의 이론을 곡해하기까지 어느 정도 다윈에게도 원인이 있다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은 식민지 개척을 위한 세계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었으니 다윈이나 스펜서의 제국주의 옹호 이론은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어 주었다. 귀족으로 안락한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다윈은 자신의 진보적 사상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충돌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기에 혁명적 지식인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실제로 혁명을 주도할 수는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4. 다윈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가치를 전복하기 위해 굴드는 자연의 본성은 결코 경쟁이 아니며 다양성과 선택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결코 일정한 패턴과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불규칙적이고 무작위적이다. 시스템 전체 또는 변이들로 가득 찬 <풀하우스>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현실이며 평균이나 최대값들(평균은 추상적이며 최대값은 대표적일 수 없다)은 전체의 움직임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를 일으키거나 편파적인 견해를 제공한다.

 

더 고등한 생물도 없고 더 열등한 생물도 없으며 차이와 다양이 생태계의 본질이라는 것이니, 키 큰 사람이 우수하고 작은 사람은 열등한 것이 아니고 다만 키가 크거나 작다는 변이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요새 유행하는 장애는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르다. 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다양한 것이다와 동의어인 것이다. 생존경쟁에 뒤져 도태될 수밖에 없는 장애를 열등한 것이 아니고 단지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과 신체적으로 다른 차이와 다양성으로 본다는 것은 다윈 정신의 진정한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인간과 같은 복잡한 생물의 진화를 단지 우연한 일로 결론내리기엔 왠지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의식’ ‘이성을 생물학적 진화의 부차적인 산물일 뿐이라는 굴드의 주장이 사실 여부를 떠나서 허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의 읽고 쓰는 능력은 진화의 과정 중 뇌 구조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발생한 팁이라는 것을 반박하기가 힘든 것을.

 

문명의 발달이 꼭 자연 선택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진화의 과정 중 우연한 선물로 얻게 된 대용량의 뇌로 인해 인간은 우월한 문명을 이룩했으나, 지구 생태계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지구 역사의 대부분인 30억년 이상 존재해온 박테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산소가 없어도, 지하 수십 미터 속에서도, 펄펄 끊는 물에서도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너끈히 생존할 수 있는 그네들의 생명유지장치에 비하면 진화의 정점에 달했다고 자랑해마지 않는 인간의 몸이란 것이 얼마나 취약한가?

 

핵전쟁이 벌어지면 영장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포유류는 멸종된다고 한다. 그러나 박테리아나 우리가 하등동물로 비웃는 미개한 생물들은 생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진화한 것일까? 단순히 숙주에 기생해서 살기 위해 복잡한 모든 신체기관들을 심플하게 퇴화시켜버린 기생충인가? 몇 종류의 세균에 의해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인간인가?

 

진정한 지구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가 진보했다고, 모든 생물의 꼭대기에 서있다고 과연 우쭐댈 상황인가?

수백만 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불과 수백 종에 불과한 포유류의 지존자리를 서슴없이 꿰차고 앉아 있은 오만한 인류만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구의 온도가 몇 도만 변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취약한 구조의 인간이라면 결국 멸종할 수밖에 없다. 수십억년동안 성공적으로 살아온 박테리아는 앞으로도 지구 자체가 남아 있는 한 번식에 성공할 것이다.

 

웃기자 말자.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결코 아니다. 장구한 지구의 역사에 거의 찰나라고 할 만큼의 짧은 시간동안 잠시 거쳐 갔다 곧 흔적 없이 사라질 별 볼일 없는 생물 중 한 종에 불과한 것이다. 진보니 적자생존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준이 아닌 것이다.

인간들이여 겸손할 지어다.

 

다윈 혁명은 인류의 오만함이 뿌리째 뽑혀 생명이란 예측 불가능하고 방향이 없다는 진화론의 명백한 의미가 이해될 때, 그리고 다윈적 지질학 연구를 진지하게 고려하여 호모 사피엔스는 거대하고 풍성한 생명의 나무에 엊그제 돋아난 작은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나무가 다시 씨앗으로 뿌려진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숙지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인류는 아직 다윈 혁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의 지푸라기를 놓지 않는 것이다. 진화론의 세계에서 인류의 오만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진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굴드가 던진 의미심장한 다음 말을 되뇌어 보자.

말과 함께 전통적으로 진보의 사다리로 묘사되고 있는 종이 있다. 그 종 역시 과거엔 지금보다 풍성했던 계통수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종이 무엇인가 알고 싶으면 거울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그리고 현재의 일시적 지배력을 행여나 인류의 근본적인 우월성 또는 미래의 영원한 생존 가능성과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충고하고 싶다.”

 

후기 : 워낙 자연과학하고는 담을 쌓아온 관계라 굴드같이 뛰어난 학자가 아주 친절하게 안내한 대중과학서라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감히 진위를 논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기에 어설픈 반박 또한 불가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통 글이 논리적으로 써지지 않는다. 써야할 말을 많은데 이해의 부족으로 빠져 아쉽다. 어렵게 읽은 노력에 비해 이해한 것이 미진하지만 그래도 딴은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두고두고 곱씹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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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1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진화는 진보가 아니죠. 다윈주의로 되돌아가라는 back to basic에 공감합니다. 근데 왜 사람들은 진화론에 많은 흥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요즘 진화론 책 읽다보니...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08-1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을 진화의 최상층에 놓고 싶은 거겠지요. 원시미생물에서 가장 고도화된 복잡성을 지닌 고등생물로의 진화가 주는 드라마틱한 과정이 단순히 경이롭기도 하고 과학적으로 논리 전개도 쉽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