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안에 손을 넣어 바닥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 P121

"우리도 흙에서 왔다잖아."
참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설교를 듣다 나온 티를 내는 걸까.
아희가 내 왼쪽 발목을 가리켰다. - P123

연습지에는 이아희, 라는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아희의 글은 감정이 그득그득해서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았다. 나는 잘 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P125

"뭘 사려고?"
"생리대. 나 양이 많거든." - P125

아희가 돌을 꺼낸 건 우리가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동시에말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돌을 가진 사람만 말할 수 있어.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들어주기." - P126

그날 수업 시간에 인디언들은 회의를 할 때 막대기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막대기를 지닌 인디언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아무도 중간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P127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희는 대답했다.
"그러면 친구끼리 무슨 얘기를 해? 우리 서로 쓰레기통 해주자." - P127

운동화는 아희에게 컸다. 아희 발은 235인데, 할인율이 높아서 245를 골랐단다.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도, 매점으로 뛰어갈 때도, 복도를 천천히 걸어갈 때도 들썩거리는 운동화를아희는 거의 끌다시피 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 P131

학원을 가지 않는 날에는 하굣길에 아희를 만나러 헌책방에들렀다. 언젠가부터 아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책을읽고 있었다. 대부분 죽은 사람들이 쓴, 먼지가 풀풀 날리는낡고 오래된 책을.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열중하고 있는 날도있었다. 그럴 때면 아희가 영영 그 세계로, 내가 모르는 세계로 가버릴까봐 두려워 아희의 어깨를 평소보다 힘주어 잡았다. - P157

원래는 유해 동물이 아니었던 거야? - P144

아희는 오른쪽 신발을 잃어버리고, 나는 왼쪽 발목에 금이간 채 같이 절룩거리며 걸었던 거리에, 교복을 입어도, 입지않아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거리에, 우리의 우정과 상처를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그 거리에. 이제는 따뜻하다못해 뜨거워진 돌을 손안에 품고. - P149

나는 다시 그 자리에 멈춘다. 돌을 건네고 들을 준비를 하기위해.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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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좋은 죽음‘이라는 말은 있어도 ‘좋은 장례‘라는 말은 찾기 어렵다. 어떤 형식과 내용을 지닌 장례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조차 합의된 바가 없다. ‘좋은 죽음‘을 두고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는 건 거기에 그만큼 구체성이 없다는 뜻인데,
같은 이유로 ‘좋은 장례‘는 앙상한 뼈대조차 그려낼 수 없다. - P31

오늘은 네가 죽지만 내일은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차 밖 낯선 길에 고인을 두고 온 것을 슬퍼한다. - P33

모래땅을 파는 사람들 옆에서 관이 묻힐 땅을 파는 사람들. 관을짜고 묘지를 만드는 동안 논밭에 나갈 장정 손 하나가 줄어드는데도 그것이 용인됐다. 의사는 아무나 될 수 없어서 없다지만, 죽음을 다루는 마음이라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을이 있어야 장례가 있고, 마음이 있어야 장례가 치러진다. - P33

하지만 체념하기엔 현실에서도 영화 같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고인을 홀딱 벗겨놓고 염을 하는 염습실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 입술이 너무 메말랐다며 자신이 쓰던 립밤을 성큼 꺼내 고인의입에 바르는 이가 있었다. 사별자들이 지켜보던 것도 아니었다. - P35

죽음에 대해 물었는데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듣는다.
결국 사는 일 가운데서 죽는 일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타인의 사별을 지켜보며 하는 노동에서 자신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 P38

돈 버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덤벼들기엔 이 일은 만만치 않다.
그야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일이니. 그렇지만 김영래는 가장 어려운건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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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만 스무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스무 통의 전화는 모두 다른,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고통을 호소했다. 그림자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그런 것뿐이겠지. - P66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본다. ‘여기‘라고 말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저기‘라고말하는 결심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모두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원도심으로 가는 버스 안에는 노인들과 나뿐이다. - P67

몸이 이렇게 말랐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어 - P69

저는 매일 듣죠. 힘들고 무겁고 외로운 거.
삶이 그런 거니까. - P69

조금 다르게 보여요. 다르게 보면 다르게 살아지고.
그런 곳이 없어요? - P70

니나는 웃었다. 니나는 삶은 우연이 쌓여서 의미가되고, 의미를 곱씹으며 운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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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음식물과 재활용 쓰레기를리러 나가던 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일층 빌라 입구 유리문에 누군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 P51

정아는 실없는 얘기를 할 때는 수다스럽지만 정작 중요한걸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시간텀을 두곤 했다. - P53

다음날, 정아는 흙이 잔뜩 담긴 이십 리터짜리 자루를 열포대나 들고 왔다. 이 또한 마주잡고 하나하나 계단으로 옮겨야했다. - P55

나는 밤에, 정아는 주로 낮에 글을 썼다. 자연스레 이어 쓰기가 되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도, 앞뒤가 맞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누군가 ‘끝‘이라고 쓰면 그간 써온 글은그대로 남겨진 채 다음 이야기가 시작됐다. - P61

내가 이어 썼지만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우리의 문서함에는 중단된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누군가 ‘끝‘이라고 쓰면 그이야기는 끝났지만 그건 결말을 맺어서가 아니라 더이상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서였다. 종종 내 인생도 ‘끝‘이라고 쓰고 싶어졌다. 정아의 문장대로 이 모든 게 햇빛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커튼을 조금 열어보기도했다. - P63

어떤 것을 심든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마냥 기다린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 P67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아요. 침을 잃으면 자기들이죽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P70

감자 파티 이후로 정원은 날이 갈수록 스산해졌다. 꽃이 하나둘 지고, 노랗게 혹은 붉게 변한 잎들은 힘없이 떨어졌다.
정원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초록이었던 정원은 정아의머리색처럼 빛바랜 갈색으로 변해갔다. 맥빠진 결말로 향해가는 이야기처럼 심심했지만, 안전했다. - P72

너도 이제 변해도 돼. 변하지 않는 게 힘들어서 다들 변하는거야. - P75

우리가 쓰는 건 사실이 아니야.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픽션이야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순 없어. 그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해. - P79

정아씨 걱정은 하지 마. 송희야, 멸종 위기종을 지키는 가장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민재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가까이에 살지 않는 거야. - P84

여기에 구근을 심어줬네요.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을 잘 보내면 봄이 되기 전에 꽃이 필 거예요. 가을에 미리심어둔 구근은 겨울과 봄을 연결해주는 통로 같은 거죠. - P85

그러더니 은재의 목덜미를 살살 간질이면 머리를 손에 비비면서 몸을 배배 꼰다고 했다. 기분이 좋으면 누워서 배를 보여주고 혀로 자꾸 핥아주는데 촉감이 까슬까슬하다고. - P95

책방 구석구석을 구경하던 손님이 카운터 겸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거 돈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죠?"
나는 좀 당황했지만 이내 대꾸했다.
"아닌데요. 아파트 사려고 하는 건데요." - P100

"그런데 은재를 어떻게 알아봐?"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뒀어." - P103

"순응."
"알았지? 오늘부터 마음에 새겨. 그러면 돈 벌 수 있어."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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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59번가에 다다를 때쯤 내 눈에 비친 소년의 모습은아름다웠고 남자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 P95

신년회 자리에서 짐이 나를 보고 달려온다. 세라는목례를 하고는 가버린다. 한 해 전에 나는 만나는사람이있었고 두 해 전에는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밤 짐을 보는 건 석 달 만이고 세라를 보는건 여섯 달 만이다.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여자가나타나더니 눈을 반짝이며 인사한다. "보고 싶었어요!" - P24

"아직도 거기 사세요?" 내가 묻는다.
"내가 어딜 가겠어?" 베라가 워낙 큰 소리로 말하는바람에 계산대 쪽에 줄 서 있던 남자가 우리 쪽을돌아본다. "그래도 자기, 알지? 그 계단 덕분에 내가튼튼하잖아."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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