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청에서 지원하는 독서기행으로 영주 부석사를 가게 되었다.
2001년 이상 문학상을 받은 신경숙의 <부석사>에 묘사된 것처럼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고,
최순우 선생이 극찬한 무량수전과 능선의 아름다움에 맘껏 빠져들고 싶었다.
부석사의 당간지주 앞에서 무량수전까지 걸어 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절집이 대개 산 속에 있게 마련인데 부석사는 산등성이에 있다고 했다. 개울을 건너 일주문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사과나무들이 펼쳐져 있다고. 문득 뒤돌아보면 능선 뒤의 능선 또 능선 뒤의 능선이 펼쳐져 그 의젓한 아름다움을 보고 오면 한 계절은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 힘이 생긴다고 했다.
(부석사 15쪽)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78쪽)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 진다. (79쪽)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도 73쪽부터 99쪽까지,
사과나무밭 진입로부터 부석사의 모든 것이 자세히 나와 있다.
광주시청 건너편 서부교육청, 7시 50분에 점검하고 2호 차에 올랐다. 각 학교에서 한 두명씩 참여한 인원이 60명이었다.
광주에서 부석사까지 예정 이동시간은 4시간 30분이었는데, 휴게소마다 들러가니까 5시간이나 걸렸다.
휴게소마다 내려서 가을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영주, 부석사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풍경들~ 길 옆 사과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사과들이 반갑다.
그렇다고 사과나무만 보이는 건 아니다, 여늬 농촌과 다를바 없이 익어가는 콩밭과 황금들판이 펼쳐졌다.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해 식당으로 가는 길에도 가을이 성큼 다가 와 있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무량수 식당 뜰엔 빠알간 인동초가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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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고장 광주에서 온 엄마들의 입맛에 맞아 후한 점수를 받은 경상도 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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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시장했다가 맛난 점심을 먹고 자유롭게 삼삼오오 짝을 지어 부석사에 올랐다.
안내도에서 알 수 있듯이 산 속 넓은 터에 지은 사찰이 아니라, 언덕을 오르며 석축을 쌓아 건물을 하나씩 앉혔다.
입장료 (대인 1,200원)를 내고 들어가면 길 옆에 은행나무가 있고, 그 옆엔 사과밭과 인삼밭이 보인다.
속세의 모든 것을 떨쳐내고 들어선다는 일주문, 들어갈 때 보이는 앞모습 <태백산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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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안에 들어와 사과를 파는데 아무래도 옆에 있는 사과밭 주인이 아닐까 싶은...
일주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 만나는 위풍당당한 당간지주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1963년 1.21지정), 통일신라시대, 높이 428Cm. 너비 55Cm. 지주 간격 100Cm
부석사 경내로 올라가는 최하층 좌측 노변에, 양 지주가 1미터 간격으로 동서로 상대해 있다. 전면엔 별다른 조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 모를 약간 죽였다. 양 지주 사이에 간주를 받는 대석이 남아 있는데 사각형의 하대 위에 원형으로 테를 만들고 안으로 지름 30Cm의 원공을 두어 당간이 끼워지도록 했다. 간결 단아해 보이게 가늘고 긴 편이면서 아래와 위의 두께에 다소 차이가 있어 안정감이 있다.
봉황산 중턱을 깎아 수많은 계단과 돌축대를 배치하여 지은 부석사는 화엄종을 드날린 호국 사찰이다.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은 절 마당으로 끌어들이고 축대 또한 첩첩 조금씩 가도를 달리 해 앞산 능선과 조화를 이루었다.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홉 단계의 돌계단을 거쳐야 하는 가람배치는 단순히 입지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극락세계의 9품 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시킨 것"이라고 유홍준씨는 설명한다.
9품 만다라는<관무량수경>에 나오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한 방법으로 下品下生에서 中品中生 上品上生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 단계를 수행하면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부석사의 도량은 바로 9품 만다라를 상징화한 것으로 천왕문은 하품하생, 범종각은 중품중생, 안양루는 상품상생으로 마지막 무량수전 앞에 이르면 누구라도 업을 씻고 극락정토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 산 아랫자락의 일주문을 지나 차츰차츰 경사진 길을 따라 천왕문 범종각을 거쳐 드디어 산 중턱의 안양루와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고해의 세계에서 극락의 세계로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당간지주를 지나 계속 언덕을 오르면 석축을 쌓아 지은 천왕문이 나온다.
산지나 구릉에 지어진 사찰은 대부분 길게 늘어진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중심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의 높낮이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있다. 부석사도 기승전결의 구성을 따라 사찰 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起).
무량수전으로 가기 위해선 십여 개의 석단을 지나야 되는데, 각 석단의 높이가 서로 다르고, 석단이 위치하는 간격도 모두 달라 높은 단 하나를 오르면 다시 낮은 단들이 나타나고 다시 높아지는 등 발걸음을 조절케 한다. 그래서 입구부터 무량수전까지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방문객들이 힘들이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만드는 비결이란다.
쌍탑으로 불리는 삼층석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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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의 설명을 안 듣고 잠시 뻘짓을 좀 했다. 덕분에 유일한 인증샷 하나 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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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단청하지 않아 오랜 세월을 겪은 나무색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단청하지 않은 미황사의 아름다움에 버금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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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는 두 개의 누각이 있는데 아양류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한 범종각은 건물 방향이 측면으로 앉았으며 앞면은 팔작지붕, 반대편 뒤쪽은 맞배지붕 형태로 불균형 속에 균형의 미를 이룬다.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의 공간은 承. 법고와 목어와 운판이다.
범종각에서 축이 꺽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轉의 공간이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인 結.
국보 제 17호인 안양루 바로 앞의 석등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사면에 화창을 내었고 창 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사면에 공양미륵상의 손 모양이 다르다. 부분에 신경쓰느라 석등 전체샷을 안 찍었네.ㅜㅜ
드디어,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다.
최순우 선생의 책에 실린 무량수전 사진과 자료집에 실린 사진이나 내가 찍은 절마당 모습은 조금 다르다.
내가 못 찍은 석등 사진도 자료집에 나온 사진으로 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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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량수전이다. 국보 제 18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되었다.
보통은 대웅전이라 하는데, 왜 부석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무량수전이 있으며 무량수란 무엇일까? (돌발퀴즈1)
대흥사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을 걸었다가, 귀양에서 돌아오면서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
대체, 배흘림기둥이란 무엇이고, 왜 무량수전에 배흘림기둥을 썼을까? (돌발퀴즈 2)
무량수전에 모신 부처님은 다른 사찰과 달리 동편을 바라보며 서편에 위치했다. 부석사는 호국사찰이기 때문에 신라의 경주를 향해 있다고 한다. 안에 모신 소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정교하고 소조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국보 45호로 지정되었다.
동편 삼층석탑에서 바라 본 무량수전
무량수전에서 돌아보면 능선 넘어 능선, 능선 넘어 능선이 한 눈에 들어왔는데~ 사진엔 잘 나오지 않아서 유감이다.
사진으론 구별이 안되지만 하늘색으로 보이는 곳에도 수많은 능선이 있었다. 웬만한 날씨에는 보이지 않는다는데 우린 복이 많아서 그 능선을 다 볼 수 있었다.^^
무량수전 왼쪽엔 창건설화에 얽힌 선묘낭자의 부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당나라에 머물며 공부하는 의상에게 첫눈에 반한 신묘낭자, 의상을 흠모했지만 연을 맺지는 못했다.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올 때, 법복을 전해주려고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빌면서 배를 향해 법복을 던지니 법보그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의상과 함께 갈 수 없었던 선묘는 용이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고, 하늘이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의상은 귀국 후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문무왕의 명을 받고 지금의 부석사 자리를 절터로 정했으나, 이미 이곳에 절을 짓고 사는 다른 종파의 500여 불승들이 크게 반발했다. 의상이 부처님께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의상은 새 절을 짓게 되었다. 선묘의 넋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이 된 것으로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바위가 정말 떠 있을까? 이중환의 택리지에
"위 아래 바위 사이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 고 적혀 있단다.
다음에 부석사에 가는 분들은 바늘과 실을 가져가서 확인해보시라~ ^^
무량수전 오른편 위쪽으로 선묘각이 있고, 선묘낭자의 영정도 있다.
무량수전 동편 약간 높은 지대에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위로 올라가면 의상대사 영정을 모신 조사당이 있고, 그 앞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나무가 있다.
철조망으로 둘러쳐 보호하고 있는데 정말 안습이었다.ㅜㅜ 조사당은 국보 제 19호, 조사당 벽화는 국보 제 46호로 지정되었다.
조사당 지붕은 전면은 겹처마로 짧고, 후면은 홑처마로 길게 잡아 특이한 건축형태로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내부 입구 좌우에 보살상, 사천왕상 등 고려말에 그려진 국보 46호로 지정된 벽화가 있었는데,1918년에 벽을 떼어서 보장각내 유리장에 보존하고 있다. 일본놈들이 떼어내 가져가려다가 배로 이동하면 흙벽에 그린 벽화가 망가지기 때문에 못 가져갔다고...
광주에서 영주까지 왕복 10시간이 걸려서 실제 부석사를 둘러보는 시간은 불과 한시간 남짓~~ 3시까지 모이라고 했는데, 조사당은 봐야 될 것 같아 다녀왔다. 조사당 옆을 자인당과 용진사(?)가 있는데 거기는 못 가고 그냥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만나는 일주문 뒷모습엔 <해동화엄종찰>이라고 써 있다.
우리가 점심 먹은 무량수 식당도 한 번 잡아주고... 버스에 올랐다.
지역경제를 위해 산 영주사과도 맛보고... 돌아오는 길목의 가을 풍경
돌아올 땐 안동과 군위 휴게소를 들러 광주에 도착하니 밤 9시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10시가 다 되었다.
부석사를 찬찬히 둘러보려면 1박 2일 머물면 좋을 듯...
번개불에 콩 볶아 먹듯 보고 와서 감상이 아닌 자료집을 참고한 정보와 사진만 올려요!
날새면, 고등학교 독서회에서 장성 필암서원과 홍길동 테마파크, 축령산 휴양림을 가는데 밤새 비가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