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넉 달 전부터, M이 사는 이 건물의 407호에서 살고있었다. - P69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작은 방에서 혼자 앓는 사람에게 필요한 근사한 꿈에 대해서 한숨 자고 일어나면 잠들기 전의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꿈이 있다면 어떤 꿈이어야 하는지, 소년은 407호앞에 도착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P71

대치역에 도착한 후에는 8번 출구로 나가 영어 학원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 다행히지갑엔 우유 값에 해당하는 현금이 남아 있었다. 다른 여덟개의 카드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소년은 카드 대신 남은 현금을 모두 꺼냈다. 오늘 하루만큼은 무사하고 싶었고 그 어떤거짓된 언어로도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았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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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는 일은 존재조차 몰랐던 세계를 발견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헤매다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하고 처음 보는 꽃이 만발한 벌판을 만나기도 합니다.

"단편소설은 개념대로라면 반드시 짧아야 한다. 그것이 단편소설의 어려움이다. 그렇기에 쓰기가 매우 어렵다. 서사를 간결하게 하면서 여전히 이야기로서 기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편소설 쓰기와 비교해 단편소설 쓰기의 주된 문제는 무엇을 생략할 것인가를 아는문제다. 남겨진 것은 반드시 사라진 모든 것을 함축해야한다"와 같은 해설을 만나면 밑줄을 치고 공책에 옮겨 적느라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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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두 번이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깐 눈을 붙였지만 섬에 들어오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온전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칠흑같이 까만 길까지도 생기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높고 든든한 산과 헐벗은 언덕, 그리고 저 아래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선명하고 기분 좋게 철썩이는 대서양의 존재를느꼈다. - P53

도롯가에서 작고 통통한 암탉이 뭔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서 목을 쭉 빼고 돌을 디디며 길을 따라 걸었다. 정말예쁜 암탉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파우더라도 바른 것처럼 깃털 끝이 하였다. 암탉이 풀로 뒤덮인 가장자리로 뛰어내리더니 왼쪽도 오른쪽도 보지 않고 달려서 도로를 건넌 다음 잠시 멈춰 날개를 다시 정리하고는 절벽을 향해똑바로 질주했다. 그녀는 절벽 끝에 도착한 암탉이 고개를숙이더니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절벽 밑을 내려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막상 내려다보니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풀로 뒤덮인 널따란 바위가 튀어나와 있고 아까 그 암탉을 비롯한 닭 여러마리가 모래 구덩이에서 몸을 긁거나 만족스럽게 누워 있었다. - P59

"아니." 그가 즉시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그를 빤히 보며 기다렸다.
"글쎄." 그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땅은 모르겠다.
당신한테 땅은 주고 싶지 않을 거 같아." - P65

두 사람이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는 빗장을 열면서 그가 자신을 내보낸 다음 문을 잠가버릴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먼저 내보내고 뒤따라 나갔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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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알아. 타이밍. 늘 안 좋았지. 아무튼, 요새 꽂힌 빨강 머리가 있는데, 퍼래머스 외곽에 있는 스테이크집 사장이야. 리타 헤이워드는 저리 가랄 정도야. - P91

대니가 테레즈에게 키스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는 자신의일터를 여성을 유혹하는 수단의 하나로 사용하는 정도의 인물이지만, 테레즈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본다. "테레즈는 감히 아무것도 만지지 못한다"는 문장은 영화에서 지문만이 할 수 있는 심리 묘사일 것이다. - P93

죽은 개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소원을 빌었다. 개를 데리고 멀리까지 왔다. 기적이 있기를 빌었다. 다시 살아나는 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방을열어 확인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주인공 형제보다도 이 소년을 닮았다고 느끼곤 한다. 죽은 개를 가방에 넣고기적을 바라며 멀리까지 다녀오는 소년 같다고. 가방 안의 개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가능하다고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린이와 영화감독만이 일으키는 기적이다. - P102

윤가은의 남동생들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농담임), 윤가은의 소녀들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노출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갖기 어렵다. 절박하지않기에 표정을 마음껏 가질 수 있는 이 사내아이들은, 애석하게도 혼자이지만 시대를 초월해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작은현자이며,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자기 영화 속에 갖고 싶어할 요다와 같다. - P104

‘진짜‘가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내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진짜‘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은 글쓰기에 있다고 믿었던 나날, 특별한 경험을 하자.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내자. - P107

창작과 비평 양쪽에서 예술을 ‘내가 잘 안다‘고 주장하는목소리들과 예술을 ‘너(재)는 오해하고 있다‘며 서로 헐뜯는 목소리들 속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 욕하고 욕을 듣는사람의 얼굴만 바뀌고 젊은이도 노인도 여전히 그러고들있다. 그럴 때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Let‘s Get It On>과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Tiny Dancer〉를 떠올린다. 나는좋은 곳으로 갈 테니까 니들끼리 헐뜯고 살아.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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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 그래서 멍청한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자기 방이 필요한 존재들에 대한 얘기로 이해됐다. 스페이스라는 영어가 좁디좁은 한 칸 방이라고 해석되든 무한하거나 광활한 우주로 해석되든 그건 마찬가지였고, 자신의 이해가 틀렸든 아니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 P138

유자는 전시회를 보러 갔다. 그날 은율은 서울에 없을 거라고했다. 서울에 없으면 어디에 있겠다는 건지, 은율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나 늦어"라고만 했을 때, 유자는 실망했다. 늦을 거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늦게라도 돌아온다는 말에. 그즈음 유지는은율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P138

대놓고 사기꾼인 최에게 당한 그녀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멍청하게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세상에 그녀 하나뿐인 것처럼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고!
악을 썼다. - P141

‘카니발리즘‘을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식인‘이라고 나온다. ‘동족포식‘이라고도 한다는데, 그쪽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다. 우주에서는 은하가 은하를, 별이 별을 잡아먹는다. 그걸 ‘갤럭시 카니발리즘‘ ‘스텔라 카니발리즘‘이라고 한단다. 잡아먹는 별이 있으니 잡아먹히는 별도 있겠다. 기아, 질식, 괴롭힘...... 이런 게 별과 은하의 동족상잔에 붙은 말들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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