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달리 말수도 웃음도 없는 모습에 반했지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앵무새처럼 안 돼,만 반복해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점점 인내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 눈을보라고,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고개를 들라고 말할 때마다 일초가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처박는 모습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어갔다. - P287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앙토냉 아르토다 이 말을 즉각 할 수 있기에 나는 그리 말하나니당신들은 현재의 내 몸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만개의 분명한 양상들로 모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당신들이 결코 나를 잊을 수 없게 할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 P326

나는 감상에 빠지는 대신 눈앞의 그를 바라보며, 엄마도, 나도, 서로에 대해 정말로 모르는 채 사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도 엄마도 때로는 상처가 될만큼 진부한 말을 내뱉고 때로는 미칠 듯이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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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는 묘지의 서쪽 끝에 은거라도 하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열일곱 살 무렵 로트레아몽과 함께 열렬히 사랑했던 보들레르. 작은 섬마을의 하나밖에 없는서점에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사 들고 집으로돌아오던 저녁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P212

『외로운 남자』는 이오네스코가 쓴 단 하나의 장편소설이다. 예기치 못한 유산을 물려받고 인생 경주에서완전히 물러나기로 작정한 남자. 그가 속한 모든 사회와의 관계를 끊은 뒤 자발적인 유폐 상태에 자신을 가둔 남자. 존재의 인식과 불안을 낱낱이 따져보는 남자. - P215

한쪽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올려놓고서 ‘오늘이 그날인가‘ ‘오늘이 바로 그 마지막 순간인가‘라고 물으며 순간순간을 생의 마지막처럼 깨어있는 연습을 했던 수행자처럼 묘지라는 장소는 생에 대한 깊은 명상 속에 들게 했다. - P217

순간 속에서 순간을 향해 - P220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의 조건이아니다. 나무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다. 구름은 어제보다 조금 더 죽는다.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 더 짙어진다.
하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멀어진다. - P222

도착하는 순간에야 알 수 있는 것을,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매일의 책상 위에서. 삶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흐릿한 믿음에 의지한 채로, 모든 순간을 다시 의심하고 부정하면서. 알고 있던 이름을, 얼굴을, 표정을,
색깔을, 소리를, 거리를, 공간을 잊고.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과 심장으로. 순간속에서 순간을 향해.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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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게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지나간 희미한정과 기억을 분석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의 나에게 귀기울이는 건 현명하고 건강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 앞에서 혜인은 번번이 지워지기 일쑤였고, 그래서 그녀를떠올리면 가장 먼저 엄습하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 P18

그때의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모른 척 같은 걸 할줄 모르는 애였다. 나는 그애가 혜인임을 알고 야, 너도 훌천하냐고! 아이디가뭐냐고!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 P23

"야...... 니 진짜 돼지네."
그래 이거였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혜인의 새침함은 시간이 흐르며 타박이 되었다는 걸, 우리가 이랬었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그게 만나자마자 할 말이야?" - P27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이건명백해, 백 퍼야, 저 머리띠가 조금만 더 고급이었어도 이건 사랑이 아니었을걸? 나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가슴 대신 혜인의 손을 붙잡고 열람실을 뛰쳐나왔다. - P34

"니는 니가 기다리는 것만 기다릴 줄 알잖아."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어쩌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내게 그냥 던지는 건지도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혜인의 그 말에 어딘가 꿰뚫린 기분이었다. - P37

뛰는 심장의 무늬를 구별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이 진동이,
흔들림이 계속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P48

나는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학교 앞 골목을 거슬러 기숙사로 걸어갔다. 흐린 날씨였다고 기억한다. 얼얼한 탐을 매만지면서도 웃었다고 기억한다. 곱씹어보면서 그럼에도 나는 기뻤다고 기억한다. - P74

하지만 그건 과연 유의미한 변화인 것일까? 무의미한변화는 없었던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만이 유의미한 것인가? 아는 것과 변하는 것은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기억의 열람만이 가능할 뿐이라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는가? - P86

더 좋아할 일이 남았을까? 아니면 실망만 잔뜩 안고돌아오게 될까? 그게 어느 쪽이든 까무러칠 정도로 강렬했으면, 나는 바랐다. - P97

하루 만에 자는 것도, 하루 만에 다 끝장나버리는 것도,
하루 만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것도 가능하구나!
그건 너무 가능한 일들이었지만 새삼 그러하다 깨달으며,
마치 그걸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황홀해져 나는 새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는 이미 다리를 걷고 있었다.
허리 위는 서늘했고 아래는 뜨거웠다. 따갑고 시원하게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가 느껴졌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 P101

한번 만나보래요, 제 느낌 얘기했더니. 그런 사람만나기 쉽지 않다면서, 속단하고 후회하지 말래요.
-오옷, 배우신분! - P115

"퇴근 시간이라 경의선 완전 지옥이었다구."
"태워준다고 할 때 내 차 타지 멍컁돼지야."
"너무너무 무섭다! 싫다!" - P140

"나 설거지 계속해도 괜찮아?"
"응, 그냥 단순 자막 작업. 시끄러우면 이어폰낄게."
슬슬 졸린다는 형섭을 위해 커피 내려줄까? 나는 물었고, 그래주면 고맙지,라고 그가 대답했다. 익숙한 대답과익숙한 풍경. 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 P143

나는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꾸지않았다. 첫 책의 교정을 볼 때 내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단 한가지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었고 나는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후로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내 글이 이제는 홀연 마음이 떠나버린 누군가를 대하는 기분이었고, 나는 조금 더 선택의 재량이 있는 편집자의 수준으로만 교정을 보았다. 그날 저녁, 내가 교정을 끝마쳤다는것보다 거짓말처럼-그때처럼, 오늘 저녁 뭐 먹을까? - P150

그리고 그와 내가 꼭 한번씩 울었던 그 집이 그 너머에,
내게, 있었었다. - P155

"저기, 혹시, 훈건장 리오86님?"
"어머나. 섹요미85님이시구나!"
"반가워요."
"전 별로예요. 여기 커피 맛없어서 입맛만 베렸거든요."
"그럼 바로 2차 가시죠."
"화끈하세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텔비는 제가 낼게요."
"그만하세요."
"어, 미안." - P177

그날도 H는 공부를 하겠다며 열람실에 앉은 지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게 문자를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집중이 안 돼서 어떡해 ㅠㅠ, 그럼 만날래? 우리 만날까? 바람을 넣었고 H는 그래, 어차피 앉아서 네 생각만 할 거 그냥 보자! 하고 듣기 좋은 소리로 답장을 했다. 우리는 문자를 하면서도 사랑을 했고, 가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사랑을 했고, 순두부의 노른자를 터뜨리면서도, 막걸리병을주무르면서도, 말없이 눈만 맞추고 있어도 사랑했지만 나는 그 말이 또 듣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아 빠르게 취했다. - P192

"다시 또 싸우기."
"그러기 싫은데?"
"그럼 오늘 미리 싸우고 헤어질까?"
"그것도 싫어." - P214

"이제는 진짜 너랑 친구해야겠다." - P222

"하나는 새 남자들이면 쓰는 거야."
학영은 내 왼손에 들린 베개를 눈짓으로 가리킨 후, 버스에 총총 올라탔다. 역시나 학영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나는 버스가 코너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흔들었다. - P254

그럼, 우리 만날래요?
네, 제가 그리로 갈게요.
그건 사랑해, 하고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던 날, 무심코지워버린 H와의 첫 대화의 끝이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될 한 남자와 나눈 시작의 말이기도 했다.
이 다 하시 - P267

3월 4일.
담당 작가의 초교지를 들고 강남으로 미팅을 나갔다.
모처럼의 서울 외출이었고 나는 그날을 기다렸다는 듯 지난겨울부터 사들이기 시작한 명품 신발과 가방을 개시했다. 작가와의 첫 만남은 유쾌하고 즐거웠으며, 자칫 의견이 틀어질 수도 있을 표지에 대한 취향이 맞아떨어지면서부터 우리는 아주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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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번역가의 일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뭐랄까, 보통은 이런 청탁에서 내가 제공할 수 없는 유의 상당히 우아한 글을기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이 책은 내가 얼마나 우아하지 않은 사람인지를 증명할 것이다).
때론 어이없는 청탁을 받기도 한다. 어느 잡지에서는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를 주제로 글을 써달라고 했는데, 그 의도가 무엇이든 나로선 상당히 불쾌했다. 전문 산악인에게 ‘오를 수 없는 산‘, 오페라 가수에게 ‘부를 수 없는 가곡‘ 따위를 글로 써달라고 할까? 번역을 단순히 단어를 번역하는 일 정도로 보는 무지함(야만성이라고 썼다 지웠다)은 말할 것도 없고. "네가 못하는 걸 털어놓지 그래" 하는 저의가 느껴지는 요청이다. 대한민국 번역 평론 담론의 수준이 지옥까지 떨어졌을지라도 번역가에게 대놓고 이런 글을 부탁하다니 번역가에 대한인식이 얼마나 밑바닥에 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수많은 번역가 지망생들을 봐왔고, 앞서 언급한 문제점을 가진 해외파 학생들도 꽤 자주 접했다. 그들에게 당부한다. "출중한 영어실력은 날개가 될 수도 있지만 목발로 걷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걷는 방법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고. 결국 훌륭한 번역가란 명문 대학을 졸업한 번역가나 ‘원어민‘ 번역가가 아니라 번역과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번역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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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는 더 이상 높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 뒤에야 느리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네로부터 내려와 지상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어느새 한 시절이 떠나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P161

니까 어떤 휴지기와 휴지기 사이에서 솟아나는 잔상들,
잔음들, 물결들, 걸음들. 멀리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종이 위에 적힌 문장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읽는법을 잊은 사람처럼 읽었다. 읽는 동시에 잊어버리는사람처럼 읽었다. - P163

시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가닿을 고유한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 편의 시는 모두에게보편적으로 다가가는 것일 수 없는, 개별적인 사건 그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어떤 시를 발견하게된다면, 혹은 어떤 이가 어떤 시를 전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현재의 너와 나를 마음 깊이 돌보고 돌아보는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시는 언제나 바로 곁에 있었지만 결정적인 상황을 겪은 뒤에야 혹은 우연을가장한 필연적 사건을 마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불현듯뒤늦게 찾아드는 무엇이라 여겨집니다. - P167

몸과 마음을 허물어지게 했던 어떤 고통의 기록을읽습니다. 때때로 어떤 몸의 고통은, 그로부터 오는 영혼의 아픔은, 생동하는 한 생명을 보잘것없는 사물의자리로 끌어내립니다. 사람이었던 자리에서 사람 아닌자리로 밀려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사람은 어떤눈과 어떤 목소리를 덧입게 되는 것일까요. - P170

그때. 언어가 몸을 얻을 때. 언어가 혼을 얻을 때. 그때.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는 무엇이라 불리는가. 그때. 세계는 어떻게 무엇으로 물결치는가. 너와 나는 어떤 울음으로 일렁이는가. - P190

시의 자리로 옮겨온 언어는 이미 문맥 속에서 이전의 소리와 의미와는 다른 공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 P193

어쩌면 누구에게도 말 걸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말 건네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세계의 끝잔디 위를 한나절 정도 산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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