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권정생 선생님을 추모하며...
오늘 5.17 권정생선생님 2주기
4월 1일 낯선 전화를 받았다. 도서출판 보리에서 온 전화였는데, 알라딘에 올린 권정생 선생님 추모 페이퍼를 보고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개똥이네 집' 5월호에 실은 원고를 부탁하는 거였다. 2007년 6월 어머니독서회 토론도서가 <몽실언니>였는데, 마침 내가 <몽실언니>리뷰를 올리고 두 시간 후에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내 음력생일과 같은 날이라 특별히 마음 아프게 기억한다.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 남들보다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기보다는 그분의 삶 자체가 존경할만하고, 애써 본받아야 할 삶이라 추모하는 마음이 크다.
준비 기간이 일주일 밖에 안 되는데, 그 주에 중학교 독서회 작가초청 건으로 작가 섭외를 마쳐야 했고, 7일은 중학교 독서회 모임, 9일은 고등학교 독서회 모임이어서 토론도서를 읽는 것도 벅찼다. 할 수없이 데드라인을 12일로 양해를 구하고 주말에 권정생 선생님 다시 읽기에 올인했다. 서평도서인 <랑랑별 때때롱>은 물론이고, 마노아님께 선물받고 여직 안 봤던 <권정생>과, 창비어린이 2007년 가을호에 권정생 선생님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어 그것도 다시 찾아 읽었다. 위 두 책에서 거론되는 작품도 다시 찾아 읽느라 <우리들의 하느님> <사과나무밭 달님>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까지 두루 섭렵했더니...... 너무 많은 정보가 입력돼 과부하에 걸렸다.
월욜은 쉬니까 부담없이 밤 새우고 써서 메일을 보내고 수정할 것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했다. 아침에 식구들 다 보내놓고 깜박 잠들었는데 도입부와 독서회 이야기를 조금 더 추가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밤새 급조한 글이 함량미달이라 영 찜찜했는데, 내가 염려한 부분은 괜찮다 하는데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한 숨 자고 오후에 수정해서 다시 보냈다. 잘 썼든 못 썼든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편집자가 알아서 글 위치나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실어주면 다행이고......
<개똥이네 놀이터>는 우리 아이들을 자연과 놀이와 이야기의 세계로 이끄는 잡지로, 2005년 12월에 창간했습니다. <개똥이네 놀이터>와 함께 나오는 어른들을 위한 잡지 <개똥이네 집>에는 오랫동안 어린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 온 분들이 교사와 학부모에게 들려주는 깊이 있는 교육 정보가 담겨 있어, 어린이 교육과 문화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대안 교육, 아이랑 함께 커 가는 어른들 이야기, 철에 맞는 살림살이 지혜, 여러 교육․문화 단체 소식들도 두루 담겨 있습니다.
<개똥이네 놀이터>와 같이 나오는 <개똥이네 집> 5월호에 실리겠지만, 도입부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아 살짝 올린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권정생 선생님이 꿈꾸는 세상, 랑랑별 때때롱>
책 읽는 엄마가 책 읽는 아이를 만든다
내가 권정생 선생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대학 3학년인 맏딸이 ‘몽실언니’를 사 달라고 했던 1999년이었다. 아이는 몽실언니가 불쌍하다며 가슴 아파했고, 그 후 ‘사과나무밭 달님, 점득이네’ 등을 읽으며 분단의 아픔과 통일염원을 읽어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네 짝꿍은 평양에서 큰다고 말했었는데, 어느새 결혼해도 될 만큼 훌쩍 자랐다. 하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하지 않는 현실은, 평양에서 자란 사위감, 며느릿감을 맞이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5월 17일은 권정생 선생님 가신지 3주기, 이제 누가 있어 통일을 얘기할 것인가? 가신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5월이다. 이제 선생님의 새로운 작품은 만날 수 없지만, 남기신 작품을 읽고 새기며 선생님을 추억하고 뜻을 받드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2001년 ‘책 읽는 엄마가 책 읽는 아이를 만든다’고 시작한 어머니독서회는, 매월 선정한 책을 아이들과 읽고 엄마들이 모여 토론하는 모임이다. 선생님의 작품에서 2006년 4월엔 ‘하느님의 눈물’을, 2007년 6월엔 ‘몽실언니’를, 2008년 12월엔 ‘우리들의 하느님’을 토론했었다. ‘하느님의 눈물’은 작고 하찮은 풀꽃나무와 동물들을 내세워,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일깨운다. ‘몽실언니’는 작가의 분신 같은 몽실에게 닥친 온갖 불행을 감싸 안듯이, 모두가 사람으로 만나면 남북이 다르지 않다고 이해시킨다. ‘우리들의 하느님’에 나타난 종교의 가르침과 삶의 철학이 일치한 그분의 삶에 우리는 숙연해졌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낭비하지 않나 돌아보게 되었고, 어떤 회원은 비로소 명품에의 욕심을 버렸다고 말했다.
|
<< 펼친 부분 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