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 임세원 교수가 세상에 남긴 더없는 온기와 위로
임세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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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오늘 한 페이지를 또 견디는 한 독자입니다.
힘들 때마다 선생님 생각합니다.
유독 이 책이 생각나는 날이 있습니다.
오늘처럼 추워서 신경통이 극심한 날은 거의 그렇고.
더이상 선생님은 계시지 않지만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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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친추 알림이 뜨신 분들께는 더 죄송합니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았는데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친추 할 생각이 없으니 팔로우 취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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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아홉수에 대해 앞자리에 대해서 그다지 특별한 마음은 안 들었는데 오늘 문득 갑자기 ㅋㅋㅋ 어디에서나 40이란 숫자가 유독 보인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하는 정책들이 보인다.

2007-2010.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the Great Recession 왔을 때. 물론 97 IMF 삼촌세대 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내 또래는 그때 구직자들이었는데…. 내 주변은 대체로 계약직으로 공기업 대기업을 들어가 3-6개월 이후에 잘렸다. 그리고 재채용이 됐다. 재계약으로. 대체로 애가 괜찮으면 윗사람이 다른 회사를 소개시켜주었다. 애가 밥맛 없으면 얄짤없이 해고였다. 계약 위반을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열정페이라는 말이 미덕이던 때였다. 우리가 암만 괜찮은 애라도 과연 언제까지 3-6개월씩 끊어 스타카토로 재취업을 하느냐? 정부가 취업률 올렸다고 자랑할 때까지. 오호라, 과연, 정권이 청년을 구했고 취업률이 이렇게 올랐다, 는 기사 볼 때마다 방금 재취업에 목메는 우리들 눈물을 뿌리는 걸 서로 같이 봤지. 우린 만날 때마다 펑펑 울었다. 특히 여자면 남자 직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양보하고 잘려야 했다. 특히 회식에서 윗사람에게 재롱떨지 않는 여직원, 2차 도우미 나오는 노래방이나 룸싸롱을 갈 수 없는 여직원이면 그 회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그런 잘못 말곤 한 게 없으니. 개중엔 성격적으로 능력적으로 문제인 사람도 물론 있었겠지만 나갈 때 ’그래도 넌 결혼하면 되니깐 회사의 결정을 이해해주길 바라‘ 이딴 개소릴 들어도 뭐라고 할 수 없던 때였다. 시발 그런 말을 뭐하러 하냐고. 차라리 저 남직원 보다 사회성 없어 잘렸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납득이 되는데. 꼭, 넌 시집이나 가라. 사람 자르면서 그게 할 소리야?
하여간 우리는 재활용이 됐다.
오 난 너랑 동세대지만 그런 적 없는데? 축하드린다. 졸라 부럽다. 그런 분들은 정말 성공적인 삶을 사신 거다. 아니면 남성이었거나. 우린 애매했다. 애매한 대학 공대 출신 여학생이었거든. 대학 들어갈 땐 어디보다 좋다 해서 들어왔지만 취업해보니 우리보다 성적 안 좋은 애들이 들어가는 데라고 생각하는 학교보다도 취업률이 나빴다. 공대인데 취업률이 76%였나. 우리가 문닫고 들어갔다.
한편 취직한 동기들과 오빠들이 갑자기 좀비처럼 사귀자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곧 지방으로 발령갈 미친놈들에게 2-3일에 한번씩 고백을 당했다. 몇년간 기색도 없다가 갑자기 술처먹고 납치할 거라는 시발롬도 있었다. 두번째 학교 졸업후 내게 오는 전화도 다 결혼정보회사.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부잣집 맏며느리 처럼 생긴게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 점, 내 유일한 경쟁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존나 기분나쁘고 슬프네. 이후 20키로가 불고 나이만 처먹은 나는 아줌마 외모에 못생겨서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잘근잘근 잘린다. ㅋㅋㅋ 아우 정신없어.

나는 그때 취집도 스타카토 재취업 리플레이도 너무 무섭고 끔찍해 대학원 진학을 꿈꿨다. 내가 가고자 하는 학과 대학원을 가기 위해선 또 이번엔 학점이 자신 없었다. 거기다 당시 내가 들어가고자 했던 랩실 대학원생들에게 내리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언아더 대학을 갔지.

성적 말아먹은 이유: 나는 2-1학기 중간고사 직후 웃픈 전치 12주 사고를 당했고 궁딩이 꼬리뼈 주변 수술 및 입원으로 10주를 있고 조기퇴원을 했었는데 병가휴학도 안했다. 다친건 궁뎅이 뿐인데 수업도 못들었다. 석달간 제대로 앉을 수도 씻지도 못했고 개복 상처에 심지꽂고 매일 드레싱 하면서 오로지 궁딩이를 위한 삶을 살았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서 마음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픈덴 엉덩이 뿐이라 병가 휴학하는 게 너무 이상한 거 같아 안했다. 수업도 안들어서 중간고사 성적의 80%를 기말로 취할 수 있으면 기말로 취하고 그게 불가하다는 교수의 수업은 기말 시험범위도 모르는데 꾸역꾸역 궁뎅이에 큰 붕대를 감고 환자복 차림으로 가서 시험을 쳤다. 의자에 앉을 수도 없어 식은땀 흘리며 백지 냈지 ㅋㅋㅋ 그때부터 10년간 대운이 나중에 사주 공부를 하니 내 인생 최악이었다. 27살에 사주 보러 가는 친구 따라 가서는, 난 원하지도 않는데 봐주겠다 한 역술인이 넌 미래가 없으니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괴랄한 소리 듣고 사주 믿는 것들 상종 안한다 했다. 아니 그런 말 할 거면 왜 봐줘? 누가 봐달래? 근데 10년 뒤 내가 사주 공부 하니 그게 뭔지 알겠는 거다. 최악 대운 지났으니 이제 72세까지 잘 살다 가면 된다.

아무튼 내 계획은 뇌과학과로 진학하는 거. 강원대도 좋고 고려대도 좋고. 더 아래로 내려가도 상관은 없지만 본가에서 기차타고 출퇴근 가능한 대학원이길 바랐고. 그러기 위해선 2학년 1학기 때부터 사고로 (197학점을 듣고도) 처참한 공대 수업 학점들(병가휴학 안함, ABEEK공학교육인증 포기 안함, 영문학 부전공, 비사대 교직이수 포기 안함. 꾸역꾸역 노빠꾸여서 전자기학 회로이론 공업수학 수치해석 확률론 등등 과학, 수학같이 이어진 과목들이 전 학기 학점을 못 넘음)을 만회해야 했다. 거기에 오토마타, 인공지능이론 수업 수강 실패. 심리학의 이해를 들어버렸다. 들어보니 인지공학이나 시각심리학쪽으로 더 듣다가(일명 나머지공부) 뇌공학 가면 어떨까 싶고 또 생물학 들어둔 게 있으니 의학전문대학원 준비라도 하자 싶었지.
아무튼 그러다 어찌저찌 학사편입은 재수끝에 성공하였지만 몸이 안 좋아져서 치료비만 꼴아박다가 대학원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대학원이 문제야 당장 병원비가 없는데? 그러는 와중에 대충 5-8년이 지났고. 정신차리고 보니 무직자 백수 아픈 애라 많이 우울하고 위축되었다.

나는 자기상이 매우 긍정적인 편이라 상담심리학 수업도 못 들었는데 예컨대, 수업 초기마다 상담/치료 수업들은 상담자가 우선 치료돼야 하는 부분 때문에 다들 자기의 트라우마를 고백하고 치유하는 수업 세션이 있는데 그걸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할 순 있어도 내가 말하는 게 부담이 됐다. 난 더없이 행복한데 고민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저렇게 아파하면서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와 나 트라우마 지어낼까? 하다 다 뛰쳐나옴. 너무 배우고 싶지만 나는 왕따같은 걸 당해도 그걸 마음 깊이 갖고 있질 않았다. 또 편입 준비 때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어 폭식증이 있었고 그게 이어져 살려고 더 먹고 그러다 나중에 당뇨 합병증으로 발현이 돼 당뇨 진단을 받을 정도의 일도 있었지만 당시엔 어쨌든 편입을 해 원하는 공부를 했으니 정신적 고통은 벗어난 상태. 폭식을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했다. 사회문제와 심리학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우리조 너무 자신 없어하는 학생에게 잔디를 깔고 들어왔어도 너는 이미 이 학교 학생이니 너를 못 믿겠으면 너를 뽑아준 학교를 믿으란 말에 내맘대로 내가 치유됨. 수업 따라가기의 어려움도 가뿐히 극복하고 성적도 첫 1년차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고 나는 진심으로 거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당시 굳이 제일 속상했던 건 할머니의 죽음과 M언니의 죽음이었는데 그건 편입 전 학교 상담센터에서 5회기에 걸쳐서 상담 받고 벗어난 상태였다. 마음에서 충분히 애도하고 보내서 이제 더이상 눈물도 안 난다.

오히려 대학 졸업 후 무기력하고 위축된 상태를 보낸 거 같다. 이 상태로 상담을 공부했어야 하는데. ^^;;
내가 젊고 언제든 취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만 34세를 벗어나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청년 제도도 없었다. 오 진찌 심각하게 우울한데?
만 37-38세엔 청년 공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으나 청년 취업제도는 대체로 34세까지~



이제 더이상 나라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나한테 요구한다면 다 거부할 거야. 내가 세상에 필요없는 존재여도 상관없어. 나는 나한테나 필요한 존재면 되지 뭐. 세상이 나에게 해주는 게 하나도 없는데 뭐 내라고만 하네? 날 버려놓고 세금은 내라고? 시발 나중에 내가 고독사 할 땐 국가가 제대로 수습해줘야 한다? 점점 이런 마인드로 삼십대 후반이 지났다.

뜬금없지만 정희진의 공부 3월호 스페어 타이어 이야기가 정말 맞다. 나라를 위해 여성들이여, 출산으로 복무하라,고 하기 전에 우선 급한대로 위기의 애매한 나이의 사람들을 인재로 잘 활용하는 게 옳다. 출산율 때문에 미래에 노인이 된 우리를 감당할 청년들의 세금이 부담스럽다 할 게 아니라, 이미 존나 배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사람들 꼰대력만 높이지 말고. 맨날 경단녀 프로그램 보면 조리사, 바리스타, 미용 네일 라탄공예 창업과정만 모집하는데, 이거 기괴하지 않나? 다른 일도 할 수 있다. 경단남도 얼마든지 있고… 굳이 경단녀 경단남 어휘에 매몰되지 말고. 마흔, 쉰 되면 잘리는 많은 사람들이 갈 곳이 식당, 청소업체, 경비업체 밖에 없겠냐고.

20살까지 애들이 생각하는 진로들도 모아보면 대체로 10-20개 직업으로밖에 안 보일 정도로 너무 빤하다는 건 애들 가르칠때마다 늘 느끼는 건데, 직업 진로 교육이 너무 잘 안 돼 있다는 생각. 직업체험관 있으면 뭐해? 온 국민이 다 소방관 경찰관 요리사… 그게 다냐고. 과학자? 엄청나게 다양한데 그걸 그냥 과학자로 뭉개버려. 어린 나에게 제일 막연한 꿈의 이름이었다. 물론 난 과학자는 꿈이 아니었고 문과일 때도 늘 흉부외과 의사를 적어 현실적이지 못하고 문제가 있다는 담임의 의견이 학생부에 있었다.
최근 나는 한 수업을 들으면서 게임 제작시 배경만 디자인 하는 디자이너 직군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근데 게임 개발 수업 들으면 예컨대 제일 먼저 하는 걱정이, 나 캐릭터 자신 없는데… 그런 걱정이다. 내 친구는 컬러 매치만 하는 디자이너였다. 예를 들어 신차 개발 하면 버퍼 컬러, 차체나 바퀴 컬러만 뽑는. 게임 개발로 돌아와 백엔드 프론트엔드 개발자 이런 건 우리가 잘 알지만 게임에 필요한 소스, 펌웨어, 에셋 디자이너들도 있고, 학교 선배중엔 공공기관에서 게임에 필요한 기본적인 거만 개발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그니깐 완전 무에서 게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참조하는 라이브러리나 이런 거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는 거. 그런 건 회사가 아니라 각국 국가 연구원들이 만든다. 게임조차도 인프라라고 나라에서 해준다는 놀라운… 언리얼 에셋 마켓 들어가보면 문화재청에서 올린 에셋들 졸라 많고 난 그게 좋다.
암튼.
특허도 변리사만 있는 게 아닌데 변리사 준비만 하다가 나이 다 먹는다. 의외로 나는 명세사도 도면사도 재밌어 보이고 배우고 싶었다. 명세사가 많이 필요한데 명세사는 또 경력직만 뽑는다.
쉽고 빠르고 기계 손상이 적은 알루미늄 가공만 하는 사람들은 다른 자재를 깎을 때 막막하고 애매해하는 부분이 많다. 밀링하는 사람들은 선반이 궁금하고 선반하는 사람들은 밀링이 궁금하고. 금형이랑 밀링은 또 다르고. 근데 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하나만 알면 안 되는데, 교육기관들에서 조차 이걸 잘 알려줄 사람이 나는 솔직히 많지 않은 거 같다. 피드 얼마나 주고 스핀들 얼마나주고 가공은 어떻게 하고 이런 거 다 기능사 시험문제 정도까지만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으로만 가르쳐주시지. 모든게 기능사 같은 시험에만 맞춰져 있고. 실무랑 좀 괴리가 있다. 또 진짜 실력있는 분은 학력이 없어 대학에서 잘리기도 하셨다. 일하다 금방 관두고 가르치면서 학력키워 박사까지 간 분들은 이론은 대단할지 몰라도 그만큼 대학에 있느라 직장경험이 5년이 안되는 분들이 많아서 갈증이 좀 있었다. 모르시면 그냥 은근슬쩍 도망가셔서 또래학습을 주로 했다 ㅋㅋ
아무튼 뭐 그런 사람들을 표적으로 좀더 디테일한 수업들이 다양하게 열리고 재사회화 교육을 많이 해주면 좋겠다. 그러니깐 강사를 뽑고 강의를 기획하는 사람조차도 전문가여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니깐.
스스로 먹고 살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사람을 쓴다면 인구 고령화로 세수 못 걷힐 것을 왜 걱정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나는 정말 구직자 신세에서 나라 도움을 받은 게 거의 없다. 실업급여도 못 받았고 워크넷에 구직자로 등록해 사람인 워크넷에 이력서 뿌리고 다녀도, 함부로 ‘구직단념자’로 분류해 구직단념자 어쩌구 하는 문자나 보내고. 죽고 싶어지면 연락하라고 혼자 아니라는 정신건강센턴가? 그런 연락만 오고. 늘 인천공항이나 보험사나 아웃소싱 텔레마케팅 어쩌구나 바이럴 마케팅 어쩌구나 마포구 어디 구내식당 미화원 모집 글만 보내주고. 서른 다섯살에 받은 연락들.
내가 요리를 해봤나 청소를 해봤나. 손이 빠르길 하나. 내가 해본 일 중에 힘들긴 하지만 나에게 잘 맞았던 게 교정이랑 특허 관리 업무였는데… 나라는 나에게 그런걸 추천해 준 적이 없다. 나이 많은 직원을 부리기에 눈치보이고 싫다는 건 나도 알지만 이제 세상이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자리는 외국인들이 더 많이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일하지 못하면 미래에는 영영 일자리를 잡을 기회는 없다.
학력. 자존심 내버리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혼나며 일 배울 각오할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나이 상관 없이 써주면 좋겠는데 가시적인 성과 낼 수 있는 건 청년 실업정책이라 그런가.

https://youtu.be/BAaJguxS0Go?si=TGgEyGquL28ybFx_
오늘 엄마랑 같이 봤는데 나도 기생자식. 피터팬증후군. 토크포비아적인 기질이 다분했어서 너무 속상했다. 누구든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자. 그랬으면.

아무튼 40이란 숫자가 여기저기서 괜히 눈에 들어온다. 하다못해 시계가 40분 가르키는 것도. ㅋㅋ


여튼 드디어 완전히 실업 및 구직 정책의 혜택을 못 받는 나이가 되었다. 와우! 여기서 짤리면 끝이야! 창업도 뭘 알아야 하지. 맨날 카페. 치킨집 창업 과정이나 보이고. 마크라메 공예 창업. 공방창업은 대체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창업이 맞나.

결국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국가가 제공하는 정책보다 마음에 심심한 위로를 주는 건 나에겐 프로그래밍과 주식 뿐이다.
특히나 더이상 세상이 날 필요로 하지 않아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없는 세상에,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장이 주식이라서 올해도 다른 소원 딱히 없고 주식 공부 더 잘하자.
그런 생각만 든다.

아니 소원 개많다.

노안 백내장 망막변성증 더 심해지지 않았음 좋겠고
말초신경병증도 눈비 올 때 추울 때 지금보다 더 심하지 않았음 좋겠고 지방간도 좀 나아지면 좋겠고 갑상선 종양도 더 안자라면 좋겠고.
더이상 살 안찌고 인슐린도 줄일 수 있음 좋겠고.
기술적으로도 성장하면 좋겠지만 인격적으로도 짜증 죽이고 유한 사람으로 살고 싶고. 뾰족하지 않고 무난한 사람이길. 기왕이면 건방 덜 떨고 겸손한 사람이길.
운전에 실력 없는데 도로 연수 넉넉히 받고 치료비 나가도 걱정없을 정도의 돈을 모으고 싶다.
죽을 거면 고독사&급사&사고사&뇌사 먼저로 여러 사람 안 힘들고 나도 안 힘드는 복 받고 한방에 가길.

생각해보니 바라는 거 많네.


새벽에 뭐 쓰면 안되는데.

여튼 모쪼록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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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가 너무 좋다.
올 한해 되짚으며 너무 뼈저린 게 한 종목에, 특정 패턴에 너무 익숙해지는 건 위험하다는 거다. 그러니깐 기계적인 투자를 말할 때 큰 원칙과 약속 잡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투자는 고통스럽고 부지런해야 한다. 게으른 투자는 안된단 생각을 많이 했다.
이분 책이 초장부터 그걸 강조하면서도 술술 읽혀서 글을 잘 쓰시는 분 같기도 하고 그렇다. 얼른 다 읽어봐야지.

시드머니를 거의 다 잃고 사흘간 술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내가 잃은 건 돈뿐이고 돈은 더 벌면 된다고 깨닫고 충격에서 벗어나 공부하셨다는 게 프롤로그 내용인데 이게 넘 좋았다.


내 옆엔 부모도 있고 친구도 있고 나도 무사하고 돈은 또 벌면 되고.
정말 그렇다.

돈은 또 벌면 되고. 욕심 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당장 없으면 갚아나가면 된다. 돈때문에 사람이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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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성곡미술관에서. 안드레 케르테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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