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에는 내가 읽던 책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채로 또다른 책을 들고, 어디에선가 벤치에 앉아 이 책을 읽게되리라는 기대로 설레며 산책을 나서기 때문이다. - P88

자신에게 한국은, 그 무엇보다도 인적 없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 속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읽었던 겨울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 P91

나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굴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울 것이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마지막 문장을 쓸 것이다. 아니, 눈물이 곧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잘 울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 문장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 P94

하지의 저녁, 길고도 느린 구릿빛 그늘이 테라스의 장작더미 위에, 유리구슬에, 거울 조각에, 공작새의 양철 날개 위에한없이 오래 머문다. 그러다 묽은 어둠이 고이듯이 하지의 밤이 온다. 정원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로 우뚝 서 있는데, 하늘에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 P94

우리의 기대는 참으로 나이브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가선택한 경로는 오직 숲을 관통하는 길이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카페는커녕 단 하나의 벤치도 없었으며, 이곳 건너편의 숲은 깊고 울창한데다 호수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아니라서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만날 수 없었다. - P96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오랫동안 음습한 숲속을 헤매던 우리의 눈앞 저멀리에서부터,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지는 들판 한 귀퉁이가 나타나던 순간을 나는 사막에서 신기루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곳으로 걸어갔다. - P99

아프다, 이게 바로 나야!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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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잡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귀가 꿈속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꿈 밖의 (더이상 거대한 귀가 아닌) 나로서는 기억해낼 재간이 없었다. - P75

아버지의 불륜이 들통나고 내가 그곳에 머물게 되었을 때, 어머나는 더이상 임시 거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 집이야."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 P80

아버지의 빈정거림이 무색하게 떡은 서서히 구워졌다. 잠시 후,
어머니는 찬기가 가신 떡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여전히 딱딱하긴했지만 나는 곡물의 고소한 맛을 느끼며 꼭꼭 씹어 넘겼다. 어느아버지도 젓가락을 가지고 와서 떡을 다른 촛불 위에 굽기 시작했다. - P89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거기에머물러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 P100

그해 여름, 나는 그렇게 틈만 나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불장난을했다. - P120

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의 삶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치리라고 호들갑스럽게 기대했던 순간들이 그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시실에 나는 어쩌면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 P128

나는 원고지를 덮었다. 선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내 얼굴과 선생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터무니없이 치명적이고 통렬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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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영 씨!" 상수는 수영을 노려봤다. 적개심이나 경멸감은 아니었다. 후회하고 창피스러워하는, 쓰라림이 있었다. "관두죠." 불분명하게 내뱉고, 상수는 가방을 챙겨든 다음 그대로 나갔다. - P91

수영은 의자를 빙글 돌려 상수를 똑바로 봤다. "그럼한번 말씀해 보시죠. 그날 왜 안 나오셨는지."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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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와 함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국감의 대화는 일상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다. 일반 시민들이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와 통계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시정된 것들이 우리일상을 쥐락펴락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므로 시간 내서 국감 영상을 챙겨 본다. 우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절박한 문제들이 테이블 위에 오른다. - P150

욕실은 주로 혼자 머무는 공간이다. 그곳에선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얼굴만 마주하면 된다. 나의 욕실은 서재건너편에 있고 거기엔 작은 욕조가 있다. 전에 살던 집주인이 두고 간 욕조다. 그 욕조는 아름답지만 매일 목욕하는 건 사치니까 보통은 샤워만 하고 나온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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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지금 관심사는 뭔가요.
예전에는 극단적인 사람, 연쇄살인범, 이런 이야기에 끌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연쇄살인범보다 ‘연쇄살인범의 아들‘에게 더 끌려요. - P39

재미와 의미는 마치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두 마리 토끼 같아서 동시에 잡기 힘들다고들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양자택일의 고정관념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 P31

박해영 작가는 그런 드라마를 쓴다. 해방, 추앙이라는 말로 일상을견디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흔든다. 내성적이고 의욕이 없는,
내가 숨기고 싶은 일면을 정면에 드러낸 캐릭터를 만든다. - P49

대사의 골조는 빤하고 하고자 하는 말의 핵도 빤해요. 자기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한 페이지 분량으로 중언부언할 얘기도 사실 한줄로 딱 끝내버릴 수 있거든요. 웬만하면 인물들이 그런 대사를하게 하자는 주의예요. 그래야 보는 사람도 쾌감이 있고 보면서 딴생각하지 않게 되고요. 염미정과 구씨는 딱 골조만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 말맛이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인물들은 수다를 떨게 하는 거죠. - P51

맞아요. (웃음) 하루는 선생님이 저를 불러 "꿈이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작가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처음으로 타인의 눈으로 제 재능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 P55

서숙향 작가의 명대사는 당장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명랑함과 발칙함으로 빛난다. "예, 솁" (공효진), "봉골레 파스타 하나!" (이선균)처럼 별것 아닌 한마디가 그의 아기자기한 로맨스를 통과하면유행어가 된다. "자기 인생에 물음표 던지지 마. 그냥 느낌표만 던져"
(조정석)같이 어떤 대사들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쓰인 것처럼 배우 본연의 매력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 P61

한편의 시트콤을 완성할 때도 작가마다 장기가 달랐을 텐데요가님은 유머나 캐릭터보다 상황극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어렸을 땐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잖아요. ‘너는 상황 만드는 걸 잘하는구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지된 후에는 복잡한 상황 설정이 필요한 아이템이 전부 저한테 왔죠. - P75

조연의 가치를 아는 특출난 신인이쯤 되면 <갯마을 차차차>는 로맨틱 코미디를 가장한 ‘자기 계발극‘
인가. 3월3일 서울 상암동에 있는 신인 작가 양성소 오펜(O‘PEN)에서 ‘인생 2회차‘를 사는 것 같은 신하은 작가를 만났다. - P79

가볍게 둘러보기만 해도 작업실에 쌓인 작가님의 시간들이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작업은 이 작업실에서 진행하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외부 스케줄이 없을 때는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뒤 곧바로 작업실로 옵니다. 보통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정도까지 여기서 보내는데, 내내 글만 쓰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잘 안되더라고요. 고민만 하다 시간 맞춰 집에 가는 경우도 많고, 사실 시나리오를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중 80~90%는 그냥 괴로워하는 게 일인 것 같아요. - P91

세계에 관심이 많죠.
관심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웃음) 관심이 너무 많아서 허무주의에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죠. 저는 냉소적인 태도가 가장 좋지 않다고 생698195 1954가하고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 해요. - P99

어딘가 삐딱해 보이지만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고, 보는 이들게 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능수능란하게 풍자하는 능력, 딱히 도덕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은데 다른 작품에서 잘 비추지 않던 이들의 이야기를 끄집어오는 기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게하는 유머와 반전 윤성호 감독 작품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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