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게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지나간 희미한정과 기억을 분석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의 나에게 귀기울이는 건 현명하고 건강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 앞에서 혜인은 번번이 지워지기 일쑤였고, 그래서 그녀를떠올리면 가장 먼저 엄습하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 P18

그때의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모른 척 같은 걸 할줄 모르는 애였다. 나는 그애가 혜인임을 알고 야, 너도 훌천하냐고! 아이디가뭐냐고!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 P23

"야...... 니 진짜 돼지네."
그래 이거였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혜인의 새침함은 시간이 흐르며 타박이 되었다는 걸, 우리가 이랬었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그게 만나자마자 할 말이야?" - P27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이건명백해, 백 퍼야, 저 머리띠가 조금만 더 고급이었어도 이건 사랑이 아니었을걸? 나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가슴 대신 혜인의 손을 붙잡고 열람실을 뛰쳐나왔다. - P34

"니는 니가 기다리는 것만 기다릴 줄 알잖아."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어쩌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내게 그냥 던지는 건지도 몰랐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혜인의 그 말에 어딘가 꿰뚫린 기분이었다. - P37

뛰는 심장의 무늬를 구별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열차가 멈추기 전까지 이 진동이,
흔들림이 계속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P48

나는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학교 앞 골목을 거슬러 기숙사로 걸어갔다. 흐린 날씨였다고 기억한다. 얼얼한 탐을 매만지면서도 웃었다고 기억한다. 곱씹어보면서 그럼에도 나는 기뻤다고 기억한다. - P74

하지만 그건 과연 유의미한 변화인 것일까? 무의미한변화는 없었던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만이 유의미한 것인가? 아는 것과 변하는 것은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기억의 열람만이 가능할 뿐이라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는가? - P86

더 좋아할 일이 남았을까? 아니면 실망만 잔뜩 안고돌아오게 될까? 그게 어느 쪽이든 까무러칠 정도로 강렬했으면, 나는 바랐다. - P97

하루 만에 자는 것도, 하루 만에 다 끝장나버리는 것도,
하루 만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것도 가능하구나!
그건 너무 가능한 일들이었지만 새삼 그러하다 깨달으며,
마치 그걸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황홀해져 나는 새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는 이미 다리를 걷고 있었다.
허리 위는 서늘했고 아래는 뜨거웠다. 따갑고 시원하게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가 느껴졌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 P101

한번 만나보래요, 제 느낌 얘기했더니. 그런 사람만나기 쉽지 않다면서, 속단하고 후회하지 말래요.
-오옷, 배우신분! - P115

"퇴근 시간이라 경의선 완전 지옥이었다구."
"태워준다고 할 때 내 차 타지 멍컁돼지야."
"너무너무 무섭다! 싫다!" - P140

"나 설거지 계속해도 괜찮아?"
"응, 그냥 단순 자막 작업. 시끄러우면 이어폰낄게."
슬슬 졸린다는 형섭을 위해 커피 내려줄까? 나는 물었고, 그래주면 고맙지,라고 그가 대답했다. 익숙한 대답과익숙한 풍경. 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 P143

나는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꾸지않았다. 첫 책의 교정을 볼 때 내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단 한가지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었고 나는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후로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내 글이 이제는 홀연 마음이 떠나버린 누군가를 대하는 기분이었고, 나는 조금 더 선택의 재량이 있는 편집자의 수준으로만 교정을 보았다. 그날 저녁, 내가 교정을 끝마쳤다는것보다 거짓말처럼-그때처럼, 오늘 저녁 뭐 먹을까? - P150

그리고 그와 내가 꼭 한번씩 울었던 그 집이 그 너머에,
내게, 있었었다. - P155

"저기, 혹시, 훈건장 리오86님?"
"어머나. 섹요미85님이시구나!"
"반가워요."
"전 별로예요. 여기 커피 맛없어서 입맛만 베렸거든요."
"그럼 바로 2차 가시죠."
"화끈하세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텔비는 제가 낼게요."
"그만하세요."
"어, 미안." - P177

그날도 H는 공부를 하겠다며 열람실에 앉은 지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게 문자를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집중이 안 돼서 어떡해 ㅠㅠ, 그럼 만날래? 우리 만날까? 바람을 넣었고 H는 그래, 어차피 앉아서 네 생각만 할 거 그냥 보자! 하고 듣기 좋은 소리로 답장을 했다. 우리는 문자를 하면서도 사랑을 했고, 가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사랑을 했고, 순두부의 노른자를 터뜨리면서도, 막걸리병을주무르면서도, 말없이 눈만 맞추고 있어도 사랑했지만 나는 그 말이 또 듣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아 빠르게 취했다. - P192

"다시 또 싸우기."
"그러기 싫은데?"
"그럼 오늘 미리 싸우고 헤어질까?"
"그것도 싫어." - P214

"이제는 진짜 너랑 친구해야겠다." - P222

"하나는 새 남자들이면 쓰는 거야."
학영은 내 왼손에 들린 베개를 눈짓으로 가리킨 후, 버스에 총총 올라탔다. 역시나 학영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나는 버스가 코너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흔들었다. - P254

그럼, 우리 만날래요?
네, 제가 그리로 갈게요.
그건 사랑해, 하고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던 날, 무심코지워버린 H와의 첫 대화의 끝이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될 한 남자와 나눈 시작의 말이기도 했다.
이 다 하시 - P267

3월 4일.
담당 작가의 초교지를 들고 강남으로 미팅을 나갔다.
모처럼의 서울 외출이었고 나는 그날을 기다렸다는 듯 지난겨울부터 사들이기 시작한 명품 신발과 가방을 개시했다. 작가와의 첫 만남은 유쾌하고 즐거웠으며, 자칫 의견이 틀어질 수도 있을 표지에 대한 취향이 맞아떨어지면서부터 우리는 아주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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