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생일이면 18분씩 시계바늘을 앞으로 옮긴다는 김난도쌤을 따라 셈해보니, 
내 인생 시계는 '3시 26분'이라, 무엇을 시작해도 한밤중까지 마무리하면 되니까 충분한 시간이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가 '청춘'이라면, 생물학적인 나이가 아니라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 돈버는데 재주 없고 욕심도 없는 내게도 꿈이 있으니, 쉰둘인 지금도 감히 청춘이라고 말한다. 오래 전부터 마을도서관을 꿈꾸었는데, 어제 드디어 구청관계자가 작은도서관으로 적합한지 실사를 나왔다. 그 덕에 백만년 만에 집구석을 정리했는데, 1993년에 작은도서관을 하겠다고 적어 둔 노트를 발견했다. 그런 기록을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93년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93년이면 2월에 둘째를 낳아 정신 없을때인데 그 와중에 그런 꿈을 정리해 놓았다는게 신기했다. 정말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증명하는 듯.^^ 

1993년엔 '늘푸른도서관'이 아니라 작은도서관 이름을 가칭 '두레도서관'으로 정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두레교회를 다녔고 '두레'라는 의미가 좋아서 그랬던 듯하다. 당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때라 선교에 목적을 둔다고 했지만, 7년째 교회에 방학중인 지금도 이웃과 나눔을 하는 것 자체가 선교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결혼 전 교회도서관에서 일했기 때문에 대출은 1인 2권, 기간은 2주일로 좀 야박한 운영계획을 세웠지만, 지금은 넉넉한 아줌마라서 1인 5권 한 달까지, 그림책은 10권 2주 정도 여유를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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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돈에 욕심내거나 돈을 많이 버는 일에 힘을 쏟지는 않았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져본 적도 없고, 돈이 많은 것을 부러워 침흘린 적도 별반 없다. 그저 하루 세 끼 먹으며 자식들 뒷바라지에도 부족해서 가끔은 속상했지만... 온갖 못된 짓하며 부를 축적한 자들이 추악하게 사는 걸 보면, 오히려 많이 갖지 않아 죄를 덜 짓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김난도 쌤의 말을 내 식으로 바꾸자면, 돈이나 시간은 많이 가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삶이면 족하지 않을까... 물질에 욕심부리지 않고 소박하고 청빈하게 살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살아 온 인생에서 나름의 철학을 갖고 생물학적 나이에 관계없이 꿈을 꿀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청춘이다. 


10월 20일 오후 2시, 구청에서 작은도서관 관계자가 동사무소 자치프로그램 담당자를 대동하고 우리집을 찾아왔다. 마침 독서회원인 이웃들이 함께 자리했고, 늘 우리집에서 책을 가져다보는 '와일드보이'가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열린 문으로 보여서 제법 도서관스럽다. ^^ 

 

오전에 책 반납하러 온 이웃이 사온 국화 화분과 메리포핀스님이 지원한 커피도 보이고... 

 

지난 번 사진과는 조금 달라진 서가를, 실사오기 전에 찍었다.  

 

창비 책 62권이 추가되면서 자리가 바뀌었다.
전에는 가운데 책장에 사계절 책과 나누어 꽂았는데 푸른책들이 가운데로 오고, 오른쪽 책장을 창비 혼자 차지했다.^^

 

지난 번에 거실 사진은 공개하지 못했는데, 거실 중앙 책상 위와 밑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잡동사니를 말끔히 치웠다. 집에서 하던 공부방을 접고 학교로 출강하면서 손대기 싫어 완전 카오스였는데, 말끔히 정리된 책상을 우리 딸들이 보면 기절하지 않을까.ㅋㅋ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거실에서 주방이 보이지 않게 하려면 커튼을 쳐야 했는데, 내 눈에 차는 커튼은 20만원이 훌쩍 넘었다. 
대안으로 우리 큰딸 6학년 때 작품을 걸었는데, 가을 분위기가 살아나서 봐줄만 했다. 안 쓸때는 돌돌 말아 올리면 되고.... 

 

작은도서관 규정에 이용 면적 10평 이상, 열람석 6석, 도서 1,000권 이상이라는 조건은 충족됐다.
전에 아파트 개인 서재를 작은도서관으로 등록하고 실제 운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며, 내가 등록하는 것 자체를 꺼리며 상위기관에 알아보겠다는 담당자와 나름 팽팽한 줄다리기로 신청서 접수시키고 실사를 받았으니 등록증은 나오겠지?  


늘푸른 작은도서관 개관식에 구청장님이 참석하든 못하든, 구청장님 스케쥴을 알아보고 개관식 날짜를 잡아야겠다. 우리 막내는 자기가 집에 있을 때 하라고 난리인데... 개관할 때 떡 하라고 쌀을 준 독서회원 덕분에 푸짐하게 떡을 해서 이웃에도 돌리고. 실사를 핑계로 대출도서를 몽땅 회수했는데 책을 기다리는 이들에겐 떡과 책배달 서비스까지 해야될 듯...

쓰잘데없는 사설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1993년부터 꿈꿨던 작은도서관이 진짜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하하~ 
대문 옆에 길게 걸 <늘푸는 작은도서관> 명패는 남편이 알아보기로 했고, 책장에 붙일 도서분류 이름표는 동사무소 POP 강사가 써주기로 했다. 다음 월욜 어머니독서회 모임은 우리집에서 모여 개관식에 쓸 펭귄책갈피도 만들고, 평생회원 대장과 대출기록장도 준비하고... 


처음에는 장르별로 분류해볼까, 도서분류 방식에 따라 나누어볼까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1만 권이 넘는 책을 매번 원위치에 놓는 일도 만만치 않은 노동이었다. 그런 고민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문헌정보학과 교수님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책들을 분류히야 찾기 쉬울 텐데 어찌할까요?" 그러자 교수님은 명쾌하게 그의 고민을 해결해줬다. 1만 2천 권의 책이라면 굳이 분류하지 않는 게 좋겠다. 분류하기에는 적절치않은 규모이고 이곳의 특성상 그렇게 분류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지식인의 서재, 75~76쪽)

헤이리에서 예술공간 '모티브 원'을 운영하는 솟대예술작가 이안수씨는 1만 2천 권도 분류하지 않는데, 겨우 5천 권도 못미치는 우리집 책은 정말 분류할 필요가 없는거구나. 우리 서재에 어떤 책이 있고, 무슨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내가 다 아는데, 꼭 찾는 책이 아니면 서가를 들여다보다 필이 꽂히거나 맘에 드는 책 뽑아 읽거나 빌려가면 되는 거지, 야호~ 신난다.  예전에 DDC 분류를 해봐서 분류의 고됨을 아는 내게는 분류할 필요없는 작은도서관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ㅋㅋㅋ 


작은도서관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 이웃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삼남매를 낳아 키운 것 외에는 뭔가 번듯하게 내세울만큼 성취한 것도 없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안주하지 않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살련다. 많은 이들이 돈버는 일에 올인해도, 나는 돈버는 일이 아닌 '내 일'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련다. 이웃과 책을 나누는 작은도서관 일은 오랫동안 꿈꿔왔고, 내가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오늘도 도서관 자원봉사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한 수 배우러 나가며, 글 제목으로 뽑은 김난도 쌤의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그래도 변명은 조금 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기성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 올인해왔다고 말이다. 어제와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이 이끄는 삶, 남들이 좋다는 주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내 인생의 지향이었다고 말이다.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는 그런 자부심이 없었다면, 그대에게 내 중구난방의 연구 이력을 밑천 삼아 조언을 해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252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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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0-2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어줍짢은 댓글 달기보다 그저 추천만 누르고 가겠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도 해내실 분 같다는 생각이...

순오기 2011-10-21 13: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blanca 2011-10-2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 가슴이 벅찹니다. 저도 꿈을 꾸고 그 꿈을 메모해 봐야겠습니다. 순오기님 모습 보면 순오기님 나이가 되고 싶어요^^

순오기 2011-10-21 13:55   좋아요 0 | URL
공책에 적어두었던 것을 이번에 다시 보고 내심 흐뭇했어요.^^
하하~ 님은 지금 '눈.부.시.게.젊.었.다'는 그 시절을 보내시는데요.

소나무집 2011-10-2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없이 추천이요~

순오기 2011-10-21 13:55   좋아요 0 | URL
말없이 추천~~~~ 감사!^^

마노아 2011-10-2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과 함께 영원히 늙지 않는 순오기님이세요. 감격이에요.^^

순오기 2011-10-24 07:16   좋아요 0 | URL
마음은 언제나 '이팔청춘'이라던 어르신들의 말씀을 실감하는 나이테~~~^^

전호인 2011-10-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이라는 꿈을 항상 실천하시는 오기여사님의 열정이 부럽습니다.^^

순오기 2011-10-24 07:17   좋아요 0 | URL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2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안 정리하는 데도 힘이 많이 들었겠군요.대단해요!

순오기 2011-10-24 07:17   좋아요 0 | URL
집을 워낙 안 치우고 살아서 좀 힘들었어요.ㅠㅠ

잘잘라 2011-10-2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메인에 '출판은 왜 사양산업이 되었는가' 라는 글을 먼저 읽었어요. '답은 공공도서관 뿐' 이라고 해서 공감 추천 하고 왔는데, 여기 더 현실적인 답이 있네요. 늘푸른작은도서관, 응원합니다! 순오기님 만세!!!^^

순오기 2011-10-24 07:18   좋아요 0 | URL
공공도서관도 한계가 있으니까 개인이나 단체들이 작은도서관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이 되겠죠. 앞으로는 동네마다 작은도서관이 줄줄이 생겨나기를...

yamoo 2011-10-2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뜻깊은 일은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순오기 여사님 만쉐이~~^^

순오기 2011-10-24 07:19   좋아요 0 | URL
저도, 의미 있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어요.^^

gimssim 2011-10-21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과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난도쌤 시계로 저는 허걱! 3시 54분인데요.
저도 응원합니다.
순오기님, 힘 내라 힘!

순오기 2011-10-24 07:20   좋아요 0 | URL
저보다 조금 연배시니 시계도 조금 더 갔군요~ ^^
중전님의 응원에 힘입어~~ 기운이 불끈!!

수퍼남매맘 2011-10-2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 받아서 말없이 추천 꾸욱~ 합니다.

순오기 2011-10-24 07:21   좋아요 0 | URL
수퍼남매맘님 책은 교실에서 이미 작으도서관 역할을 하고 있겠지요~~~ ^^

프레이야 2011-10-22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이런저런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군요. 토닥토닥.^^
도서관이 정말 아늑해요.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겠지요.
첫 신청도서도 멋진걸요.^^

순오기 2011-10-24 07:23   좋아요 0 | URL
헤헤~~~~ 크게 상심할 일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더라고요.ㅜㅜ
늘푸른 평생가족으로 등록하신 분들의 신청도서는 가급적 구입하려고 생각해요.^^

희망찬샘 2011-10-22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훌륭한 공간이에요. 아침독서에서 작은 도서관 신문이 발행되었다는 기사가 있네요. 관련이 있는 거지요? http://www.morningreading.org/nbbs/read.html?id=notice&num=392&new_num=331&page_num=1
시간 나실 때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순오기 2011-10-24 07:24   좋아요 0 | URL
의미 있는 정보, 고맙습니다~~~~
잠시 둘러보았는데, 작은도서관 신문파일을 다운받는 거더군요.^^

잎싹 2011-10-24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푸른작은도서관 응원드립니다.
미리 개관을 축하 축하!!!

순오기 2011-10-26 02:4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답글이 늦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