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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거 입으면 안돼?

아무거나 걸칠거면 태어나지도 않았어.

지랄한다. 오늘도 늦어?

하고 싶을 때 쯤 들어올게.

내가 니 붙박이 장이냐, 아무 때나 열고 들어오라고 방 안에 쳐박혀 있는 사람 아니다 나.

그러니까 직업을 좀 갖던가. 먹여 살리는 거 슬슬 지쳐가.

많이 안 먹는 거 알면서 꼭 그래.

출근길에 말 길게 하는 거 싫으니까 와서 뽀뽀나 해줘.

 

승호는 가볍게 엉덩이를 들고 걸어온다. 나는 녀석의 저런 차림새가 좋다. 헐렁하게 늘어지고 헤진 캘빈 클라인 잠옷 바지는 마치 빈티지 숍에서 건져온 것처럼 낙낙하고, 잘 발달된 가슴 근육이 드러나는 카키색 싱글렛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샤워를 마치고 선풍기 앞에서 강아지처럼 머리를 말리는 놈을 굳이 현관 앞으로 걸어오게 만드는 건 햇살이 가득한 창을 등지고 걸어오는 아름다운 피조물이 현재는 내 소유임을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잘 다녀와.

잘 다녀 와서 예뻐해줄게. 밥 좀 챙겨 먹고 밥 먹기 전에 설거지 좀 하고.

근데 나 다시 일 나가면 안 돼? 나도 좀 벌래 돈.

몸이 근질근질하구나. 일 나가면 집도 나가는 거야. 뭔 말인지 몰라?

그냥 아무 감정없이. 정말 기계처럼.

그게 되니?

안될건 뭐야.

뭔 말인지 모르겠고. 그대로 반복이야. 일 나가면 집도 나가. 그리고 내 삶에서도 나가.

알았어. 꼭 그렇게 정색하고 무섭게 말을 해.

차라리 공부를 좀 하던가. 난 너처럼 그렇게 시간 많으면 박사 따고 교수 따고 다 따먹었겠다.

늦겠다. 가

간다.

가.

갈게.

늦지 마.

 

현관을 열면 또 다른 세상이다. 나는 더 이상 교태 부리지 않고, 미심쩍어 하지 않으며 나의 단점과 남의 장점을 잘 아는 현명한 성인이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없다. 그저 누가봐도 산뜻한 옷차림의 경쾌한 미소를 지닌 직장인일 뿐이다.

 

벤티 아메리카노 주세요. 얼음 몇 개만 띄워주시구요.

오빠는 그러니까 정말 소개팅 안할 거에요?

손님한테 맨날 오빠라 그러면 점장한테 이를거에요.

그럼 오빠지 언닌가? 그 때 일하던 제시 있잖아요 진짜 괜찮은 앤데, 가슴도 왕 커요.

세상에 저는 가슴 왕 큰 언니 왕 싫어해요.

아 진짜. 사람을 만나봐야 알지! 오늘은 꼭 확답 받아주기로 했는데.

셋이 같이 보자. 밥을 먹던가 아님 술을 마시던가. 담 주 쯤에 오케이?

제시는 저스트 투 오브 어스. 했는데 오빠가 해피 투게더 하쟀다고 할께요. 이 정도면

나 노력한거지 뭐. 그죠?

그럼. 나 늦어요. 얼른 커피 줘.

근데 오빠 아침부터 벤티 먹음 화징실 안 급해요?

 

커피를 내리는 제시카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곱게 갈리면서 중독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원두 때문인지 아니면 커피 보다 더 중독적인 저 아이의 미소 때문인지 벌써 2년 넘게 나누는 아침 인사다. 이젠 내가 휴가라거나 그녀가 휴가여도 아쉬울 정도다. 스물 넷. 대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제시카는 소녀시대의 제시카처럼 시크한 미소를 갖고 싶은 소망을 지닌 푸근한 숙녀다. 그녀의 넉넉한 몸매와 날렵한 발목, 그리고 제시카 보다는 써니를 닮은 귀염성 있는 얼굴은 여러 남자들의 지갑을 열게 했음이 분명하다. 저 쪽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며 우리를 예의 주시하는 30대 중반의 남자는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부터 제시카 쪽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이거. 어제 유통기한 지나서 냉장고에 넣어 놓은 건데. 오빠 먹어요. 안 상했어

머핀은 안 상해.

머핀은 안 상한다는 건 과학적이거나 의학적인거야?

내가 좀 전에 똑같은 거 먹었어요. 임상실험 거친거니까 완전 안전함.

여튼 잘 먹을게. 탈 나면 밥 니가 사는거야.

하여간 쪼잔한 매력이 넘쳐나요. 얼른 가요. 늦겠다.

그래, 수고!

 

예술을 하는 아이라 손놀림이 어여쁘다. 샛노란 봉투 끝을 삼각형으로 여민 머핀 봉지 위에 ‘굿 럭’이라고 쓰인 포스트 잇이 붙어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통유리 문을 밀고 뒤를 돌아보니 제시카 앞에 아까 그 남자가 서있다. 이런 미소는 당신만을 위해 준비한 거야 라는 공들인 미소를 지으며. 앉았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니 180은 족히 넘어보이는 큰 키다. 탄력있게 올라 붙은 엉덩이에 시선이 간다. 관리를 잘했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택시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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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난 늘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
어릴 적엔 ‘모닝스타’라고 불렸으면 했다.
앤디 모닝스타.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 앤디 워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영화를 보는 거 아니야? - P13

시를 좋아할수록 나는1. 자유롭지 않으며2. 고통스럽고3. 병약해진다. - P8

그러므로 이 에세이는 가십이자 자서전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흐름이나 주제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더라도 어쩔 수 없다. - P27

. 로저 이버트는 "나는언젠가 살이 빠질지 모르지만 당신은 영원히 〈브라운버니>의 감독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 결장암 검사내시경 동영상이 영화보다 재밌을 것이다"라고 대꾸했다. - P41

그러나 어디에도 시는 없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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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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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첫사랑을 찾아주기 위한 무용한 모험담이자 전할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최선의 수고들 다하는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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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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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생명체들이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낯설지 않은 무엇이 되어가는 이야기는 나에겐 올타임베스트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굉장히 많은 작품들이 이 스토리 라인을 시도하지만 열에 여덟은 실패한다 이유가 뭘까 아마도 낯설다와 무엇이 된다를 고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긴긴밤 은 과장하거나 부연하지 않고도 쉽지 않은 것들을 높은 완성도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코끼리에게 길러진 🦏코뿔소와 코뿔소가 기른 펭귄 🐧사이에 놓인 땅들과 풀숲들 호수와 사막 그리고 별빛과 빗물 절벽과 바다까지 🌅🏔🏞🏜🌄두껍지 않은 이 책 속에는 이 낯선 존재들이 만나 함께하는 많은 공간들이, 눈부신 대화들이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생생하게 살아난다 👦어린이문학상 대상이라는 고운 말에 걸맞는 다정함과 그 말의 스펙트럼을 훌쩍 넘어선 감동이 있어서 비단 어린이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홀로 천천히 오래 곱씹을 이야기다 무엇보다 나는 결국 홀로가 되어도 그 혼자의 마음 안에 각인될 누군가의 역력함을 새겨 넣은 #루리 작가님의 간곡한 청을 기억하겠다 되게 기쁘다 혹시 내가 다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챙겨 넣을 책이 생겼다 #긴긴밤#루리#문학동네#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대상수상작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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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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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조금만더가까이 의 개봉이 2010년 이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나는 그 때 상상마당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고 당시 배우로도 활동했던 요조가 영화에서 긴 머리로 남산을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 후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첫 만남이었다 똥그란 눈은 호기심이 왕성했고 말은 느릿한분이셨다 언젠가 내가 요도라는 헛발음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은 영사기 밑 좌석에서 호탕하게 웃어주셨다(감동)그 후 요조는 음악영화제의 홍보대사가 되었고 나는 홍대 한복판에서 그녀와 공연 사회를 보기도 했다(왜)이렇게 쓰고 있자니 무슨 전생의 이야기 같다 여튼 긴 시간이 흘렀고 #나아당궁 이라는 요조 감독의 영화가 만들어질 때 무엇을 만들어 내는 일이 반드시 용기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도 영화도 의욕이 넘치지 않고 찰랑여서 좋았다 #실패를사랑하는직업 이번 책도 좋았다 내가 병상에 있을 때 나온 요작가님 전작들이 너무 궁금해질만큼 좋았고 이토록 순순히 생활이 글이 되는 건강함이 그녀에게 계속 유지되어 주기를 응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모과나무 를 들으며 잠깐 생각에 잠겨 봐야지 싶다 이 책 속에서 특히 또의 감은 눈, 제주 택시 기사님의 음성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요조 #실패를사랑하는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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