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음식물과 재활용 쓰레기를리러 나가던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일층 빌라 입구 유리문에 누군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 P51
정아는 실없는 얘기를 할 때는 수다스럽지만 정작 중요한걸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시간텀을 두곤 했다. - P53
다음날, 정아는 흙이 잔뜩 담긴 이십 리터짜리 자루를 열포대나 들고 왔다. 이 또한 마주잡고 하나하나 계단으로 옮겨야했다. - P55
나는 밤에, 정아는 주로 낮에 글을 썼다. 자연스레 이어 쓰기가 되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도, 앞뒤가 맞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누군가 ‘끝‘이라고 쓰면 그간 써온 글은그대로 남겨진 채 다음 이야기가 시작됐다. - P61
내가 이어 썼지만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우리의 문서함에는 중단된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누군가 ‘끝‘이라고 쓰면 그이야기는 끝났지만 그건 결말을 맺어서가 아니라 더이상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서였다. 종종 내 인생도 ‘끝‘이라고 쓰고 싶어졌다. 정아의 문장대로 이 모든 게 햇빛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커튼을 조금 열어보기도했다. - P63
어떤 것을 심든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마냥 기다린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 P67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아요. 침을 잃으면 자기들이죽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P70
감자 파티 이후로 정원은 날이 갈수록 스산해졌다. 꽃이 하나둘 지고, 노랗게 혹은 붉게 변한 잎들은 힘없이 떨어졌다. 정원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초록이었던 정원은 정아의머리색처럼 빛바랜 갈색으로 변해갔다. 맥빠진 결말로 향해가는 이야기처럼 심심했지만, 안전했다. - P72
너도 이제 변해도 돼. 변하지 않는 게 힘들어서 다들 변하는거야. - P75
우리가 쓰는 건 사실이 아니야.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픽션이야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순 없어. 그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해. - P79
정아씨 걱정은 하지 마. 송희야, 멸종 위기종을 지키는 가장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민재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가까이에 살지 않는 거야. - P84
여기에 구근을 심어줬네요.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을 잘 보내면 봄이 되기 전에 꽃이 필 거예요. 가을에 미리심어둔 구근은 겨울과 봄을 연결해주는 통로 같은 거죠. - P85
그러더니 은재의 목덜미를 살살 간질이면 머리를 손에 비비면서 몸을 배배 꼰다고 했다. 기분이 좋으면 누워서 배를 보여주고 혀로 자꾸 핥아주는데 촉감이 까슬까슬하다고. - P95
책방 구석구석을 구경하던 손님이 카운터 겸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거 돈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죠?" 나는 좀 당황했지만 이내 대꾸했다. "아닌데요. 아파트 사려고 하는 건데요." - P100
"그런데 은재를 어떻게 알아봐?"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뒀어." - P103
"순응." "알았지? 오늘부터 마음에 새겨. 그러면 돈 벌 수 있어."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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