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계획 - 도움주세요.
이번 주말에 영월쪽으로 휴가를 가신다며 청령포도 거론하셨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 책을 7월에 읽었는데,
꿈섬님께 읽어주려고 오늘 다시 빌려왔어요.^^
물론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이 나오겠지만...
단종의 통곡을 지켜 본 천연기념물(제349호) 청령포 관음송
<영월 청령포 관음송> -박상진 글-
제천과 영월을 잇는 4차선 국도를 달리다 서영월로터리를 빠져 나오면 금방 청령포다.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이 자라목마냥 물 돌림을 하는 곳이다. 강에 인접해 약간의 평지가 있고 뒤편은 가파른 절벽이다. 배를 타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곳.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다. 1457년 6월 28일 임금 자리에서 쫒겨난지 2년 4개월여 만에 어린 단종은 군사 십여 명과 시녀 몇 명에 둘러싸인 채 이곳으로 귀양을 온다.
청령포 솔숲이 서편 가장자리 쪽으로 조금 비켜서서 관음송이란 소나무 한 그루가 주위의 다른 소나무를 압도하면서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 단종은 이곳에 귀양와 있던 동안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 들어 올 때 단종의 나이는 겨우 17살, 지금 아이들의 나이로 치면 고등학교 1~2학년이다. 사춘기의 단종에게도 남달리 금슬 좋은 왕비가 있었다. 재위 2년째인 1454년 1월, 14살의 소년 단종은 한 살 연상의 정순왕후를 맞아 혼례를 치뤘다. 그리고 어린 부부의 애틋한 사랑으로 어려운 처지를 버티어 오다 갑자기 청령포로 쫒겨오고 만다. 이렇게 헤어진 왕비는 평민으로 강등돼 원치 않는 삶이었지만 여든두 해를 더 살았다. 그러나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사릉(思陵)이란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단종이 관음송 굵은 줄기에 기대어 왕비를 그리워하는 시간도 그렇게 길지 못했다. 그해 여름 물난리를 만나 청령포가 휩쓸리자 2개월 남짓한 '육지속의 외로운 섬' 생활마저 마감하고, 영월 현청이 있던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가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그는 예견이라도 한 듯, 가까이 있는 자규루라는 누각에 올라 지은 시 한 수가 너무 애절하다.
원통한 새 한마리가 궁궐을 나온 후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와도 한(恨)은 끝이 없어라
두견새 울음도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은 불게 물들었구나
하늘마저도 애절한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 젖은 내 귀에만 들리는가
귀양온지 4개월 남짓, 그해 9월에 일어난 산 넘어 경상도 순흥부의 금성대군 역모사건을 핑계로 세조는 어린 조카를 아예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이에 단종은 청령포 관음송 나뭇가지 너머로 애태워 그리던 왕비는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영겁의 세계로 떠나야만 했다. 10월 24일, 관풍헌 어디에선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짧은 생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관음송은 키가 자그마치 30m로서 웬만한 고층아파트에 버금간다. 또 가슴높이 둘레 역시 5.2m로서 세 아름이 넘는다. 땅위 1.5m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갈라진 줄기 둘 다 가지를 별로 매달지 않고 거침없이 더 높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았다. 미끈하고 늘씬해 흡사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잘 생긴 수영선수의 몸매같다.
소나무 특유의 붉은 껍질과 함께 펼쳐진 나무의 웅장함은, 채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에 가버린 단종의 혼이 담겨있는 듯도 하다. 그래서 이곳은 수많은 관광객이 들어와도 떠들썩한 웃음소리는 나지 않는다. 모두들 숙연해진다. 먼 허공에 눈길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긴 탄식을 하는 이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